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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언제까지 속 좁은 신앙생활을 하려합니까?”
조회수 | 1,946
작성일 | 09.09.24
누군가의 권유든 스스로의 결심이든, 신앙을 갖고자 예수님을 믿고자 성당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당을 찾은 이들은 예비신자로서 일정 기간 교리를 배우고 나면 세례성사를 통해 정식으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교리 중간에 세례 받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기존 신자들의 냉대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당에 가봐야 누구하나 아는 척 하는 사람도 없고 인사하는 사람도 없으니, 오히려 성당에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개신교회에 가보면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곤 합니다. 교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그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관심을 보입니다.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랑을 표명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성당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슬쩍 쳐다보기만 합니다. 한마디 말도 건넬 용기는 없습니다. 그저 ‘누가 전입 왔나 보다.’ 아니면 ‘지나가다 들렸나 보지.’라는 생각으로 일축해 버립니다. 신부로서 신자들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을 부르짖으셨는데, 우리는 너무 갇힌 사랑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관심과 관용이 아닌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 신자들 가운데 팽배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관심과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가로막았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은 요한의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거부이며, 개방적인 마음으로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옛날 교회관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언제까지 교회 안에서 편을 가르고 마음의 문을 닫으며 속 좁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까? 언제까지 무관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까? 이제는 예수님과 같이 열린 마음으로 관심과 관용의 대범함을 보여야 합니다. 신자들은 물론이요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도 밝은 모습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최종운(로사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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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끊어버립니까?

우리는 세례 때 “죄를 끊어버립니까?”라는 사제의 질문에 “예! 끊어버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세례를 받고 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보거나 아예 고해성사 보기가 싫어서 죄인으로 남아있기를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중독성 때문일 것이고 또 고해성사라는 탈출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술을 여러 번 끊어보려고 했습니다. 한 번 결심을 하면 1년 내외 정도는 끊었다가 또 어떤 계기로 해서 다시 시작하곤 합니다.

술을 끊게 되는 이유는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다닐 때는 절제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한 번은 동아리 모임 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필름이 끊겼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전 날 일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방에 실오라기 하나 걸쳐있지 않은 나체로 누워있는 겁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선배 형이 술을 먹고 눈을 떠 보았는데 사창가였고 그렇게 기억도 없이 순결을 잃었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가슴이 철렁 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방은 동아리 친구의 집이었고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관이었습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한 여자 동기의 옷에 오바이트를 해서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있고 저는 토한 오물 위에 주저앉는 바람에 옷을 다 벼려서 집까지 데려와 옷을 벗기고 재웠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다정스럽게 그 어머니가 해 놓고 간 해장국을 내어주었지만 저는 그 해장국을 보자 다시 구토가 나려고 해서 아침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걱정할 것 같아 옷을 빌려 입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서도 다시 울렁거려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려 하였습니다. 이를 꽉 깨물었더니 물만 떨어졌고 건더기는 다시 꿀꺽 삼켰습니다. 그 모양새를 본 사람들이 저의 곁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한 달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술을 마시고 실수 할 때마다 술을 끊겠다고 매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콜라만 마시고 있을 수 없어서, 또 사제가 되어서는 사목적인 핑계로 다시 시작하고 또 끊고 다시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8개월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이젠 한 10년 동안 마시지 않던 소주까지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술을 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엔 술을 마시되 후회할 일을 할 때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되어가니 술은 오히려 좋은 면도 많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끊었다가도 그 좋은 면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담배는 피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호기심으로 한 갑 정도를 피워보긴 했지만 그 이후로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술에 비해서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말을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또 아버지를 포함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 현재 담배를 끊기 위해 기를 쓰고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백해무익한 것을 시작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 들어갔을 때 큰 위기가 왔었습니다. 자대에 처음 배치되어 일병 주임이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담배를 한 대 권하였습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운다고 거절하였는데 그 선배는 기분이 나빴는지 한 달 내로 담배를 피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눈을 뜰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군대용어로 말하자면 저를 갈궜습니다. 그러나 저는 끝까지 담배피우기를 거부하였고 그 선임은 제대하는 날까지 저를 괴롭혔었습니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제대하고도 담배를 다시 피울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이유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일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술처럼, 한 번 시작하면 끊는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울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저에게 담배일까요, 술일까요? 담배도 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는 담배처럼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술처럼 끊었다고 마셨다가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죄를 완전히 끊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이 죄를 짓거든 눈을 파 버리고 팔이 죄를 짓거든 팔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굳은 결심으로 죄를 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남을 죄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만약 오늘 복음 말씀처럼 그대로 실행한다면 사지가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죄를 반복하게 되는 이유가 그 백해무익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한 번 하느니 천 번 죽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작은 거짓말이라도 그 결과가 얼마나 안 좋은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농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농약을 그냥 한 번 마셔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끊기 위해서는 그 죄의 백해무익함을 절실하게 깨닫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요?

