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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과잉친절의 하느님
조회수 | 1,737
작성일 | 09.08.01
언젠가 형제들과 농가 봉사활동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절대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식사로 도시락까지 맞춰 갔었는데, 홀로 사시는 할머님, 막무가내셨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큰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냄새부터 다르더군요. 밥에 기름이 자르르 흘렀습니다.

후덕하신 할머님, 아니나 다를까, 밥공기 크기부터 달랐습니다. 놋쇠로 된 무거운 밥그릇은 보통 식당 공기그릇의 거의 두 배였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을 꽉꽉 눌러 담은 다음, 또 다시 애써 고봉으로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껄쭉하게 잘 끓인 청국장을 큰 대접에 한 대접씩 퍼주셨습니다.

밥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도 밥공기에 든 밥은 통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저희 모두는 하나같이 밥그릇, 국그릇, 비운다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았다, 이제 다 먹었다, 했는데, 비호처럼 다가오신 할머니, 어느새 제 밥그릇 안으로 밥 한 주걱을 더 얹어주시며 하시는 말씀.

“덩치는 산만한 장정들이 밥 먹는 게 통 시원찮여! ”

‘밥 고문’ 당할 당시는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나 일방적인 할머니가 엄청 미웠지만,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할머님으로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겠지요. 할머님과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더 잘 먹이려고, 더 많이 먹이려고, 더 좋은 것을 먹이려고 기를 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망을 가고, 우리가 외면을 해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과잉친절’의 하느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셨습니다. 위로를 주셨습니다. 격려를 주셨습니다. 새 출발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이 지니셨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비와 은총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풍요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다주다 못해 줘서는 안 될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놓으신 사랑의 주님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되풀이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바를 관대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시간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웃들, 고통 받는 이웃들 싫다고 해도 쫓아가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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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얼마나 힘찬 선언인가!
과연 예수만이 외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감히 생명의 빵이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매일같이 음식을 먹지만
요 며칠간 식중독끼가 있는 듯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생명을 위해 먹지만
약이 되기는 커녕
잘못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단 말이겠지.

자,
나는 생명의 빵인가?
많은 영혼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사제요 수도자인가?
아니면 오히려 잘못 먹여서
식중독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병을 주는 사제요 수도자는 아닌가?

언제
나 또한 주님처럼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하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으리오.

그 이전에
<내가 생명은 주지 못할 망정 독을 주지는 말게 하소서>
하고 청해야 하리라.

내가 진정 생명의 빵이 되려면
생명의 빵이신 그분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리라.
그래야만
나도 작은 생명의 빵이 되리라.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게 해보자.
생명의 빵이신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해보자.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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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는 빵

삼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온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는 딱 한 번 주어지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공동생활을 해나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고, 제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성장의 시간 가운데 제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최상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다른 사람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주님이 내 안에서 더 찬미를 받으실 수 있도록 ‘나’를 포기하며 ‘나’를 낮추는 기도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도생활뿐 아니라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평화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수도생활도 한결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순간에 충실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비범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어 비로소 행복한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싶은 갈망을 안고 최선을 다한 저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수녀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얼이 담긴 얼굴’로 보게 되고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길 줄 아는 능력도 생겨났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지난 삼십 년, 아니 더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 저를 감사와 사랑이 충만한 진정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음을.

이세영 수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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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예수님

가끔씩 대책 없는 어르신들을 뵙니다. 아직도 ‘꽤 많이 남은 날들’을 생각해서 당신들 몫을 잘 챙겨놓으셔야 하는데, 이 자식, 저 자식 다 마음에 걸립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다 나누어 주다보니 이제 남은 재산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못줘서 안달이십니다. 나중에 어떡하려고 하시는지 정말 대책이 안섭니다. 이리 떼이고 저리 뺏겨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상태,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이제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더 대책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나눠주고 이제 그분께 남은 것은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남은 마지막 몸뚱아리조차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시며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애가 타시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하느님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 내내 음식과 무척이나 관련이 있었습니다.

