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16.8%
[마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조회수 | 1,954
작성일 | 09.05.16
아름다운 정원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과 거름을 주며 정성스레 가꾸었습니다. 그 결과 두 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나무를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왔고, 주인에게 나무를 잘 키웠다며 칭찬을 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한 나무가 불평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사람들에게 이로운 열매를 맺어서 제공하는데, 왜 나에게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주인에게 칭찬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 주인에게서 완전히 자립해서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게 만들거야!’ 그때부터 그 나무는 주인이 주는 물과 거름을 먹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화창한 날이 되어, 정원에 사람들이 많이 놀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나무에게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간히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저 나무 몇 년 전에는 이 나무처럼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많이 맺었었는데, 지금은 볼품없이 변했다.’ 그제야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주인님의 사랑과 정성이 내가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었고, 내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었구나!”

우리는 주님의 정원 안에 있는 소중한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그저 그 정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정원에서 받은 양분을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그 정원에 있기에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지는 뒷전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많이 미안합니다. 당신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에, 세상을 살아가며 당신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부족한 우리이기에 더욱 주님께 송구스럽습니다.

주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당신의 양분을 잘 섭취해야 합니다. 당신의 양분을 잘 섭취하려면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집과 욕심을 포기하고 당신의 양분의 섭취해야 합니다. 나의 열매가 아니라, 주님 양분의 힘으로 당신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양분인 성체를 그저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래서 세상에서 내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라!”

오늘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들 안에서 사랑의 꽃과 열매를 세상에서 맺으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당신 사랑의 꽃을 피워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민 신부
450 16.8%
보여 주시는 “내리 사랑”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로 “아가파오”αγαπαω 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는 세 개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ερω , 둘째는 필로스φιλο (동사는 필레오 φιλεω), 셋째는 아가패αγαπη(동사는 아가파오 αγαπαω)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에로스”라는 단어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필레오”보다는(동사로 23번 명사로 28번) “아가파오”가 압도적으로 많이(동사로 120번 명사로는 130번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에로스”는 감성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고, “필레오”는 지성적인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철학哲學을 희랍어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ια라고 하는데, 뜻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라고 했을 때, “필레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가파오”(동사)와“아가패”(명사)는 질적으로 최고의 사랑, 즉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헌식적인 사랑이 그것일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도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계명에서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표현할 때 “아가파오”가 사용됩니다(마태 22장, 마르 12장, 루카 10장).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응답합니다. 왜 “아가포 쎄αγαπω σε”(준말 : “싸가포”σαγαπω)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필로 쎄φιλω σε”라고 대답할까요? 두 번 다 말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오”대신 “필레오”로 물으시니, 베드로가 마음이 슬퍼졌다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참조. 요한 21 15-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지적이고 이론적인 사랑이 아니라, 최고의 질적인 사랑, 즉 헌신적인 사랑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한 15,12)이란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오늘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0-11)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보여주시는 “내리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제1독서의 말씀입니다. 즉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설교를 한 내용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 이방인들도 세례를 받으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사도 10,48).

이렇게 헌신적인 최고의 사랑은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서로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고, 격을 없애는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보여주고 계신데, 우리는 어떤가요? 편을 가르고, 끼리끼리 모이는 데만 더 잘 익숙해져 있고, 그런 일에 더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자 여러분!

황봉철 베드로 신부
  | 05.12
450 16.8%
[마산] 썸?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그 사랑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구약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교회에 몸담으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
도록 듣고 또 들은 ‘사랑’이 어찌 새로운 계명이며 당신의 지상명령이란말입니까?

사실 이 복음말씀을 접하면 답답함이 먼저 가슴을 짓누릅니다.

우리네 교회 안에서조차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고 질투하고 헐뜯고 비난하며 도저히 사랑이란 녀석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새삼 무슨 사랑타령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라틴어 속담처럼 신자는 신자에게, 신자는 사제에게, 사제는 사제에게 늑대인 이 현실 안에서 몰라도 너무모르는 예수님이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제나 신자는 교회로부터 축출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리떼가 만연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차라리 “너희는 결코 서로 미워하지 마라. 이것이 나의 유언이며 계명이다!”라고 하셨다면 그런 노력 정도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하이에나처럼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그 누구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까만 궁리하는 이 참담한 교회 안의 모습을 직시하면 ‘사랑살이’는 그저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하지 못하신 우리 예수님의 이상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아주 뒤늦게 미련한 내 머리와 마음속에서 꿈틀댑니다. 새로운 듯, 새롭지 않은, 새로운 것 같은 그 사랑이 이 서글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하긴 우리 교회가, 세상이 보이지 않게 자신을 온전히 던져 사랑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그 몇몇의 고귀한 사랑살이 때문에 굴러 올 수 있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조차도 세상사는 법에만 의지하여 당신의 그 ‘사랑놀음’을 비난하고 있었네요. 변명하자면 작금의 사랑 없는 이 세상에는 바로 당신처럼 어리석게 사랑만이 해답임을 알고 사는 이들이 더욱 요구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여야한다는 사실을 당신께서 유일한 계명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셨음을 마음으로 보지 못한 탓입니다.

주님, 이 못 나고 부족한 인간, 사랑보다는 미움이 앞서고, 칭찬보다는 비난을 먼저 입에 올리며, 속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며 의심을 일삼은 거짓 신앙인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다시 왜 ‘사랑’이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가슴으로살 수 있는 용기도 허락해 주소서. 아멘!

<마산교구 김화석 도미니코 신부>
  | 05.10
450 16.8%
[마산] 생명 주일

천지창조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숨결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세상 만물과 자신의 모상인 인간에게 온전히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바람은 온 세상을 번성케 하고 다스리게 하시며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아름다웠던 세상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푸른 풀과 과일나무, 물에는 생물이 우글거리고, 새들은 날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습니다.”(창세 1,31) 하지만 어느 날부터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과 오염된 땅, 빛과 어두움을 구분 못 할 탁함, 썩은 풀과 과일나무, 물에는 생물이 죽어가고, 새들은 날지 못하며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부자유롭게 갇힌 모습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사는 우리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실까요?

다시 그분의 숨결을 떠올리며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하지만 오늘날 잘못된 가치관과 교만한 마음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저희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저희의 이기심과 오만함을 용서해 주시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숨결을 다시 떠올리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성현 요한 신부 -- 2018년 5월 6일
  | 05.06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원] 진정한 권위는 봉사와 사랑에서 
!   [광주]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   [부산]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   [인천]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   [서울]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1]
70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섬기러왔다]  1537
702   [부산] 공수래 공수거  [5] 2339
701   [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5] 1971
700   [수원]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5] 2216
699   [대구] 내 깡통  [3] 2117
698   [군종] 부자와 하느님 나라  46
697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6] 2139
696   [의정부] 소유와 나눔  [4] 2246
695   [안동] 부족한 것 하나  [2] 1077
694   [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4] 1935
693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5] 2201
692   [전주] 영원한 생명  [2] 2138
691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63
690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6
689   [원주] 영적법칙  [1] 70
688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3] 2441
687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5
68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4] 1572
685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1
684   [원주] 휴가증  73
683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6
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4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5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20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3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5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4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90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5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6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70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7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2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