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34.8%
[안동]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조회수 | 2,234
작성일 | 09.10.24
황금 들녘이 아름답습니다. 농부들의 막바지 손길이 바쁩니다. 수확의 기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르티매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에겐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부터 앞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과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눈을 뜨게 되어 보다 인간답게 살고픈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느 날 길가에 앉아 있는데,‘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많은 이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사람들을 통해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믿기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예수님은 연민의 마음으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그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몰랐던 것 같으나, 예수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듯이 자신에게도 다시 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보게 되었습니다. 광명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힘은 참 놀랍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불평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밤을 세워서라도 주저앉아 마냥 한탄하고 불평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만 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대로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도 어려움이 닥칠 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나의 불행을 주님께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도하며 조용히 주님께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안동교구 이희정(요셉) 신부
451 34.8%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상담 연수 때 ‘장님 인도하기’란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님이 되어 안대를 착용하자 ‘두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나의 인도자가 나를 잘 인도해줄까 하는 ‘의심’이 몰려왔습니다. 인도자를 따라가면서도 언제 어떤 곳으로 인도하여 나를 곤란에 처하게 할지 몰라 더욱 불안하여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습니다. 인도자에 대한 믿음보다 내 처지에 대한 더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몰려오자 당장이라도 안대를 벗어던지고 싶었던 두려운 경험을 그렇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라는 눈 먼 거지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눈 먼 거지는 태생소경이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로 후천적 소경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나환자나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등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죄를 지은 사람으로 생각하여 멸시하고 당했고 가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상황을 볼 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볼 수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절망 속에서 불안과 불신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을 한탄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모든 것이 두렵고, 의심스럽고 그래서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받으며,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잠자리도 일정하지 않은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소경이 된 것에 대해 한탄을 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왔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 유명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던 차에 자신이 있는 거리를 그분께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그분만이 나를 눈 뜨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7)하고 간절히 청합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자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0, 48)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10, 49)고 하십니다. 이에 거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 재산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10, 50)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겸손히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 51)하고 청합니다.

눈 먼 거지 바르티메오가 예수님을 만나 다시 눈을 뜨게 되기까지 그의 행동에서 우리는 몇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말리고 꾸짖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 있게 다른 사람들이 쓰기를 꺼려하는 ‘메시아’를 암시하는 ‘다윗의 자손’이란 말과 하느님께만 드렸던 기도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로 존경의 예를 잃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간절히 청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셋째, 낮에는 옷이요, 밤에는 이불이 되는 자신의 전 재산인 겉옷을 과감히 버리고 한 걸음에 달려가는 적극적이며 용기 있는 투신의 모습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물음에 거침없이 자신이 갈망해 왔던 것을 겸손하게 청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바르티메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제1독서의 ‘눈먼 이와 다리 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예레 31, 8-9)는 약속의 실현이라 봅니다. 이에 대한 감사와 화답의 표시로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 52)고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르티메오를 보면서 우리 자신의 생활을 잠시 묵상해 봅니다.

우리는 육신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은 상처나 결점 때문에 하느님이나 부모를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학하거나 자해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처지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여 가족, 형제자매, 친구, 동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야말로 눈 뜬 소경인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느 누구 앞에서든지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믿고 있음을 드러내야 함에도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 때문에 혹은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 때문에 믿음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비굴한 모습을 취한다면 이 또한 눈 뜬 소경의 모습입니다.

바르티메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국가나 기관, 기업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의 몫이라며 외면하거나, ‘나도 지금 쓸 데가 많고 어려운데’ 하며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 못하는 모습은 눈 뜬 소경의 모습입니다.

바르티메오처럼 겸손한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함에도 ‘내가 너보다 낫다’,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행동은 바로 권위나 명예에 사로잡힌 눈 뜬 소경의 모습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눈 뜬 소경의 모습이 내 자신에게서 보이고 있다면 오늘 이 미사 중에 예수님께 청합시다. 예수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하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 뜬 소경의 육적이고 물질적인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새롭게 예수님의 눈,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소외되고, 버림받고, 고통 받으며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형제자매가 되어 주고,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눔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마르 10, 52 참조)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 “제가 신앙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안동교구 남정홍 스테파노 신부
  | 10.26
451 34.8%
[안동] 이상적인 제자 바르티매오

