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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 = 생명의 양식” 깨닫고 있는가?
조회수 | 1,914
작성일 | 09.07.31
신라시대에 원효라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승려들은 불교가 발달된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것을 소망했습니다. 원효대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34살의 나이로 의상대사와 함께 요동까지 갔으나 순라꾼에게 잡혀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11년 뒤인 45살의 나이에 다시 당나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번에는 육로가 아닌 해로로 건너가다가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지금의 남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비가 많이 오는 어둠이 짙게 내린 밤에 원효와 의상은 동굴을 발견하게 되고 하룻밤을 지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하루를 더 지내게 됩니다. 그들은 너무나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 시원하고 달게 마른 목을 축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들은 경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묵었던 동굴은 무덤이었고 바가지는 해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원효는 깨닫게 됩니다. 법과 진리는 당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에도 있고 자신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차라리 노예로 살 때가 행복했다고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배은망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십니다. 이렇게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과거 조상들의 모습 그대로 생명의 빵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생명의 빵 그 자체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세속적인 멍에에 연연하며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영원한 양식으로 내어주신 예수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오늘 제 2독서에 나온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조성진(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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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집을 헐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뜯어내고 있을 때 도마뱀 한 마리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 채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부들이 희한하게 생각되어 주인을 불러 도마뱀을 보여주었습니다. 집 주인은 그 도마뱀은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잡아서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두 잠시 그 도마뱀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도마뱀 하나가 그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3년 동안 벽에 못 박혀 있는 도마뱀을 위해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잠깐이나 영적인 죽음은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과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영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안전하고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1테살 5,28)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인간도 당신 모상대로 삼위일체로 만드신 것입니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아버지와 같습니다. 영혼은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느님께서 육체 안에 넣어주신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혼은 그래서 자신의 고향인 하느님을 항상 그리워합니다.

‘육체’는 성자 예수님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계시해줍니다. 누가 화내는 모습을 보면 육체가 화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영혼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영’은 성령님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전달자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오고가시며 두 분을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인간의 영은 마치 자동차의 기름통처럼 텅 빈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성령님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마치 기름이 없는 자동차처럼 영혼은 죽게 됩니다. 즉, 영혼과 육체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사랑하며 살고 싶지만 육체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써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안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인간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즉, 피로 죄를 씻고 물, 즉 성령님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피와 물, 이것이 바로 성체고 성경말씀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자신 안에 영을 채워 영혼이 원하는 것을 육체도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못 박혀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 신새입니다. 누군가가 음식을 날라다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음식을 날라다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와 가르침을 통하여 매일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고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닷물이 많아도 그 물로는 해갈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야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바다의 짠물로 해갈을 풀려고 하면서 더욱 더 영혼은 메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즉, 생명의 양식을 찾지 않고 육체의 만족만 찾으며 영혼을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바로 영혼의 기본적인 욕구, 즉 사랑과 행복입니다.

영혼은 죄로 잃었던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그 그리움이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육체를 채울지 영을 채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전삼용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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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는 사람, 내주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기가 찬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더 큰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흥미로운 것을 주님께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을 믿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며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금방 모든 것을 잊고 주님께 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결국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청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면 곧잘 하느님께 등을 돌리거나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 그토록 많음에도 하느님께 투덜거립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받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봐야 합니다.

감사드릴 것이 그토록 많은데도 우리는 혹시 하느님께 받을 것만 생각하지 않는지 돌아봅시다. 만일 아직까지 감사드리지 못했다면, 이제 우리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내주는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닮은 자녀가 될 것입니다.

김우정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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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일용 할 양식

한국의 많은 부모는, 자녀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갖고 살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 것은 의식주에 대한 불안이 해소된 뒤에 추구해도 늦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에 부정적이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인생보다 아예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며,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녀들이 가져오는 시험의 결과에 집중할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부모 아래 성장한 자녀에게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부모를 포함한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으면서도 자유롭게 된 삶에 대해 감사하기보다, 노예로 살면서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불평에 응답하십니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 덕에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또다시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살 걱정을 안 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결과만 좋다면’ 어떤 불의를 저질러도 수용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군중과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제자이면서도 군중의 모습으로 살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이면서 군중의삶을 동경하고, 군중과 제자의 삶을 오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생명의 빵,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를 하느님께 떠넘기는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되었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우리 삶에서 덧없는 것을 피하고 진실로 중요한 것을 찾아 누리는,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수원교구 서동조 유스티노 신부 : 2018년 8월 5일
  |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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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랑의 상처의 가장 완벽한 치료법

‘로마의 휴일’로 순식간에 전 세계의 가장 사랑받는 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은 사실 두 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한 매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나이도 많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배우 멜 페러란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남편을 위한 배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자신 주연의 영화 상대 주인공으로 남편을 추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유명세 때문에 자신이 가려진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촬영장에 나타나 허드렛일을 하며 남편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흥행 보증수표였던 그녀는 남편이 출연하는 별로 인기도 없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하게 합니다. 물론 남편이 연출한 형편없는 영화에 함께 출연하여 최초로 흥행에 참패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겐 오래 전부터 다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드리 햅번은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이혼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임신을 하여 남편을 잡아두려 했지만 남편이 자녀를 원하지도 않고 결국 영화 찍다가 낙마하여 유산되고 맙니다. 그런 아내를 돌보지도 않고 오직 돈과 재산만을 바라는 남편과의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14년 만에 이혼하고 맙니다.

