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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조회수 | 1,933
작성일 | 09.11.13
그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다니엘 예언서 12,1-3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11-14.18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코 13,24-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묵상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진정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요? 말씀의 의도는, 미구에 닥칠 엄청난 변화를 이야기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해당될 만큼’ 요지부동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바뀐다는 암시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닐는지요?

실제로 달도 변하고 태양도 바뀝니다. 자신이 변화되면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다르게 보입니다. 마음이 밝은 날에는 ‘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만, 마음이 어두운 날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종말 역시 이러한 삶의 변화입니다.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인생의 작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중간’에서 종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감정적인 ‘무엇으로’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종말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일입니다. 누가 인간의 삶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을는지요?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종말의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현실의 삶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며 거듭 태어날 것을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시작이 종말을 위한 가장 확실한 준비입니다.  

2009년 11월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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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다니 12,1-3) 해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통하고 우울했던 시대, 온갖 희망이 스러지고 온갖 악행과 불경이 넘치던 시대, 그런데도 하느님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비스런 침묵에 잠겨 계시는 것만 같던 시대에 예언자들이 나서서 그 같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해서든 설명해보려 시도한다. 자기네 확신을 상징과 현시로 가득 찬 생생한 묵시문학적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자 구실을 하는 하늘의 세력들과 천사들에게 큰 비중을 둔다. 오늘 독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대천사 미카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미가엘 대천사가 보호하고 있는 동안에도 무서운 시련과 사건이 밀어닥치지만, 동시에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이 마련된다(1절).

다니엘은 착하게 산 사람과 악하게 산 사람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때가 오리라고, 그때 영광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단죄를 받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 박해와 고문과 치욕을 받고 죽어간 사람들이 부활하여 완전한 구원을 받으리라고 단언한다(2절).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사람들’ 곧 시련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어 깨끗하여진 사람들이 차지할 특권과 지위를 강조한다. 그 사람들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3절).

모든 사람은 죽기 마련이지만, 죽음으로 인생이 아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엔가 모두 다시 살아나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승리와 영광과 기쁨을 누리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패배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시편 15 해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시편작가가 이 시편으로 기도를 드리게 된 상황과 엘리야 및 엘리사가 처해 있던 상황이 비슷한 것 같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당시에 유행하던 온갖 우상숭배를 결사반대하고 거절하면서 충실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신뢰를 바위처럼 지켜나갔다. 그들은 자기네 생애를 몰아가는 온갖 박해와 시련을 꿋꿋이 이겨나갔다.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고 주님을 모시는 흐뭇할 기꺼움과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즐거움만을 항상 염두에 두는 사람은 온갖 박해와 시련 중에서도 마음속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그윽한 평온과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제2독서(히브 10,11-14.18)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관한 설명을 끝맺음한다. 저자는 이제까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한없이 높은 분이고, 충실하고 자비로운 최고 대사제의 특징을 가진 분이고, 멜키체덱의 서열을 따른 최고 대사제이므로 레위 지파 대사제들보다 위에 계시는 분이고, 더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는 분이심을 설명해 왔다.

또 저자는 구약의 제사들은 완전한 구원의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율법’도 앞으로 올 선익의 조짐과 그림자에 지나지 못하고, 그래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해주지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는 계속하여 거듭 되풀이 바쳐야 했고, 임시적인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10,1-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승리를 거두고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으셨으며(12절), 당신께서 거룩하게 만든 사람들을 영원히 거룩하게 하셨다(14절).

그렇게 하여 예레미야가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면서 미리 내다본 ‘죄의 용서’가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으로써 실현되었다(15-17절).

그러므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당신 제사의 결실을 넘쳐흐르게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바치신 제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치는 제사도 인류구원을 위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복음(마르 13,24-32) 해설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마르코는 이 대목을 종말론적 말씀 마지막에 배치한다. 첫 구절들(24-27절)은 묵시문학적 상징과 언어로써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럽게 다시 와서 아버지의 계획을 완성하고, 선택받은 사람들을 모아 당신과 결정적인 친교를 맺게 하실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만방에서 다시 모여오리라는 구약의 희망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속한 사람들을 악마의 세력에 붙잡혀 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속한 사람들 곁에 항상 함께 계시어 그 어떠한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당신이 이룩해 놓으신 구원에 도달하도록 도우신다.

