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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달라는 대로 나누어주셨다
조회수 | 1,641
작성일 | 09.07.26
모든 생명은 먹어야 삽니다.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모십니다. 백성들은 배가 고프면 왕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신이라야 하느님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출애 3,8)을 약속하셨고, 실제로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에 이 말이 무려 14회나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풍족하게 먹여 살리시는 신이심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이르렀을 때, “무엇을 마시라는 말이냐?” 하며 투덜거렸을 때,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어 주셨고(출애 16,22-27 참고), 또 다른 곳에서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 하며 아우성치는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지팡이를 가지고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리고, 형 아론과 함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이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회중과 가축을 먹일 수 있으리라”(민수 20,8) 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하자, “저녁 때가 되자 난데없는 메추라기가 날아 와 그들이 진을 친 곳을 뒤덮었다. 아침에는 진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가 걷힌 뒤에 보니 광야 지면에 마치 흰 서리가 땅을 덮듯이,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출애 16, 13-15) 하였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이나 적게 거둔 사람이나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먹을거리를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 주셨다”(11). 제1독서의 엘리사는 백 명에게 빵을 나누어주었지만, 예수께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니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남은 빵이 12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12는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12광주리의 빵은 모든 사람을 다 먹일 수 있는 빵임을 표현합니다.

이것을 보고서 백성들이 흥분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다”(14) 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하였습니다. 병이 나면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분을 왕으로 모시자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분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누구를 모시겠습니까? 그러나 백성들은 순전히 물질적인 풍요를 주는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왕으로 추대 받지 않으시고 피신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을 많게 하여 백성을 먹이신 것은 단순히 배고픈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무한정으로 백성이 필요하다면 언제나 베푸실 능력도 의향도 다 가지셨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체성사를 예시한 것입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당신 자신을 그대로 내어주십니다. 성체성사로 우리와 일치하고 우리를 성화하고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신 예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오시는 주님을 주님답게 모시고 살아갑시다.

예수성심시녀회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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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나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민다나오 섬 다바오에서 2년간 산 적이 있다. 그곳 학생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던 나는 매주 토요일에 가난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주일에 돌아오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그룹은 한 신자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저녁식사는 밥과 반찬 한 가지뿐이었는데 그 반찬이라는 것도 검지 크기만한 멸치였다. 그 가족은 멸치 대가리와 꼬리를 먹고 우리에겐 몸통을 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했고 당황했다. 함께 간 필리핀 동료 수사가 내게 이 가족은 손님이 와서 대접은 하고 싶은데 있는 것은 멸치뿐이어서 그러니 맛있게 먹어야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다음날 수도원에 돌아온 나는 아침기도 중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떠올렸다. 그 가족은 비록 가난하지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나누는 그 태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삶의 자세가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1테살 5,16-­18) 살아가기에 그 조그마한 멸치로 외국에서 온 수사를 감동시킨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기적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정원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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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

어느 투병중인 수녀님의 다음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전에 건강했을 때 병으로 고통중인 이들을 대할 때 ‘잘 참아 견디라’라는 등 쉽게 말한 것이 참 마음에 걸리고 부끄럽습니다. 내가 아파보니 말은 쉽게 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털어 놓으며 도움을 청할 때 참 답답한 심정입니다.

소위 난치병이나 불치병,
경제적인 큰 실패,
실직,
미취업,
가족 간의 불화,
이혼을 앞둔 부부,
알콜이나 도박 중독,
재산 다툼,
심한 우울증 등,
복잡한 사회만큼이나 복잡하고 힘든 일들 얼마나 많은지요!