둘째 남편은 이탈리아 의사였습니다. 그녀는 여행 중 우연히 만난 그 사람과 또 사랑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자도 역시 바람둥이였습니다.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신문에서 보고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오드리 헵번의 결혼생활은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원만치 못했던 것일까요? 바람둥이만 남편으로 맞아들였던 것일까요? 남편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오드리 헵번 역시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겐 ‘배고픔’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녀가 7살 되던 해 아버지가 가정부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라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 이후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하고 배고파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피해의식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을 타인을 통해 채우려하게 됩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목이 마르니 남자를 만날 때 남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자들도 자신들을 통해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려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이용당하는 것을 느끼는데도 사랑이 생겨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어렸을 때부터 크고 작은 이런 상처들을 받고 자라옵니다. 대부분은 부모에게서 받습니다. 가장 사랑도 많이 받지만 가장 상처도 많이 받는 대상이 부모입니다.

이 상처는 ‘배고픔’과 같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느낌입니다. 어릴 적 배고플 때 먹지 못하면 상처가 됩니다. 그 상처를 안고 있는 아이는 성장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려 살아갑니다. 몸만 어른이지 배고픈 아이가 그 사람의 주인인 것입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사랑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어른이 되면 자신의 힘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내 배를 채우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채워주며 저절로 치유되는 방식입니다. 전자는 폭력으로 타인을 이용해 치유하려는 방식이고, 후자는 사랑을 하면서 과거의 상처받은 아이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방식입니다.

히틀러는 가정부였던 자신의 어머니와 유태인 주인과의 불륜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상처를 모든 유태인을 가두고 죽이는 데서 치유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치유가 아닌 가학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 피해를 받지만 정작 더 피해를 받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데 그 사랑받지 못한 원망만 치유한다고 그 상처가 치유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강요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복한다고 그 빈 공간이 채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비틀즈의 명곡 ‘헤이 주드(Hey Jude)’는 폴 매카트니의 자작곡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같은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이 좋아해서 그의 아들에게 이 노래를 만들어준 것은 아닙니다. 당시 존 레논은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외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에 아빠를 찾는 아이가 불쌍해 힘을 주기 위해 만든 곡입니다.

폴 매카트니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 없이 사는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줄리안에게 존 레논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했지만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픈 현실을 밝은 미래로 바꾸어보자는 희망찬 노래를 써서 선물하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 있습니다. 이 빵은 우리 모든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내어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사랑인데 빵인 것입니다. 빵은 타인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타인의 배를 채워줌으로써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히 목마르고 영원히 배고플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락없이 또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약을 갱신하십니다. 그래서 성찬례 때 예수님의 피를 ‘계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면 내어주어야 합니다. 내어주는 게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때에만 배고픔이 진정으로 사라지고 목마름이 진정으로 가셔집니다.

전쟁터에 나가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겐 사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7년 간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는데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서 유니세프 자선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가 사망하자 전 세계가 세상을 윤택하게 한 가장 사랑받을만한 여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슬퍼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에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상처는 사랑하면 다 사라집니다. 물이 부족했던 땅에 수로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수로가 지나가는 주위 땅이 메마를 수 없습니다. 사랑 하려고 하면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에 담겨지기 때문이고 사랑이 나를 통해 이웃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전해주려고 할 때 내 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하려는 사람만이 모든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면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빵을 내려주는 사람이 됩니다. 구약의 모세가 되고 신약의 예수님이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사랑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8월 5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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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만나의 새로운 선물

오늘 복음에서도 지난 주일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만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체성사로써 만나의 새로운 선물에 대한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도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겠다.”(묵시 2,17)

제1독서: 탈출 16,2-4.12-15: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리라.

제1독서에서의 만나는 하느님의 선물이긴 하나,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과 반항심 때문에 주시는 선물이다(탈출 16,2-3 참조). 그것은 자비의 행위라기보다 책벌의 행위이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해도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불충실성을 항상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만나의 기적은 모세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탈출 16,4.12 참조) 모세는 만나를 보고 놀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에 대해 알려준다.(탈출 16,15 참조) 여기서 모세는 기적의 중개자일 뿐이다. 모세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이로써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가 어떤지를 보여 준다.(요한 6,32.35 참조)

복음: 요한 6,24-35: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호수 건너편에서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흥분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의 잘못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 기적들을 채울 권능을 부여하신 선물을 주시는 분 대신에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참조)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하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임을 상기시켜 주시고 계시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께서는 선물 그 자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L. Bouyer, Le quatrième Evangile, Casterman, Paris 1958, p. 125) 그러므로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제2독서: 에페 4,17.20-24: 새로운 인간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24절)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22절)을 벗어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33절)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담고,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8월 5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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