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19.6%
[인천] 함께 나누는 하느님 나라
조회수 | 1,685
작성일 | 09.09.25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는 그가 자기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러했을까?

사실,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제자이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 하였을 때 동행하였으며(루카 9, 28),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실 때도 동행하였으며(마르 5, 37),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신 후에 재난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으며(마태 24, 3-14),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번민에 싸여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마르 14, 33)에도 같이 있을 만큼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총애를 받는 제자였습니다.

반면, 요한의 성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는데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합니까?’(루카 9, 54)하고 물을 정도로 쉽게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요한은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께 부탁하기를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37)라고 부탁할 정도로 욕심도 당차 보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훗날 하느님 나라가 들어서면 한 자리를 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있었는데 자기들과 함께 다니지도 않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의 스승님의 이름을 팔면서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가 들어서면 한 자리를 차지할 꿈을 꾸고 있는데 잘못하다가는 그 한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병자들을 고쳐주지도 못하였고, 마귀도 쫓아내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쫓아다니지도 않았던 이상한 사람이 오히려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일입니다. 만약 그러한 일을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자신들을 신뢰하기 보다는 그들을 신뢰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훗날 하느님 나라가 들어섰을 때 한 자리 해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에게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막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스승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성격도 불같으며, 욕심도 많은 요한은 스승님의 권한을 독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독식하지 맙시다.’  하느님 나라는 혼자 가질 수 없음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임을….
‘나눕시다.’ 재물이 썩고, 옷이 좀먹고, 금과 은이 녹슬기 전에….
‘착취하지 맙시다.’ 주님의 일꾼들의 아우성이 하느님 귀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면 하느님 나라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조호동 바오로 신부
451 19.6%
[인천] 모두가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때때로 내 것과 좋은 것을 혼동하고, 남의 것과 나쁜 것을 여간해서는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은 향상 옳다고 하고, 나와 다른 모든 것은 일단 틀렸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많은 지식이나 많은 재산, 높은 명성을 갖고 있다 해서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남들은 자신과 같을 수 없고 자신보다 조금 못한 사람은 아예 자신과 친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자신의 생각이 마치 모든 것의 척도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하고, 혹 누군가 자신에게 틀렸다고 말하려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아예 무시하려는 교만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 입이 하나이고 귀가 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배로 하 라 는 뜻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지식은 말하고 지혜는 듣는다. 그리고 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도 완전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보다 겸손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이웃들을 가까이 하고 도와주며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며, 이미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라고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모세와 야고보 사도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이다.

“차라리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민수 11,29)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5 , 1)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물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9,41)

▦ 인천교구 강영식 바오로 신부 : 2018년 9월 30일
  | 09.29
451 19.6%
어느 원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상적인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예전부터 예의를 항상 강조했지. 특히 식사 때에 음식을 쩝쩝거리면서 먹는 사람, 음식을 흘리면서 먹는 사람이 얼마나 싫었는지 몰랐어. 그런데 나이를 먹다보니 나도 모르게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자주 흘리는 거야. 그제야 예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네. 예의는 먹는 소리를 내지 않거나 음식을 흘리지 않고 먹는 것이 아니었어.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것이 진짜 예의더군. 그 동안의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르네.”

예절이나 예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지요. 그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것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식탁에서 팔꿈치를 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공간을 내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나 예법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예의를 모르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겠다면서 무시하고 배척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의는 나의 편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방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도 포옹하면서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가장 예의바른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될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요한이 묻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

이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마르 9,39)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해서 잘못된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체면에 손상을 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말렸고 이 점을 예수님께 칭찬받으려 했는데, 오히려 “막지 마라.”고 하시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먼저 보았고, 요한은 스승과 자신들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병자들이 고통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지 않아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것이지요.

제1독서의 모세도 예언을 하는 사람을 말리려는 여호수아를 향해서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민수 11,29)라고 말하지요. 모두가 주님의 영을 받아서 주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기 안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려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은 자기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남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랑을 받기 힘든,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의 체면에 상관없이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를 설득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것, 나의 편함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힘들어하는 사람의 고통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한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듯이 마지막 때까지 재물을 쌓기만 합니다(야고 5,3 참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랑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짓게 하는 것들을 모두 과감하게 끊고 대신 생명의 길로 가게 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떤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9월 30일
  | 09.30
451 19.6%
며칠 전 병원에 입원 중인 인천교구 신부님을 방문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셨거든요.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큰 수술도 두 차례나 하셨는데, 저는 며칠 전의 방문이 첫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제 개인의 바쁨을 이유로 찾아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큰 수술로 인해서 핼쑥하면서도 어눌해진 말투를 들으며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힘들어할 때 같은 사제로써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간직하게 되었지요.

제가 매일 묵상하는 내용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매일의 강론 주요 주제도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제 자신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말로만 기도했던 저였고, 사랑하라는 말만 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편안함은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했던 저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찾아주고 만져주는 것인데 그래야 고통을 함께 나눌 수가 있을 텐데, 저는 입으로만 하는 가장 편한 사랑을 쫓았던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다가왔을 때에 가장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말 없이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뜻이 안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나의 이웃에게 보여주기보다는 편하게 입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 요한이 묻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라고 하시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해서 잘못된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체면에 손상을 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말렸고 이 점을 예수님께 칭찬받으려 했는데, 오히려 “막지 마라.”고 하시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을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먼저 보았고, 요한은 스승과 자신들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한 방법이 아니더라도 병자들이 고통 속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지 않아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의 체면에 상관없이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를 설득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것, 나의 편함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힘들어하는 사람의 고통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 입으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사랑에 반대되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죄와 얼마나 자주 타협하고 있었는지요?

진정한 사랑을 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많은 성인 성녀들이 보여주신 사랑을 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9월 27일
  | 09.3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25   [청주] 감사의 생활  [1] 2537
724   [대전] 권력보다 사랑을 택한 그리스도  [1] 958
723   [수원] 그리스도의 왕권은 어디로부터?  [2] 2072
722   [수도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4] 1917
721   [의정부] 주님! 왕입니다요!  [1] 1986
720   [안동] 그리스도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1] 1985
719   [춘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  [2] 1993
718   [전주]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1] 143
717   [원주] 우리 삶의 왕이신 주님과의 만남  88
716   [서울] 예수님,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2] 2567
715   [마산] 우리도 그리스도의 왕직을 계승해야 한다.  [3] 1946
714   [대구]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1] 1864
713   [군종] 왕입니다요.  76
712   [광주] 이 세상 왕이 아니다  [1] 2018
711   [인천] 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2] 2014
710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독서와 복음  [4] 813
709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4] 2545
708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2] 1040
707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5] 2242
706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5] 2669
705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2] 2615
704   [대구] 빛과 소금의 삶  [2] 2053
703   [청주] 낼까 말까? 얼마 넣을까?  122
702   [광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109
701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8] 2704
700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4] 2366
699   [전주] 종말론적 교회  [1] 2500
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145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884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139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127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173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891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80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56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8
689   [부산] 참된 봉헌  [5] 2461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9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700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84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