요즘 나라 안팎의 사정은 얼마나 또 복잡합니까? 수해에다 가중되는 정치적 불안에 경제적인 어려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따른 남북의 긴장과 국제적 냉기류,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참으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입니다. 절대 믿음의 끈, 생명의 끈 하느님을 놓쳐선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해선 안 됩니다. 시련과 유혹이 크면 클수록 기도도 열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바로 여기서 떠오르는 게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초점은 다급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있습니다. 내 소원 간절히 아뢴 다음, 이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 소원 기적처럼 이뤄지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내 소원 이뤄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고 훌훌히 자신의 뜻을 털어버리고 즉각 주님께 순종하는 것, 이게 진정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군중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굶주림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치유 받았던 이들 결국은 모두 죽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진리,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랄 수는 있지만 궁극의 초점은 하느님께 두는 것이요. 온통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내적 평화요 자유로움입니다. 기적도 치유도 일어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진정 믿음의 사람입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햇곡식 이삭 자루의 적은 양에 실망하지 않고 아버지께 전적으로 위탁합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이래야 후회함이 없고 하느님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의 시종의 낙심어린 말, 오늘 복음의 안드레아의 반응과도 흡사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 부족한 우리 모두의 보편적 반응입니다. 그러나 사람 눈에 하찮은 것이지 하느님께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기도와 정성이 담겼으면 하느님은 기적의 도구로 쓰십니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런 철석같은 믿음 있어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반응도 똑 같습니다. 전혀 초조하거나 불안한 기색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이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최선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온전히 아버지께 그 결과를 맡겼을 때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내 뜻대로의 기적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인사 대천명 믿음의 결과 후에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기적 덕분에 배불리 먹은 군중들, 그 육신의 양식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여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아 현실적 욕구를 채우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만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도 기적입니다. 내적 깨달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체험, 내적 기쁨, 내적 평화의 체험이 더 큰 기적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결국 언젠가는 죽습니다. 건강하게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심으로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사는 게 우리의 궁극 목표입니다. 온전히 ‘하나’의 깨달음 속에 살 때 영원한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 ‘한 분’ 안에 있음의 자각이 바로 구원체험입니다. 이 ‘한 분’에서 벗어나 있기에 고립 단절감의 외로움 속에 영육이 황폐화 되어가는 겁니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신 하느님이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하느님 체험을 위해 복잡하고 산만한, 천박한 얕고 가벼운 세상에서 때때로 떠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래야 기적으로 가득 찬 삶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본 ‘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란 책 제목도 떠오릅니다. 중요한 건 외적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개안이요 회심입니다. 마음이 눈이 열렸을 때 온통 삶은 하느님의 기적이요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이런 개안(開眼)이나 회심(回心)보다 더 좋은 기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처신, 그대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세속의 감미로운 유혹을 직감하신 주님, 아버지와 깊은 일치의 친교를 나누려 혼자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이제 영혼이 살기위해 고독과 침묵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혼자 고요히 고독과 침묵 중에 하느님 체험하며 영육을 충전시켜야 늘 ‘한분’이신 주님과 일치감 속에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큰 기적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시니 참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주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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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르심에 합당한 삶

-스토리와 내용이 있는 성체성사적 삶-

한밤중 어느 신자분의 카톡 메시지에 잠을 깼습니다. 착하고 약한 이들이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예나 이제나 비슷한 삶의 현실입니다. 외적으로볼 때 화려해 보이고 열심히 사는 것 같은 데 참 공허한 삶도 많습니다.

“신부님, 사는 게 참 힘드네요. 돈도 직업도 꿈도 이룰수 없고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굴욕속에 생존을 위해 견뎌내야 하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세상입니다. 며칠 전 공동체 휴가 날 관람한 영화와 연극이 생각납니다. 딱 잡히는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순간 두 가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 스토리story와 내용contents이 없구나. 한번은 생각없이 그냥 볼 수 있겠지만 두 번은 볼 수 없겠다. 우리 삶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없이, 의식없이, 의미없이 살다보면 참 스토리도, 내용도 빈약할 수 있겠다.”

이처럼 아무리 외적으로 부요하고 화려하고 활동적인 삶이라 해도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스토리story가 없으면, 내용contents이 없으면, 참 공허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각자 삶의 스토리는 잘 전개되고 있는지요. 지금까지 내 삶의 스토리에 만족하는지요. 과연 내 삶의 내용은 의미있는 내용으로, 기쁨과 감사의 행복한 추억의 내용들로 차 있는 지 묻고 싶습니다.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이 답을 줍니다.

“당신이 그 손을 벌려 주시고 우리 원을 채우나이다.”

주님께서 당신 손을 펼치시어 우리를 은혜로 채워주시기에 비로소 충만한 삶입니다. 믿는 이들은 주님을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라 고백합니다. 이런 주님이 빠졌기에 스토리 없는, 내용 없는 공허한 인생입니다. 바오로의 한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을 잡아 줍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비로소 내 삶의 스토리요 의미 가득한 내 삶의 내용들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야기story와 내용contents가 있는 성체성사적 삶’으로 정했고, 이를 위한 일곱가지 요소를 묵상했습니다.