그 구절들은 또한 ‘사람의 아들’의 ‘다시 오심’이 지닌 뒤집어엎는 혁명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다시 오심’은 공간적 시간으로 따질 대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나머지 구절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이미 시작된 전면적 구원의 증표들을 가려내고 주의를 기울여 깨어 있으라고 권고한다.

결론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당신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신 그리스도의 마음과 자세를 본받고 굳게 지키라고 초대받는다. 악마의 세력과 폭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과 영광에 도달하고 말리라는 확신을 가지도록 초대받는다.

우리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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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구원

파스카 신비가 가져다 준 ‘새로움’을 앞에 두고서,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문제로 다가온다. 파스카 신비는 우리 존재와 삶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고 있으며, 우리를 무상함과 공허함에서 건져내며, 더 생기 있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파스카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마의 세력을 온 힘을 기울여 물리치고 깨부술 수 있는 힘을 준다. 인류를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죄악을 끝끝내 고집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요한 3,17; 12,47).

아무리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당신 원수인 악마를 편드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 당신 성령의 가르침과 충동을 끝까지 외면하고 저버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세력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적으로 대했듯이,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대항하여 온갖 음모와 흉계를 꾸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떠한 시련과 환난을 당할지라도 부활하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승의 말씀과 표양을 따르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깁니다.”(1요한 5,3).

신앙공동체의 사명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태어나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자기의 혼으로 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신앙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모든 사람들’에게 지칠 줄 모르는 충실한 사랑을 바치고 몸을 바치는 데 있다.

사랑은 본래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고 자기 마음과 애정을 바치는 것이지, 돈을 많이 벌고 세력을 움켜쥐고 위신과 인품을 세운 다음 여력으로 뽐내면서 동냥하듯 조금 도와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재물과 능력이란 원래 하느님의 소유로서 서로를 위해 공평하게 나누어 쓰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정의가 요구하는 바이요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요 의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벌거벗은(가난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아닐 온갖 것을 마음 없이 아무리 많이 내 놓아보았자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신앙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하셨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적에, 먼저 가난해져야(벌거벗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벌거벗은 자기 자신의 노동과 땀과 피와 목숨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 외에 무엇을 주실 수 있었던가. 그분에게는 재물도 없었고 지상세력도 없었다.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은 당신 마음과 당신 생명뿐이었다.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진정 사람들을 위해주고 도움을 주는 공동체가 되려면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가난해지고 억눌린 자들과 더불어 억눌리면서 그들을 위해 자기 생명(살과 피를)을 바칠 도리밖에 없고, 그 외에 다른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신앙공동체는 세상을 심판하는 동시에 세상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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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맞이해야 할 종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끝날 날이 올 것임을 압니다. 생명은 살려는 욕구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생명이 끝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해 합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죽음의 세계를 해명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 너머의 세상을 분명하게 알려 준 적은 없습니다. 이따금 임사 체험을 해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죽음 이전에 일어난 주관적 체험의 현상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 안에서 인간 존재의 마침, 곧 죽음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밝혀졌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단순한 한 인간이 얻은 특은이 아니라 온 인류의 창조주이며 섭리자이신 하느님의 뜻이 인류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번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인류의 마지막 악인 죄와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믿음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세상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표징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는 거짓 예언자들도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참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참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고, 스스로 가난한 교회여야 합니다. 가난은 예수님의 삶이었고, 교회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 너머 하느님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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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연중’은 ‘매일의, 평상의, 일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연중시기를 마무리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순히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일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은총으로 시작된 구원의 여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이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나에게 나의 믿음이 최종목적에 닿아 있는지, 희망에 찬 삶인지,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빛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종말의 현상과 그 시간에 관한 말씀보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현재의 삶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덕(믿음, 희망,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타자와 세상이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어떤 공동의 집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부부가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지,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부모에게 어떤 자녀가 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인간의 기본질서를 ‘참 사랑’에 두는 것이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돌을 던진 물이 파장을 일으키고 점점 넓게 퍼지듯 말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이름, 인격으로 모두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존중으로 나타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의 존재에 대한 존중은 그를 존재 그대로 인격으로서의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품위를 드러내는 ‘몸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감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입니다.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도, 처음부터 주어졌던 선택의 자유가 끝까지 보장되기 위해서도 그 시간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그날의 현상을 봅시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24-25절) 구약에서부터 종말의 때를 묘사하는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내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께 속해 있음이요, 그날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28절) 성경에서는 무화과 나무가 여러 의미로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곧 ‘때’와 ‘변치 않음’으로 묵상함이 좋겠습니다.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사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여름이 다가옴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무화과 나무의 변화현상은 여름이라는 때를 알려주는 확실한 징조였습니다. 24-25절의 현상들은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먼저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그다음 새 잎이 나면서 무성해지는 여름이 오는 자연의 순환이 정확합니다. 24-25절의 징조가 일어나면, 예수님의 말씀도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름”으로 번역된 ‘데로스’는 ‘끝’, ‘최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케츠’와 어원이 같습니다. 아모스가 ‘여름’을 최후에 있을 심판으로 상징했습니다.(아모 8,1-3)