바로 성령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열매가 시들어버립니다. 즉,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기쁨이 우울함으로, 평화가 초조함이나 두려움으로 바뀌고 자기 절제가 되지 않아 계속 그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한 마디로 행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묵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인은 단 한 순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의 결과들은 고해성사를 하면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죄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짓는 죄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만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가끔 연세 드신 자매님들이 이야기 하는 중에 예전에 남편이 바람피웠던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그것이 용서가 아직도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만약 한 번 외도를 하는 것이 평생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남에게 주고 또 그 상처로 인해서 평생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안다면 어떻게 바람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말로는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상처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들의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상처를 계속 지니고 계셨던 것처럼 부활한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며 영원히 우리의 죄를 되새기며 가슴을 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런 상처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께 더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기는 하겠지만 또한 그렇게 고통을 드리는 줄 알면서도 죄를 반복했다는 죄책감은 마치 베드로가 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려 얼굴에 눈물 골이 파였다고 하듯이 우리를 영원히 슬프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바람을 피우고 용서를 받아서 함께 사는 것보다 처음에 했던 서약을 깨지 않고 온전히 지켜 끝까지 완전한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내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마치 거저 얻는 무엇인양 가볍게 여기고 죄를 반복한다면 무한하신 그리스도도 용서를 청하는 우리에게 당신의 수난공로를 나누어주시기는 하시겠지만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그 분이 마음아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죄에 떨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에 대한 인식을 다시 가지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눈을 뽑고 손발을 자를 정도의 결심을 하고 고해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또 범할 죄를 고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자비를 비웃는 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를 남용하지 맙시다. 올바른 성찰이란 정말 앞으로는 그런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까지 봉헌하고 나서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 전삼용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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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의 관용과 우리의 행동은?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로마인 이야기』15권을 완결 지으면서 어느 인터뷰에서, “천년 로마 제국의 유지비결은 로마인들이 다 해 먹으려 하지 않은 것, 다른 나라가 더 뛰어나면 그들에게 충분히 맡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로마인들의 관용이 천년의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산을 떠나 요르단강 동쪽 지역인 광야로 향하는 여정 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음식에 대해 불평합니다. 이에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민수 11,11.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서 그의 영을 조금 덜어내어 원로 일흔 명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세와 함께 백성을 짊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때 명단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뵙기 위해 천막으로 나가지 않고 진영 안에 남아있던 ‘엘닷과 메닷’ 두 사람에게도 영이 내렸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가 그들이 예언을 못하도록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청했고, 이에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오늘 복음 말씀은 앞서 다룬 민수기와 주제가 같습니다. 닫힘이 아니라 열림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그는 ‘우리 그룹’에 속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더 이상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도록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분명합니다.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권위를 예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자신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수치심과 질투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오직 자신들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일종의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관용을 보여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그들 안에서만 일을 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은 다른 형제자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서만 일하셔야 하고, 오직 자신만이 주님의 도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결정에 시비를 가리려고 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저녁때가 되자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포도밭에 나간 사람, 아홉 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후 다섯 시에 나간 사람에게 똑같이 일당을 줍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과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에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품습니다. 이에 포도밭의 주인은 질투하는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15)

우리는 주님의 선물이나 소유, 그리고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나누어 주시는지 간섭과 시비를 가릴 권리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아주 충실히 주님을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다른 이보다 더 많이 요구해도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물과 은총의 작용을 공손하고 삼가는 태도로 대해야합니다(R. 하르딕, 『기쁨에 찬 가난』 참조).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는 주님이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에 대해서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9월 30일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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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온유해지려면

태초에 창조주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당나귀는 자꾸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귀를 잡아당기시며 (당나)귀를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벌이 자꾸 침을 쏘아서 많은 동물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번엔 벌이 침을 한 번만 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 가장 불쌍한 것은 양이었습니다. 독사가 물면 물리고 맹수가 덮치면 잡아먹혔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양을 불러 은근히 물었습니다.
“너의 이를 옥니로 하고 네 발톱을 갈퀴발톱으로 바꿔 줄까?”
“아, 아닙니다. 저는 육식하는 맹수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저는 지금의 풀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럼 너의 입 속에 독을 감춰둘까?”
“아이고, 그건 더 싫습니다. 뱀들처럼 미움을 받고 살기는 싫어요.”
“그렇다면 너의 이마에 뿔을 달아주면 어떨까?”
“그것도 안 되겠어요. 염소는 걸핏하면 뿔로 받으려 하거든요.”
양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를 본 창조주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큰 축복을 양에게 내렸습니다.
“오, 착하고 어진 양아! 너는 힘이 없어도 땅에서 대우를 받고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이름은 어진이들의 상징이 될 것이며 어느 힘센 짐승보다도 자자손손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너의 주위엔 어떤 맹수도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줄 목자를 세워줄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따뜻함입니다.
양이 만약 사람의 성격을 상징한다면 바로 이 따듯함, 다른 말로는 ‘온유함’을 지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박사가 한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지는 않지만 천으로 감아서 만든 어미 인형을 젖이 나오는 철사 인형보다 더 좋아한 예는 매우 유명합니다.