이제 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다 끝나가는 때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예리코라 불리는 도시에서 한 눈먼 거지를 치유하십니다.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이것은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그가 티매오라는 사람의 아들임을 가리킵니다. 시몬 바르요나에서 시몬은 이름이고 바르요나는 그가 요나라는 사람의 아들임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소경들 가운데 이 사람만이 호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예리코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진입할 때 첫 번째로 정복한 성입니다. 이 성은 놀랍게도 군사들의 칼과 활이 아니라 사제들의 뿔 나팔 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으로 정복되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소경 바르티매오 또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리려 해 보았지만 그의 열정적인 외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리코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뿔 나팔과 함성을 질러댔듯이 바르티매오도 예수를 둘러싼 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예수께서 그를 보아줄 때까지 고함을 질러댑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나자렛 출신의 예수라 하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그는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예수를 알아봅니다. 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예수에 관하여 들은 말씀만으로 예수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참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고귀한 혈통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혹은 유다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치유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능력이 후손들에게 유전되었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불렀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오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봐야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께서 불렀을 때에 바르티매오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 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에 기초하여 바르티매오의 행위가 죄를 벗어버림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겉옷을 치워버리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그의 앞에 깔려 구걸통의 역할을 했던 옷을 걷어차고 예수께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부름 받은 제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렸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렸습니다. 얼마 전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예수의 제자 됨을 포기하고 슬퍼하며 떠난 젊은 부자 청년과 달리 그는 전 재산을 포기하고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를 부르는 호칭도 ‘스승님’으로 변합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눈의 치유를 원했을까요? 눈이 보이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막상 그가 눈을 떴을 때 선택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예리코는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의 관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의 시작점입니다. 결국 바르티매오가 선택한 것은 비록 그가 예상치 못했다 하더라도 제자로서 수난의 길을 예수와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치유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르티매오를 불렀고, 그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것도 이제 환호하는 군중들에 둘러싸인 스승과 함께하는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 끝나고 하룻밤 새 예수와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정해야 하는 잔인한 십자가의 때가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말입니다. 그는 예상치 못한 그 모진 시간들을 제자로서 끝까지 잘 겪어낸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의 이름을 복음서에 보존해 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놀라운 치유 기적보다 바르티매오의 제자 됨됨이가 더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 안동교구 함원식 이사야 신부
  | 10.24
451 34.8%
[안동]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님께 대한 부르짖음

찬미예수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 한계의 순간이 닥칠 때면 우리는 저절로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느님 제발 이번 한번만”하면서 간절함으로 하느님을 찾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은 타고난 종교적 심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도와주고 구해줄 절대적인 존재인 신, 하느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물에 막혀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들을 많은 사람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없다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간의 실망스럽고 부족한 모습에서 더욱더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많은 장애물에 부딪쳐서 하느님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고 신앙에서 등을 돌리곤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장애물들이 갈수록 더욱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 안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 주님을 온전히 보게 되고, 따르게 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입니다. 그는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숱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을 구해주실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사회적으로도 한계를 지니고 있고, 거기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장애물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 결과 그는 눈을 뜨고 제대로 보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의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끝까지 잡고 놓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존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 부족함이 많고, 뭔가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신앙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면 주님의 부름과 자비,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성인성녀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신앙인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많은 것들이 가로막는다고 해서 그저 포기해버린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온갖 장애물들로 인해 신앙이 메말라가는 이 세상 안에서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청하고 찾으며 주님께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부르실 것이고, 신앙 공동체를 통해 용기를 북돋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볼 수 있고,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은 은총을 풍성히 내려주실 것입니다. 다함께 용기를 내어 구원으로 부르시는 주님께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합시다.

▦ 안동교 손대혁 루치오 신부 : 2018년 10월 28일
  | 10.2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1]
!   [전주] 종말론적 교회 
!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2]
!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3]
!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7]
!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3]
!   [대구] 빛과 소금의 삶  [1]
!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2]
!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4]
!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2]
707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6
706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3] 1764
705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67
704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47
703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1
702   [부산] 참된 봉헌  [5] 2453
701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5
700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691
699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76
698   [서울] 두 부류의 인간상  [6] 3063
697   [대구] 참된 봉헌  [2] 877
696   [마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3] 3132
695   [인천] (千)주님! (五)주님!! 주님(萬)을!!!  [5] 2710
694   [대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자.  [2] 1095
693   [청주] 계산법을 달리하라  68
692   [전주]천원짜리 봉헌금  [2] 3021
691   [광주] 외상 신자와 맞돈  55
690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과부 헌금] - 평신도주일  [3] 1992
689   [수도회]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3] 1633
688   [대전] 쉐마 이스라엘…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1] 1544
687   [수원] 첫째 가는 계명  [3] 1654
686   [의정부] 사람, 사랑, 삶 - 사랑 나무  [2] 1672
685   [서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3] 2511
684   [춘천] 가장 큰 계명  [3] 1813
683   [전주]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픈 사랑  [2] 1607
682   [광주] 삶에 대한 축하, 사랑의 방식  110
681   [원주] 첫째가는 계명  [1] 1586
680   [대구] 하느님의 계명  [2] 1547
679   [인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1] 117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