‘빵집’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말들이 쉴 새 없이 입을 들이대던 곳, 건초가 가득담긴 말구유에 뉘어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허기진 백성들의 해결사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의 배고픔을 영원히 해결해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보다 강건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나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신성(神性)을 공유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죄인인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 내어놓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목숨인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나눠주신 생명의 빵으로 인해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과분한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그 큰 사랑, 측량할 길 없는 감사의 축제가 성체성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주님 현존의 장(場)이 어디 있을까요? 의외로, 또 은혜롭게도 그 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되풀이하십니다. 매 미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시는가 하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체성사에 참석하는 우리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파스카의 신비에 깊이 침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홍해를 통해 죽음의 땅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지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어제의 나와 결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죄와 악습으로 물든 지난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사 때 마다 우리는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반복해야 합니다.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과감하게 아래쪽을 포기하고 위쪽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죄와 암흑이 지배하는 죽음의 나라를 통과해서 은총과 빛이 흘러넘치는 생명의 나라로 부단히 넘어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제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별도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굳이 비행기 삯을 들여서 최후의 만찬이 거행되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은 이제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동물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필요한 사료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우리 인간의 영혼들을 영생의 창공으로 비상하게 할 참된 양식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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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하루하루를 하느님 주시는 새날의 선물로 생각한다면, 늘 새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죽어있는 것들은 차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잘 된 동물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진화가 덜된 동물은 차갑고 딱딱합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딱딱한 뼈를 에워싸고 있지만, 진화가 덜된 거북이, 게, 가재 같은 동물은 딱딱한 뼈가 살을 에워싸고 있다는 이야기 재미있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한 이들, 진화가 덜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화가 최고도에 이르렀다는 사람들, 예나 이제나 쇠붙이 무기들 들고 전쟁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진화가 덜 된 문명과 야만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처럼 무익하고 무모한 전쟁을 하는 동물들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군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은, 문명화된 야만인일 수뿐이 없습니다.

외적상태만 아니라 내적상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내면은 진화로 말하면 최고의 절정상태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백성, 원로들, 율법학자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을 거역하면 마음과 몸은 차고 어둡고 거칠고 딱딱해져 완고하고 인색해 질 수뿐이 없습니다. 반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참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은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가 그의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새삼 참 영성의 특징은 단순성,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결같이 성령 충만한 결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빵, 생명의 빵인 부활하신 주님의 성체와 말씀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존재하는 온 세상의 피조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인 다음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성체성사의 진수를 밝혀줍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결코’라는 단어에 주님의 힘이 집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육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지요! 영육이 배고프고 목말라도 채워지지 않아 차가워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생명의 빵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때 일거에 해결되는 영육의 배고픔이요 목마름입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복음의 군중은 물론 우리의 간절한 소원에 응답하여, 부활하신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빵인 당신 자신과 더불어 성령을 충만히 선사하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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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

빵의 기적이 있은 후, 백성들은 호수를 건너가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니까, 유다인들은 예수께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모세가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한 그러한 기적을 보여준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군중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요구한 표징은 외적 기적입니다. 기적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할 만한 권위가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에는 당신 백성에게 주고자 하는 고차원적 메시지가 그 안에 있습니다. 어떤 병자를 고쳐주실 때, 그 병자의 육체를 치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세상과 함께 병자를 지배하고 있는 사탄을 물리치고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능력을 당신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과거에 매달려있는 그들을 깨쳐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고(32),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주시는 빵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33)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군중에게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빵은 당신 자신임을 말씀하셨지만, 군중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서 물질적인 빵을 다시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화는 점점 더 깊어지고 구체화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35)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이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 분인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양식 노릇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또 하나는 성체성사로 우리를 먹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우선 하느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예수님을 말씀하십니다. 계시하시는 당신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는 말처럼, 우리는 말씀을 믿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하게 합니다. 바로 서 있기에도 힘겨운 우리에게 살길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이분을 떠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분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행동, 태도, 모두가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시며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살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서 살 수 없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빛이요 진리가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이요 원리가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힘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의 시작과 마침은 그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는 불안에 떱니다. 우리의 평화와 기쁨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생의 동반자로 맞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을 먹으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분께만 시선을 집중하도록 합시다.

예수성심의 시녀회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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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필수와 필요의 차이

