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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조회수 | 1,522
작성일 | 09.08.08
엘리야는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다.
열왕기 상권 19,4-8

그 무렵 4 엘리야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7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묵상
  
우리는 수없이 성체를 모셨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어떻게 성체를 모셨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선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당연한 듯 모시는 성체가 되었습니다.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힘은 거저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부터 성체 신심에는 정성이 실렸습니다. 교회가 ‘공복재’를 규정한 것도 지성으로 모시라는 의도입니다. 지금의 공복재는 성체 모시기 전 ‘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지나친 신심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성체께 정성을 드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성체를 자주 모시면 ‘그분의 힘’은 강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안과 허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천상의 힘’입니다. 누구라도 온몸으로 성체를 모시며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성으로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이승과 저승’에서도 결코 헤매지 않게 됩니다.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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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해설
제1독서(1열왕 19,4-8) 해설 /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가 엘리야를 부축한다

19장은 17-18장에 나오는 문체와 성격이 동일하다. 그러나 엘리야 예언자가 처해 있는 상황은 대조적이다. 카르멜 산에서 주님과 엘리야는 바알과 그 예언자들을 대적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에 따라 백성은 자기 하느님을 선택하고 환호하여 맞아들였다(18,20-40).

그러나 이제 엘리야가 자기가 겪은 실패와 백성이 배교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학살한 사건(18,40. 19,1)으로 말미암아 엘리야는 이제벨 여왕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고, 급기야는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19,3). 메마르고 갈증 나게 하는 사막은 엘리야에게 더욱 심한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이 무력함을 통감하면서 주님께 도우심을 간청한다.

엘리야가 피신한 사건에는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예언자의 도피행각은 이집트 탈출 사건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다. 엘리야가 시나이 산(호렙 산)으로 간 것은 하느님이 거기에만 현존하신다 해서가 아니었다. 엘리야가 감행해 온 모든 투쟁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고, 순수한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참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성조들에게 계시하고 계약을 맺어 주신 장소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낙담해 있는 장면은 실의에 빠진 하갈(창세 21,14-21)을 연상시킨다. 하갈은 자기 아들 이스마엘이 덤불 밑에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고 울부짖고 있었고, 엘리야도 싸리나무 덤불 밑에 주저앉아 죽여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다.

그 두 경우에 다 천사가 나타나서 음식과 물을 제공한다. 이는 모세가 시나이 산을 향해 행진하는 백성에게 바위에서 솟아나게 한 물과 하늘에서 내리게 한 만나를 또한 연상시켜 준다(탈출 1,1-35; 17,1-7). 사막 한가운데서 기적적으로 물과 음식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자기 목숨과 생애도 이스마엘이나 사막을 유랑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목숨처럼 귀중함을 체험한다. 그렇게 하여 다시금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하도록 해야 하는 자기 사명을 통감하게 된다.

자기 마음속 깊은 데서, 양심에서 진실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목소리를 자기 자신에게와 사회 속에 실천하고 실현하기 위해, 사막에서처럼 죽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수와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용기백배하여 자기 사명을 꿋꿋이 완수해야 한다.


시편(33) 해설 /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이 시편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노래다. 시편작가에게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행복이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보호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린다.

‘없는 이들과 가엾은 이들’이 자기가 본래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달아들 때, 비로소 하느님이 그들을 온갖 무서움에서 건져 주고 모든 근심 걱정을 씻어 주고 진을 친 당신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힘에만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투쟁하는 ‘없는 이들과 가엾은 이들’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제2독서(에페 4,30-5,2) 해설 / 회개할 필요가 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권고를 하고 있다. 거짓말하지 말고(25절), 성내지 말고(26절), 도둑질하지 말고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고(28절),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말고 남에게 이로운 말만 하라고(29절) 권고한다.

31절에서는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을 버리라고 권고한다. 그 모든 행실은 벗어던져야 할 ‘옛 사람’의 행실이라는 것이다(21-22절). 그리고 나서 ‘새 사람’이 요구하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4,30; 5,1-2).

이제 인간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께서 당신 외아들을 어린 양처럼 제물로 삼아 우리가 지은 죄의 벌을 대신 받게 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서로 잘못으로 인한 결과와 죄의 벌을 대신 짊어지고 용서할 필요가 있다.

나약하면서도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뭉칠 수 있고 “서로 진정으로 위해 주고 아껴 주고 애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기본 바탕과 조건은, 서로 감싸 주고 부축하고 보완하고 용서하는 마음 자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듯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미운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용서하는 사랑이 서로 잘못을 깨우쳐 주고 필요하면 매질해 주는 의무를 망각하라는 말은 아니다.


복음(요한 6,41-52) 해설 / 내가 줄 밥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 밥을 먹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고, 웅성거리고, 불평을 한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 자주 나오고,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태도를 연상시킨다(참조. 탈출 16,2-12; 17,3-7; 민수 11,4 등).

‘사람의 아들’(메시아: 구원자)이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 정체를 밝히자, 유다인들은 당장 오해와 반감과 불신을 표시한다(요한 5,16-20). 예수께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라고 주장하자(41절),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귀를 막았다.

7,27에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그들은 의미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는 가르침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몸소 당신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었다(참조. 이사 54,13; 예레 31,31-34).

46절에서는 ‘하느님과 하나이신 사람의 아들’과 ‘믿는 사람’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말하려 한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메시아)은 동시에 사람들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중개자시라는 뜻이다.

47절에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 자신과 당신 살과 피와 목숨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밥’임을 강조한다. 요한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충만하고 완전한 전인적 생명’이요, 죽어도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생명이다.