동물도 그렇지만 인간도 무엇을 해주느냐보다는 따뜻함이 관계의 우선입니다. 누구나 차가워 냉소적이거나 너무 뜨거워 자주 화를 내는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그 온유함은 매우 획득하기 어려운 덕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온유해질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부드러운 척 하려다가도 어느새 화가 솟구치거나 쏘아붙이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그러면 어떻게 그 온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처음 부분 예수님은 매우 온유한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아보려 했다는 제자들에게 다음부터는 막지 말라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하여 물 한 잔만 주어도 반드시 그 상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매우 자비롭고 따듯한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후반부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데 무척 매몰차십니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시고, 손과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정리하자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겐 그 삶에 있어서 철저함을 강조하시는 것이고, 아직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겐 매우 온유하신 태도를 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전적으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하였습니다.
‘외강내강’, 혹은 ‘외유내유’란 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다시 말하면 내적으로도 강하고 외적으로도 강하거나, 내적으로 유하고 외적으로도 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온유하면 이웃에겐 매몰차게 돼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 온유하게 대처하면 그 탓을 누구에게든 돌려야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매몰차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온유하려면 그래서 자신에게는 매몰차야 합니다. 어느 하나가 강해지면 어느 하나는 약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에겐 매몰차야하고 외적으로 매몰찬 사람이라면 내적으로는 물러터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당신 자신이 온유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겐 매몰차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 오히려 온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내적으로 그만큼 많은 단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잔인하게 만드는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를 매몰차게 죽이지 않으면 외적으로 온유해지기는 불가능해집니다.

화와 짜증과 불만이 많아지고 언어가 거칠어진다면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해 너무 무르게 대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온유함은 자신과의 싸움의 대가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온유함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방법은 그 성령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 철저한 기도시간을 지키는 일입니다.

구약의 야곱이 에사우 앞에서 온유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밤새 주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씨름 마지막에 천사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분지릅니다. 그래서 덕분에 절뚝이게 되었는데 이로써 얻은 것이 온유함입니다.

천사는 하느님을 의미하고 하느님과 씨름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거기서 오는 성령의 힘으로 나의 자아의 정강이가 부러지면 자아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렇게 야곱은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고, 에사우는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야곱을 용서하고 안아줄 수 있었습니다.그리고는 에사우가 주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 지구를 매몰차게 대하여 후손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들에게 매몰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에게 포악하지 못하면 바깥으로 포악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지내다 화 한 번 잘못 내면 평생 어색한 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화해하라는 식의 권고를 받아들이면 자신을 망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지 십자가를 거부하는 마음과 화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은 화해의 장소가 아니라 싸움의 장소였습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말고 포악해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포악해지지 않으면 누군가와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포악하라는 것이 자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죄를 짓지 않도록 손을 자르고 눈을 뽑으려는 강한 의지로 싸우라는 뜻입니다. 자신과의 싸움 없이 이웃에게 온유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는 전리품과 같음을 잊지 맙시다.그리고 그 온유함이 있어야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그 사람들이 내가 살 땅이 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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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신앙은 모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아야 하며 본질적으로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제1독서: 민수 11,25-29: 이 백성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1독서에서는 이 사상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도와 백성들을 지도할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영을 내려주셨는데(25절), 여기에 뽑히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도 그들과 같은 영을 받아 입신을 하게 된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우리의 영도자여,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십니다.』 그 때에 모세는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8-29절).

모세의 이 대답은 참으로 놀랍다.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또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이 진실로 예언의 영을 받아 신앙상의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말과 생활로써 주님의 놀라운 신비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복음에서는 전반부에 예언의 행위가 아니라, 구마행위를 다루고 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께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38절)라고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의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마태 12,30)라고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의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자 맷돌은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R. Fabris, in I Vangelli, Assisi 1978, p. 778).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43-48절 참조).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신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제2독서: 야고 5,1-6: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공동체 내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만일에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압박하고 그들의 경작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품삯을 계속 착취한다면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다(1-3절).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있는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8년 9월 30일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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