첫째, 중심입니다.

삶의 중심이 우선입니다. 삶의 중심에 따른 삶의 질서요, 삶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삶의 중심이 없어,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안정과 평화가 없습니다. 삶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릴수록 스토리도 컨텐츠도 저절로 충실해 집니다. 계속되는 불볕더위에 시들어 죽어가는 풀들과는 달리 뿌리 깊은 나무들은 독야청청獨也靑靑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제1독서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만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역시 하느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곤경 중에도 하느님 중심에 뿌리 내리고 있기에 흔들림이 없는 옥중의 바오로 사도요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사무엘과 바오로, 예수님의 삶의 스토리와 컨텐츠는 얼마나 탄탄하고 꽉차 있는 지요.

둘째, 작은 것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것이 소중합니다. 사무엘 예언자의 놀라운 기적도, 예수님의 놀라운 것도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참으로 영성가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섬세하며 깨어있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참으로 작은 것에 집중할 때 놀라운 기적도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어느 정성스런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빵 다섯 개를 가져왔기에 엘리사는 백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 역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기에 오천명 장정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작은 것을 영어로 하면 ‘디테일details’이라 부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디테일에 집중하라’, 어디선가 읽은 글귀도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연민의 사랑입니다. 엘리사는 가져온 보리 빵 스무개를 즉시 나누니 백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명이 배불리 먹였고 남은 조각은 12광주리나 가득찼다 합니다. 바로 사랑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광야인생중의 우리에게 당신 생명의 빵을 나눠주십니다.

넷째, 감사입니다.

사랑의 기적, 감사의 기적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절망적 상황에도 예수님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습니다. 참 믿음은 감사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에 감동하신 하느님은 기적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감사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섯째, 나눔입니다.

삶은 나눔입니다. 사랑의 나눔입니다.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나눔을 통한 관계 맺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끊어져 단절되면 죽고 이어져 연결되면, 연대하면 삽니다. 나눠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나눠야 삽니다. 오늘 엘리사는 보리빵 스무 개를 즉시 나눠 백명이 먹고도 남았다 합니다. 나눌 때 남습니다.

나눌 때 주님의 축복이 뒤따릅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보리빵 다섯 개를 나누니 오천명이나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합니다. 나눌 때 남습니다. 나눔의 축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생명을 나눠주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여섯째, 하나입니다.

하나를 추구하십시오. 하나가 내적으로 분열된 우리를 치유해 줍니다. 하나를 체험할 때 저절로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전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시십니다.

이런 하나의 체험이 우리를 단순하고 순수하게 합니다. 내적일치의 삶을 살게 합니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신 주님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 당신과의 일치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하나된 내적일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일곱째, 초연함입니다.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초연한 사랑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후 예수님의 처신이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군중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홀연히, 단호히 떠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뒷모습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분별력은 모든 덕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 내신 후 미련없이 떠나십니다.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고독과 침묵의 외딴곳에서 삶의 중심을 잡고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를 위해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많은 것을 소유해도 삶은 한없이 공허할 수 있습니다. 각자 삶의 스토리가, 내용이 없으면 기쁨도 평화도 행복도 없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삶의 스토리를 잘 써가고 있습니까? 삶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믿음, 희망, 사랑으로,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삶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스토리와 내용이 가득한 성체성사적 삶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알려드린 일곱까지 요소를 명심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중심, 작은 것, 사랑, 감사, 나눔, 하나, 초연함 일곱가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스토리와 내용이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넷째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늘 복음중 예수님 삶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 2018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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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17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빵” 곧 “음식”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제1 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이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하며, 이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표징 구실을 합니다. 그리고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는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셨습니다. 곧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를 보시고 묻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 5)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곧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결국,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알지 못합니다. 안드레아도 역시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양’을 계산하지만 ‘모자람’을 바라볼 뿐, 그것들이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그들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이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곧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 11 참조)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가 됩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 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요한 6, 15).

오늘, 우리는 “생명의 빵”으로 건네주시는 주님을 모십니다. 이제, 그분을 모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7월 29일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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