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2 31.6%
[대전] 우리도 발품 팔자.
조회수 | 1,855
작성일 | 09.02.11
<경상도 사돈끼리의 대화>라는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갱상도 할매 서이서 이바구(이야기)를 해샀는데 한 할매가 "어이, 예수가 죽었다 카드라." 다른 할매가 "와 죽었다 카드노?" "못에 찔리가 죽었다 안카나." "어이구 머리도 안 깎고 풀어 헤치고 댕길직에 내 알아밨다." 이때 암말 않던 할매가 "어이, 예수가 누고?" "몰라, 우리 매느리가 아부지 아부지 케사이께. 사돈 어른인갑지 뭐." "그라모 너거 매누리 저거 아부지 죽은 데 갔겄네?" "컬지게 정이 없었능가 앙가드라." "원체 집안이 콩가리 집안이 되서 그럴끼다. 아매도." 다른 할매가 “그거는 또 먼 말이고?” “언체 업시 살아서 그런지 저거 아부지도 마굿간에서 낫다 케사코.” “또 저거 할매는 저거 할배가 누군고도 모른다 카이 말이 데나, 내참!" 이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위해 발품 팔고 다니십니다. “1장 28 다른 이웃 고을 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2독서 코린토 1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장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알리고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의 수단으로 베드로의 장모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이의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우리도 레지오 활동 등을 통해, 또 빈첸시오회의 자선 베풂 등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본당에서는 등산로에서 격주로 선교 찻집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 동네 살레시오 수련원 뒷산에서의 선교 찻집은 200여 잔이 나갔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천주교에서 주는 것은 부담이 없어 좋다고 하면서 흔쾌히 받아 마신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교회처럼 차 한 잔 주고 교회 나오라고 하면 거부감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 나오라고 강요하지 않고 나중에 자주 만나 친해지면 마음을 열게 되므로 그때까지 목마른 이에게 물 한 잔 주는 마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 책자는 본인이 가져가야지 억지로 쥐어주면 저만치 안 보이는 곳에 가서 내버립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 선포를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발품을 팔아 복음 선포에 앞장섭시다. 아멘.

방윤석 신부
452 31.6%
기도는 선굑의 원천

인간의 고통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고통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육체의 고통 앞에 선 인간은“나는 고통스러워 밤이 새도록 뒤척거리기만 합니다.”라는 욥의 기도처럼 무기력하고 더 나아가 정신적인 허탈과 상실감에 빠져 어떤 대상에 도움을 청하거나 혹 왜 이런 시련이 있는지 자문하기도합니다. 거룩한 신앙인마저도 병환 앞에서 하느님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깊은 신앙과 희망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과 함께 계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해주십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예수님의 손을 건네는 행위는 인격적persona)이고 구체적인 만남으로 무력감과 상실감을 치유해 주시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고통에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고통과 시련은 위기이며 동시에 은총의 기회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신앙이 흔들린다면 위기이고 반대로 주님의 현현을 희망한다면 평화의 시간이 될 것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위로와 자비의 하느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란 절망 안에 희망이 있고 죽음 안에 생명이 있고 의심 안에 신앙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에 숨겨진 비밀은 희망과 생명입니다.

복음의 둘째 주제는 선교입니다. 복음선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입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홀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그런 다음 두루 다니시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주요 일과는 ‘기도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Ora et labora)이었습니다. 선교에 대해 바오로사도는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라는 말씀으로 선교행위를 극찬했습니다. 예수님도 바오로도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기쁜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파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에게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기쁜 소식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예수님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일을 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고 기도합시다. 지금 기도하면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행복합니다. 기도하면 사랑합니다. 기도는 평화이고 사랑입니다. 또한 기쁜소식의 원천인 기도는 선교입니다.

김춘호 힐라리오 신부
  | 02.03
452 31.6%
[대전] 누워 잊지 말고 일어나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집에 가십니다. 그때 장모는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셨지만, 마중을 나가거나 음식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시는 것을 반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아프면 움직일 힘을 잃게 됩니다. 움직이는 것이 힘들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짜증도 나고 인상을 쓰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당장 내가 아픈데 누군가를 배려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제법 힘듭니다.

요즘 우리네 신앙도 저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처럼 아파서 움직일 힘을 잃은 신앙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만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위해, 이웃을 위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아픈 사람들이 울부짖는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 벌어져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외치지 않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침묵 속에 세상의 논리와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나의 신앙은 분명 아픈 신앙입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은사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바라보기 위해 움직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연민의 마음마저 생겨납니다. TV 속에 나오는 헐벗고 굶주린 어린 아이들과, 주변에 살고 있는 외로운 어르신들, 방황하는 청소년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혼모들, 삶의 치열함과 분주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면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십니다. 분명 우리의 기도가 세상의 병을 낫게 하고, 세상에서 활개 치는 악의 입들을 막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마귀들이 소리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치는 주님의 이름은 마귀들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오늘 나의 기도와 나의 행동이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는 복음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키십니다.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 않던 그 여인이 병이 나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듭니다. 이제는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는 참 건강한 신앙인이 되어봅시다.

<대전교구 이영일 야고보 신부>
  | 02.06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
!   [수도회] 사랑의 실체  [2]
!   [전주] 사랑은 우리 삶의 본질  [3]
!   [수원] 형제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  [2]
708   [대전]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1208
707   [청주] 묵상 : 꽃이 진다고  58
706   [마산] 주님의 사랑 안에서......  [3] 1894
705   [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사랑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5] 2443
704   [안동] 벗(친구)이라 부르겠다  [3] 2454
703   [대구]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2] 2400
702   [인천] 짝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누가…?  [6] 2267
701   [서울]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5] 2502
700   [의정부] 주님, 당신을 사랑하러 왔습니다.  [1] 57
699   [춘천] 서로 사랑하여라  [3] 2581
698   [군종]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1] 65
697   [원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 61
696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3] 1804
695   [수도회] 주님과 제2의 인생을  [3] 2113
694   [전주] 더 큰 불행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  [2] 2063
693   [청주] 토마의 불신앙  [1] 1992
692   [대전] 증거의 삶  [1] 1747
691   [의정부] 당신이 기뻐하시니 우리도 기뻐요.  [1] 1965
690   [수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65
689   [인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3] 2232
688   [서울]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 2300
687   [대구]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1] 2017
686   [부산] 교회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6] 2176
685   [마산] 부활신앙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3] 2163
684   [안동] 의심과 평화  [2] 2101
683   [춘천] 차선 지키기  [2] 102
682   [원주] 남을 위해 내 몸을 쓰게 하려고  [1] 2230
681   [군종] 보이는 것에 대한 더한 믿음  [1] 67
680   자비주일과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상본)  [2] 2285
679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 1687
678   [수도회] 매일 새로운 얼굴, 새로운 마음으로  [3] 2035
677   [수원] 변모의 기쁨과 빛을 향하고 있는 사순 시기  [3] 2236
676   [인천]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갑시다  [6] 2096
675   [서울] 수난을 앞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4] 2512
674   [대구] 아브라함의 시련  [2] 2272
673   [마산]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3] 2649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