‘필수’적인 것은 ‘필요’한 것일 수 있지만, ‘필요’한 것이 다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너무 쉽게 취하게 되면 우리 삶에서 정말로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게 됩니다. 독재와 억압, 자유와 해방 사이에도 독특한 연계가 있는데 자유로운 상황에서도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독재와 핍박 속에서도 존엄을 유지하는 자유인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노예 상태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의 ‘건너감’을 광야에서 체험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이 건너감이 ‘빵’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려주는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빵을 요구하고(제1독서) 군중은 예수님께 빵을 요구합니다.(복음) 빵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빵만을 추구하다 보면, 정녕 삶에서 ‘필수’적인 것, 즉 ‘하느님께서 그 필요(빵)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망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는 것, 삶 전반을 압도하고 관통해야 할 ‘필수’적 진리입니다.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에서 ‘찾음’은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며 복음서의 시작과 종결 부분도 ‘찾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수미상관首尾相關적 구성)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1,38)였고 마무리 부분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도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20,15)였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서가 줄곧 추구한 것은 ‘찾음’이라는 것, 그 찾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확인됩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 후 군중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그분을 ‘찾아’ 호수 건너편까지 몰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있었던 빵의 기적을 자세히 설명해주시면서 우리가 정녕 ‘찾아’야 할 것은 ‘빵’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 무엇을 찾는가

사실 군중은 자기들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예수님 주변에 머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이득 될 만한 것,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을 찾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를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사실 ‘기적’은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현존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징’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군중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기 위해 오신 분이고, 이를 은유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조금씩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군중은 질문 하나를 더 던집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사실 유다인들은 토라(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이란 어떤 것을 준수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29절)이라고 하시면서 기존의 통념을 수정합니다. 이어서 자신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천명하시는데(32-33절), 여기에서의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영적 갈망과 배고픔을 채워주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물질이나 존재는 인간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그 갈망이 응답받지 못할 때 더 구차한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이는 생명 자체이신 분을 소유하고 있기에 모든 필요가 충족되고 더 이상의 배고픔과 갈증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 결핍과 가난, 하느님을 찾는 은총

‘만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표징이었습니다. 광야에 있던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모든 역사와 시·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시는 분과 ‘함께’였고, 이를 보증해주던 것이 만나였던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는 언제나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 모세와 아론에게 자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자유를 위한 여정은 가혹하고 험난했으며 빈곤과 결핍, 그로 인한 불안과 의혹에 시달려야 했는데, 하지만 빈곤과 결핍이야말로 인간이 인정해야 할 본연의 조건이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무능과 한계를 제대로 인식한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고야 비로소 자신이 하느님이 아님을, 아니 하느님일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 광야가 주는 미덕이었습니다.

한편,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만나’는 하느님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하루의 분량 이상을 거두어들일 수 없게 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종속’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헛된 마음과 새 인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후,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줄곧 물리적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해방자’로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제2독서는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해방을 보다 통합적인 차원에서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표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헛된 마음”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즉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혼동하게 하는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하고 궁극적인 삶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탈출기가 제시한 것처럼 인간 스스로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지혜롭게 인식하고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 즉 “새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에페 4,22-24)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성체’가 모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불온하고 불경스럽게 군다고 다 파격이 되고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지독한 상처가 있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지할 수도, 연민을 가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초유의 사건에 마음 불편해하면서도 이내 내 안에서 발견되는 무지와 오류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체를 제대로 인식하고 경건히 모시고 있는지, 어쩌면 예수님에게 일상이 되었던 모욕과 비난, 훼손과 증오가 여전히 내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를 험담하고 누군가의 인격을 모독할 때, ‘빵’에 대한 본능적 필요만을 위해 기복적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희롱당하고 희생되십니다. 무지하고 무례했던 소행에 분노하며 단호한 응징으로 더 심각한 자극을 유발하기보다, 현실의 ‘필요’만을 내세우고 ‘필수’적 진리를 놓쳐온 나의 경박함과 어리석음에 통렬히 저항하는 것, 어쩌면 삶의 본질을 움켜쥐기 위한 가장 집요한 투쟁이며 진보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 : 2018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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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 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 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 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군중이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 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군중들이 다시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 28)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 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하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 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또다시, 그들이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 30) 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 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그리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빵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물로 준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군중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 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절대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물질의 양식이 없으면 육적인 생명의 죽음을 가져오듯이,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과 힘의 원천으로서, 우리를 진정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양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 안에 숨겨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요, 부활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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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 35)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빵을 만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생명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의 빵이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생명의 빵은 사랑으로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내려옴으로 용서를 이끌어내십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를 한 없이 기다려 주십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당신 생명을 온전히 바치십니다. 생명의 빵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납니다. 생명의 빵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아름다운 사람아름다운 생명이 오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빵으로 오십니다. 썩어 없어질 욕심을 내려놓고 영원한 생명을 기쁘게 받아 먹습니다. 생명의 빵이 우리의 배고픔과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한 기쁨으로 채워주고 계심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8월 5일
  |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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