땅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희망하고 하늘을 향한 그 눈으로 땅을 바라봐야 한다는 기쁜 소식을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해 내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나를 믿는, 그래서 희망과 사랑이 상호 교환되는 삶입니다. 나의 선한 행위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단순히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하느님의 자비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분의 은총이 선재해 내가 그 삶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삶에 의해 성장합니다. 그것이 응답의 삶입니다. 내가 겪어야만 했던 삶의 희로애락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도 좋아서도 아닙니다. 믿음의 씨가 싹이 나고 잎이 자라는 변화를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삶, 곧 응답하는 삶에 대해 보겠습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은 인격들 간의 친교를 지향합니다. 열심히 분주히 사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바리사이들도 열심히 살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열심히 살았지만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율법과 관습으로 자신들의 울타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법이 자신들을 구원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정해진 규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 안에서 자신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많은 초대에 응했고, 또 그들과 먹고 마셨지만 그곳에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최종 친교의 완성인 하느님께 눈을 돌리도록 도왔습니다. 이 삶은 내적 가난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적 가난은 너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자신을 내어주면서 그를 품게 합니다. 내어줄 수 있기에 가난하고 얻을 수 있었기에 부유합니다. 이는 그분의 현존, 눈이 부시는 영광입니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확실히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들어서 압니다. 스폰지가 물을 먹고 물을 내어놓듯이 성령께서 그 생명의 숨결을 우리에게 불어넣으셨고, 우리 몸은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빼앗기지 말아야겠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빼앗기지 않아야 하고, 흘러가는 세상의 방법에 도둑맞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졸지 말아야 합니다.(마태 24,43)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온몸으로 지켜야 합니다. 도둑이 직접 훔쳐가져 가는 것도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려 놓는 것입니다.(마태 13,27) 서서히 다 잃어버리도록 말입니다. ‘이 정도는’ ‘이번만’ 이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무감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하시고, 자신은 몸을 땅에 엎드려 아버지께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묵시 21,1) 자신의 삶 속에서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삶을 아는 자요 생명을 지닌 자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그날은 큰 희망이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찬란히 빛나는 영광의 순간이요 완성의 순간이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일어나 뛸 듯이 춤추고 즐거워하며, 서로에게 축하합시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 김혜숙 (막시마) 선교사 : 가톨릭신문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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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마르 13,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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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1-3).”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일입니다. 그날은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데려가 주시기를 바란다면, 즉 하느님 나라에서예수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지금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온 삶으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림의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4-27).”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종말의 날’입니다. 그날이 되면, 우리에게 익숙했던,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우주의 질서 전체가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우주가 될 것입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는 말은, 그것들의 임무가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3).”

예수님께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은, 영광스러운 하느님으로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는 말씀은,‘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들도 그날이 되면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신다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가 선택한 이들”이라는 말은, 누구를 구원할 것인지, 또 누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선택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금의 삶’이 그렇지 않으면, 그날 선택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예수님의 선택은 사실상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또 ‘전에’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간에 변절한 사람은 처음부터 안 한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에는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28-31).”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당시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일들’이라는 말은, 마르코복음 13장 14절-23절에서 언급된 재난들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되는데, 그 재난들은 ‘종말의 재난들’이 아니라 ‘종말 전의 재난들’입니다.(그런데 전쟁, 박해, 지진, 기근, 전염병, 거짓 예언자들 같은 재난들은,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즉 우리가 늘 겪고 있는 재난들입니다. 그리고 그 재난들은 ‘벌’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미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도 이미 시작된 일이고, 그 일이 완성될 날이 곧 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예수님께서 이미 문 가까이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이 세대’가 어떤 세대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인데, 종말과 재림과 심판이라는 대사건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즉 인류 전체가 그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하늘과 땅은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고,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도대체 그날이 언제란 말이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라고 말씀하십니다.

먼 훗날일 수도 있고, 내일, 또는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니까, 회개는 ‘지금’, 그리고 ‘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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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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