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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838
작성일 | 09.05.16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사도행전 10,25-26.34-35.44-48

25 베드로가 들어서자 코르넬리우스는 그에게 마주 나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26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44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다음 주일에 지내므로 오늘 제2독서와 복음 대신에 부활 제7주일 것(제2독서: 1요한 4,11-16, 복음: 요한 17,11ㄴ-19)을 봉독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묵상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걸었듯이 너희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격이 다르고 감정이 다른 인간입니다. 삶의 자세가 틀리고 자라난 배경 역시 다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는지요? 어떻게 평생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실망과 좌절은 당연한 과정입니다. 억울함의 고통을 참지 않으면 사랑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단서를 다셨습니다. 그분께서도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답답함을 이해하셨고, 세상의 불공평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은 앞만 보게 만듭니다. 우리 역시 앞만 보며 살고 있습니다. 눈뜨면 당연한 듯 새날을 맞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지냅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는지요? 사랑뿐입니다. 더불어 사는 이와 주고받는 애정이 없으면 세상은 금세 사막이 됩니다. 부활의 삶 역시 까마득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생명력을 주듯이 너희도 그렇게 ‘힘을 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이라도 실천한다면 그만큼 삶이 달라지는 말씀입니다.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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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우슈비츠의 성인인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는 당시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콜베 신부를 체포하여 죽음의 수용소에 가둡니다. 수용소의 규칙에, 수감자 한 명이 도망쳤을 경우 그 사람이 속한 방의 열 명을 무작위로 뽑아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겨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콜베 신부가 구금된 수용소에서 수감자 한 명이 탈출했습니다. 수용소의 소장은 수감자들을 광장에 열지어 세워 놓고 아사(餓死) 감방으로 갈 열 명을 골라내었습니다. 뽑힌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 콜베 신부는 동료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와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하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무시무시하고 참혹한 감방에 갇힙니다. 절규와 비탄의 소리가 가득했던 감방은 콜베 신부로 말미암아 기도와 사랑으로 채워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잔혹한 지하 감방이 교회로 변한 것입니다. 콜베 신부는 물과 음식물 없이 2주간을 견디다가 결국 독극물 주사를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를 기도로 바꾼 사랑의 순교자입니다. 그는 사랑만이 미움을 이기는 비결임을 일깨워 주었고, 타인을 지옥처럼 경계하는 세태에 함께 사는 것의 소중함을 알려 주었습니다.

매일미사 2012년 5월
  |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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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미사 2015년 5월 10일>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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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앙인들의 가장 큰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려 해도 그가 한 일이 떠올라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행실을 고치고, 더불어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을 풀어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고 싶어도, 기회를 놓치고 그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합니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나에게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내 안에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기 위함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5월 6일
  |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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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사랑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교회·사회·나라는 분열되고 맙니다. 사랑의 시작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자 표지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고 가장 의미 있고 행복했던 것은 사랑한 일이고 앞으로 남은 것은 사랑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합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몸이 괴로운 것처럼 영혼도 사랑을 받지 못하면 고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건강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받을 줄도 알고 줄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했듯이 성경에 나타난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당신 모상으로 빚어 만드신 것은 사람을 사랑할 대상, 사랑받을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함이 없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당신의 속성인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강제적인 사랑이나 어쩔 수 없는 사랑, 비인격적인 사랑, 마음이 없는 사랑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랑은 아무리 받아도 사랑의 가치와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받아도 가슴속에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그냥 알게 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세상과 더불어 죄를 먹고 마시며 살던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인도에서 빈민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마더 데레사는(1910­-1997)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영국의 한 방송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일생 동안 살아왔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 있는 몇 시간만이라도 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한테서 사랑이 흘러나와 예수님을 거쳐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 사랑은 다시 우리를 거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거저 받았습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와 예수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 또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5,12)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15,10 참조)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는 가지가 되려면 하느님의 속성인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물과 기름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내가 미움의 삶을 살아간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는 가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인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려면 나 역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3.7-­8)라고 사랑의 찬가를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사랑이고, 우리가 청해야 할 것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생의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 열쇠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시다.

▦ 정애경 수녀 (소속 수도회를 모름,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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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사랑받는 것에 두려움 없이 우리 자신을 맡기게 해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Lectio)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찾고 마음을 알려고 노력하며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된 사랑은 ‘머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지난 주 복음인 15,1-8과 비교해 보면 두 본문의 내용이 병행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머물라”(요한 15,4)는 중심구절의 의미를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라는 말로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하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머물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단 한 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머물라는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머물다’라는 의미 외에 ‘살다, 거주하다’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볼 때 ‘내 사랑’은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제자들을 향해 지닌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9ㄱ절 참조)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복음서 저자 요한은 여러 차례 기록합니다. 아버지는 아들 손에 모든 것을 내주셨고(3,35)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5,20) 그분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어 아들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17,24) 그분의 사랑은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알려주어 함께 나누고, 제자들도 당신이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랑입니다. 제자들을 당신의 키 높이까지, 하느님 아들의 높이까지 성장시켜 주는 스승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만이 가능한 그런 깊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고 그냥 ‘내 사랑 안에 머물라’고 초대하시는 것이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머물 집입니다. 집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어느 집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집주인이 정직한 사람이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믿고 모든 것을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관계에서 ‘머문다는 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데 ‘예수님의 집’에 머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라는 초대를 큰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집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훈훈한 공기처럼 떠도는 곳입니다.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은 매일 새벽에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이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크고도 크신 아버지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서 사랑에 몸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앞으로도 지속되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15,10ㄴ) 이 말씀은 이미 14,15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순종 사이에는 상호 의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순종을 요구하고 동시에 순종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이 순종은 그분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 주는 사람”(잠언 17,17)입니다. 진실한 친구들은 항상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눕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 가장 소중한 것,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친구들’과 나눕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뽑은 이유는 가서 열매를 맺고 그리하여 제자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한 15,16) ‘열매를 맺으라’는 것은 밖으로 선교하러 나가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권고입니다. 특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7절) 사랑은 수직으로 하느님을 향한 것이기도 할 뿐 아니라 수평적으로 형제들 안에 가지를 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 묵상(Meditatio)

주님, 당신은 오늘 제게 “나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이며 하늘의 본향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편안하게 ‘머물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저한테 이런 정다운 집을 선물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 집에서 저를 쉬게 하시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며 인생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갖게 해주십시오. 매일 태양이 뜰 때마다 그 집에서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제 삶을 맡기는 훈련을 하도록 초대하시니 감사드립니다.

▬ 기도(Oratio)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와 함께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 98,4-5)

▦ 임숙희 님 (영성신학 박사)
  |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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