48절에서 예수는 “나는 생명을 주는 밥이다.”고 주장하신다. 그 밥을 먹어야 인간들은 합심하고 일치하고 뭉치고 어우러져 ‘함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생명’을 받게 된다.

우리신학연구소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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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사막을 유랑하던 시절 굶주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불평하며 떠나온 이집트 생활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막을 헤매면서 만나로 배고픔을 달랜 옛 시절을 잊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먹었던 만나와 당신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배고픔을 달래 주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인 당신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유다인들을 무척 자극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으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표징으로 보지 않고 육신의 굶주린 배를 채운 것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면 그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지상의 양식에만 관심을 두면 하느님의 생명과 단절됩니다. 유한한 것의 노예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상의 양식을 바라고 그것을 먹고 살면 비록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더라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도 있습니다. 허무와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매일미사 2012년 8월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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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를 주님의 말씀과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계시담화입니다. 세밀한 독서를 위해 오늘 말씀인 요한복음 6장 41-51절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41-46절과 47-51절입니다.

전반부인 41-46절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이유를 그분의 신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아는 것과 보는 것’이 실체의 전부일까요?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 곧 하느님과 관련된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41절)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보는 것’에 묶여,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하며,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분’, 곧 메시아라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41-43절)

광야 40년을 헤매며 목마름과 허기짐 그리고 전쟁의 두려움 앞에서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처럼(탈출 15,24; 16,2.7.12; 17,3; 민수 11,1; 14,2.27) 유다인의 불신은 ‘수군거림’으로 드러납니다.(요한 6,41) 어쩌면 이들의 불신은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땅에 시선을 두고 땅의 가치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유한한 것을 넘어 무한한 것을 보고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요한 6,44ㄱ; 참조: 사도 8,28-31) ‘이끌어 주다.’라는 것은 주체主體가 ‘가르치고 인도’하면, 객체客體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사람’이 ‘이끄는 분’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고 하십니다.

‘듣다’라는 것이 아버지와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경청이라면 ‘배우다’라는 것은 들은 것을 삶 안에서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긴밀한 친교 속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아들만이 아버지를 보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습니다.(6,46; 참조: 12,45; 14,8-9)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후반부인 47-51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만나’와 같이 먹고도 죽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생명의 빵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 “누구나”(45ㄴ절), “누구든지”(51ㄴ절) 먹으면 영원히 살게 하는 보편적이고 열린 구원의 빵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빵을 먹고 힘을 얻어 밤낮으로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한 것처럼(1열왕 19,5-8)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우리의 일용할 영적 양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요한 6,48.50-51)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한테 줄 새로운 양식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ㄷ절)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커다란 사랑이기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요? ‘나의 살’에는 예수님의 완전한 희생이 담긴 사랑과 죽음 그리고 당신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 보입니다.(3,13-16 참조) 그러므로 믿는 이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6,44ㄴ) 종말론적인 구원자께서 지극한 희생과 사랑을 양식으로 삼고자, 당신의 ‘살’을 먹는 이들의 나날을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에로 완성해 가실 것입니다.

▪ 묵상(Meditatio)

임종을 목전에 둔 지인이 ‘하느님이 어디 있으며, 천당도 죽어봐야 안다.’며 완강히 하느님을 거부해 안타까웠던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가 보이는 물질세계에서도 온전히 보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무엇을 안다거나 또는 모른다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새삼 제가 ‘안다’,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참으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44절), 제가 어떻게 ‘생명의 빵’을 알아뵙고 받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찾았다고 믿었던 하느님은 제가 찾은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께서 ‘생명의 빵’, 곧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살’이 되어 일용한 양식으로 제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 기도(Oratio)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대로 저를 살려주소서.(시편 119,105.107ㄴ)

▦ 반명순 수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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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유다인들’이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6, 1 ‐ 40)에서 ‘군중’(사람들)이었던 이들이 이제 ‘유다인들’로 불리며 그들의 ‘규격화’되고 ‘제한된’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수군거린 까닭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41절).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들과 똑같은 인간인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빵이라고 하니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분명한데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다고 해서(6, 1‐15), 예수가 자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존재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들을 뿐 그 너머로 안에 들어 있는 의미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멀었습니다. 규격화되고 제한된 틀을 벗어나 진리에 의해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시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 광야에서 굶어 죽게 하느냐며 자기들을 이끄는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던’이스라엘 백성의 모습(탈출 16, 2‐8)이 떠오릅니다.
현재의 불편함과 곤고함에 짓눌려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없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놓고 따지지는 못합니다. 그저 자기들끼리 고개를 저으며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달리 ‘이적들’을 일으키는 특별한 능력과 권위를 지닌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불평과 수군거림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딱한 형편을 지적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만 예수님께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분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인간 편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그분에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그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실 것입니다(에페 3, 17). 바오로 사도는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습니다.”(2코린 4, 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차원의 주제를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스라엘 조상을 상기시킵니다. 광야의 고단한 여정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던 만나는 그들의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주는 양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탈출 16, 35)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셨던 만나는 물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는 ‘불사’의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구했던 ‘불로장생’의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하루 안에 먹도록 되어 있던 만나는 사람에게 하루 동안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하루의 양식’일 뿐이었습니다(탈출 16, 19).

그렇다면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한테서 받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분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내주실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 2)

셈어에서 ‘살(바사르)’이라는 말은 가능성과 동시에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이란 말로 당신 실체를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곧 사람을 참되게 그리고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실체인 그 ‘살’을 먹는 사람은 그분이 지니고 계신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잡혀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믿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일하실 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에페 5, 2), 오늘 우리는 그분으로 인하여 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소리 높여 외치겠습니다.

▦ 강선남 형제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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