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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서 나를 따라라.]
조회수 | 1,584
작성일 | 09.10.10
하인리히 호프만의 <그리스도와 부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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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지혜서 7,7-11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리서 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팔고 나서 나를 따라라.
마르코 10,17-30<또는 10,17-27>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묵상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재물입니다. 그런 재물을 많이 소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지만, 그는 머뭇거리다 포기합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아까워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애초부터 제자가 될 생각을 안 했을 것입니다. 청년을 머뭇거리게 한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그런 재물’을 없앤 뒤에 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의 든든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재물의 힘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재물의 힘에 굴복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들은 재산이 넘쳐나도 부족함을 떨치지 못합니다. 물질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만족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돈이 최고다.”, “재물이 최고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스승님의 힘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2009년 10월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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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인간이 한 평의 땅뙈기에 울타리를 치고서 “이것은 내 것이야!”라고 외치게 된 날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여긴 땅에 자신의 마음까지 울타리로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난 뒤 타인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땅에 울타리를 치면서 타인에 대한 시선도 변하게 됩니다. ‘혹시 누가 내 울타리를 넘어오지는 않을까?’ 그의 눈에는 이웃이 잠재적인 위험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 순수하고 사심 없던 주변의 관계가 변하게 됩니다. 부의 축적은 또 다른 가난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그 가난이란, 벽을 쌓음으로써 이웃과 단절되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겪는 고독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많은 이들이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 잘 모르는 채 지냅니다. 문을 꼭꼭 잠그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바라보지 않고 삶을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더 불행해집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보답을 바라지 않은 채 남을 돕고 가진 것을 나눌 때에 참된 기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남을 돕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도 기쁘지만 도와주는 사람도 뿌듯한 마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결국 나누며 사는 것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손을 펴고 가진 것을 나눌 때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매일미사 2012년 10월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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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로 하느님께 축성된 모든 신자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부르심을 받았다는 현대의 교회 문헌들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성직자, 특히 수도자의 봉헌 생활의 고유한 특징은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이에 관한 이론이나 학설을 논하기보다는 수도자로 살아가는 제가 그저 이해하는 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삶 안에는 이런저런 많은 요소가 함께 있는데, 그 안에 하느님께 속해 있는 봉헌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몸과 마음과 가진 것 전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 소유가 되어야 하는 삶, 곧 ‘하느님께 축성됨’이 저의 삶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어야 수도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지혜에 비하면 재산도 건강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이, 무엇보다 앞서 지혜를 추구하였듯이,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다른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몸집이 커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낙타처럼 이것저것을 동시에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마음 안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다스리시도록 그분의 섭리에 내어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고백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화답송 시편처럼 우리의 날수를 헤아리면서 저마다 고유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께 어떤 자리를 내어드리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 매일미사 2015년 10월 11일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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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주님께 칭찬받는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고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힘은 그가 받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보다 더 귀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재물에 집착한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판단은 인간의 욕심과 속임수를 드러내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보여 줍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을 기만할 힘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유한한 재물과 명예를 움켜쥔 인간의 시야는 너무나 좁고 어두워서 큰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나 지고한 빛에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남을 돕고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함은 하느님 대전에서 비천하고 비참함으로 바뀝니다. 영혼의 눈멂을 일깨우는 천상의 빛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얻은 영혼은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그분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왕홀과 재물은 허공에 사라져 없어지는 연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10월 14일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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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가난한 마음이 생명의 길이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이 땅에서 삶의 기쁨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연중 제28주일의 말씀을 통해 지상의 것과 천상의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소중한 지혜를 주십니다. 또한 나눔과 비움이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밝히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지혜 7,7-11)에 솔로몬이 한밤중에 주님께 기도하니 지혜의 은총이 내립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 열왕 3,5)고 물으셨을 때, 그는 자신의 건강과 재물이 아닌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의 분별’을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부와 명예는 덤으로 주십니다. 지혜의 빛을 입은 솔로몬은 지혜에 비기면 권좌, 재산, 보석, 건강, 미모 등은 하찮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알고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청하면 베풀어주십니다. 덧없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원하신 주님의 자애와 지혜를 입으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까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시편 90, 화답송)

제2독서(히브 4,12-13)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땅을 지배함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 내면의 생각과 속셈까지도 가려내시기에 모든 피조물은 그분 눈앞에 벌거숭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소중한 지혜가 담겨져 있기에 이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주님께 보답해 드리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와 부자 이야기’는 공관복음(마르 10,17-27, 마태 19,16-26, 루카 18,18-27)에 모두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선하신 스승님’이라 경의를 표한 그가 악의를 품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공개적으로 남을 칭찬하는 인사말은 상대방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고 자신은 일어서려는 저의가 숨어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잘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하시며 겸손하게 대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로 가려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횡령을 해서는 안 되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셨습니다.(마르 10,21) 마르코 복음사가만이 이 표현을 쓰고 있는데, 유다사회에서 사랑은 말보다 실천을 중시합니다. 부자는 어려서부터 도덕적인 생활을 해왔기에 예수님의 관심을 얻어 제자가 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시며,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며 권고하십니다. ‘가진 것을 판다’는 것은 오늘날 서구사회처럼 주식을 팔고 은행구좌를 비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 곧 가족, 주택, 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사도들처럼 혈연의 유대도 끊어야 하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에서 가족과 혈연관계는 삶 자체에서 뗄 수 없는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는 사회적 자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우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영예로운 일이며, 당장 보상을 받아야 만족하기에 주님을 따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이 부자는 “자신을 위해 많은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들짝 놀란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수군댑니다. 탐욕적인 부를 누리는 사람은 낙타처럼 몸집이 크기에 바늘구멍 같은 ‘좁은 문’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 비움의 은총을 입으면 가능합니다.

유다인은 자녀들에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지혜가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해서도 큰 가르침을 줍니다. 부자에게 문제는 부의 소유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알고 보면 주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으로 주신 재화에 인간은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삶의 목적은 재물을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알고 사랑과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뒤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더욱 가난해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 가난한 모습을 본받아 복음적 가난의 삶을 산 모범적인 분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부는 샘에서 솟는 물과 같아 자주 길을수록 더욱 깨끗해지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썩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마음의 가난을 깨달은 사람은 주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습니다. 누구나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다가 먼지로 돌아갑니다. 삶은 내적 태도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 김창선 (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 가톨릭신문 2018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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