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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조회수 | 2,453
작성일 | 09.11.13
어제 오후에는 날씨가 너무나 좋아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리고는 그 방향을 강화도의 대관령이라고 불리는 꼬불꼬불 고갯길이 많은 곳으로 결정했지요. 전에 한번 탔을 때 너무나 힘들어서 그 뒤로는 잘 가지 않는 코스이지만, 땀 흘리기에는 이곳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아서 힘들어도 자전거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2Km가 넘는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길을 넘어야 제가 생각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는데도 힘들게 그 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 어떤 할머니 두 분께서 내려오시면서 저의 이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순간적으로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눈으로 볼 때, 저의 모습은 정상인이 아니죠.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언덕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습은 정상인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아셨다면 어떠하셨을까요?

제가 이 자전거를 타면서 건강이 너무나도 좋아졌다는 사실을, 또한 체중도 10Kg 이상 감량했다는 사실을,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보다 누구보다도 활기차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도 과연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만약 본인이 이 사실을 직접 느끼신다면 그 할머니도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노력하실 테고, 이러한 말씀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좋은 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그러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도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요? 돈과 권력을 최고로 알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이 첫째 자리에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고 있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하지만 이분들도 신앙생활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사실을, 또한 누구보다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세상 안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아셔도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의 상황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십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희망의 말씀도 전해주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이므로,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목숨을 걸 생각까지도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한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정상인이 되어야 할까요? 그런데 세상의 눈에 보이는 정상인이 아니라, 주님의 눈에 보이는 정상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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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종말은 희망입니다

교회 전례력상으로 마지막 시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날과 그 시간 곧 종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종말이라는 말은 듣기에 썩 유쾌한 단어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에서 나의 존재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상실 곧 죽음은 세상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들어도 마지막 날에 관한 이야기는 역시 불편한 마음이 앞섭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당신 자녀로 하여금 공포와 두려움으로 주눅 들게 하시고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종말(終末)’은 분명 마지막을 뜻하는 단어이지만, 성경적으로는 ‘끝’이 아니라 ‘완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함의 속성을 지닌 종말을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멸망에 더 가까운 ‘시한부 종말론’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것이다.”(루카 13,26)

무서운 일들이 있고 난 후 세상은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던 하느님의 창조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미 수차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던 휴거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은,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의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못된 가르침에 이끌려 아버지 하느님 외에는 아드님조차도 모르시는 그날과 그 시간을 되뇌며,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실한 삶을 포기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5,18)

믿는 이들에게 마지막 때는 결코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듯 아주 자연스럽게 완성의 계절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무서워 떨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부정하던 이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악과 부조리가 정리되는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 곁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인천교구 장인호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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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한해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는 추수를 통해 한해의 결실을 얻는 기쁨이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모르지만, 징표를 보고 그 시기를 알아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우리는 여기서 그 날과 그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주위를 둘러보는 노력이 필요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있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들깨 수확을 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들깨 수확을 언제 해야 하나?’ 하고 가늠만 하고 밭으로 나가보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면서 다른 밭의 상태만 보고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 직원분께서 다급하게 ‘들깨가 다 익었는데 왜 추수를 안 하느냐’며 저에게 빨리 서두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추수 때가 멀지 않았습니까?’ 대답하고 밭에 가보니 들깨는 이미 추수 시기가 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가 내 뜻대로 판단해서 적당한 시기를 놓쳤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밭에 가끔이라도 나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래도 서둘러 추수를 해서 나름대로 수확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 시기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표징들을 보려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바로 문 앞에 계시는데도 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국 뽑힌 무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표징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세상의 빛으로서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평신도의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소명이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밝게 변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문 앞에 오시는 구원의 때일 것입니다. 내가 사는 세상 안에서 무감각, 무관심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빛이 없다면 그것을 깨닫고 빛을 주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먼저 빛을 내는 기존의 사람들과 함께 변화에 같이 동참하는 것도 표징을 알고 따라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평신도 주일인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표징을 받아들이고 평신도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김성진 베드로 신부 / 2015년 11월 15일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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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가?

어느새 한 해를 돌아보아야 하는 때가 되었다. 돌아보니 올여름은 참 더웠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에어컨이 없이는 밤에도 지내기가 어려운 초열대야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될 정도로 무더웠다.

이 더위를 겪으며 어떤 이들은 지구의 환경변화를 걱정하며 지구의 온난화에 대비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려 하고, 에너지 사용을 줄이려고 스스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선 에어컨과 같은 냉방기기의 보급과 사용을 늘려 이를 해결하자고 할 것이다. 당장 에어컨을 보급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일을 더 늦출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더위 속에서 〈제4회 한국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서울신학교 교정에서 치른 마무리 행사에 “ 100년만의 폭염 속에서도 2,000여명의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인 열기가 더 뜨거웠다"고 신문은 기사를 내 보냈다. 바깥출입을 자제해야 할 정도의 무더위를 이겨낸 청년들의 열기는 자랑스럽고 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2,000 이라는 숫자가 아쉽다.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더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한국천주교회의 신자수가 거의 600만에 다가가고 있음을 고려하면,2,000이라는 숫자는 전체의 0.04%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대회기간 전체 행사에 참가했던 숫자는 그 보다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못내 아 쉽 다 . 0.04%.. ..

그 동안 일각에서는 이처럼 교회 안에서 청년의 활동과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 해 왔었다. 그렇다 해도 현실을 보면, 교회는 여전히 큰 어려움 없이 잘 운영되고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의 체질이고 현실인가?

미궁에 빠지게 된다.
청소년과 젊은 세대의 존재는 단순히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깨 달아야하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본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 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줄 알게 된다.”(마르코 13,28)

▦ 인천교구 민영환 토마스 모어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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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제님께서 새해에 어느 지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먼저 그 집의 어르신께 세배를 올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 백수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아무런 덕담을 해주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 형제님은 지인에게 어르신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면서 걱정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인은 어떻게 인사했는지 묻습니다. “백수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요?”라고 대답하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보게. 우리 아버지가 올해 99세야. 백수 하시라고 했으니, 1년만 더 살라는 말로 들으셨을 것이 아닌가? 당연히 기분이 나쁘시겠지.”

이 말을 듣고서는 크게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배 올리겠습니다. 만수무강 하십시오”라고 인사하자, 그제야 밝게 웃으시며 “자네도 복 많이 받고 내년에 또 오시게”라고 덕담을 하시더랍니다.

오래 살고자 하는 게 과연 어르신의 욕심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마 새로운 삶에 대한 불안 때문일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고, 자신 역시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렵게 느끼는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삶 안에서 많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내가 행한 모든 것을 통해 죽음 이후의 삶이 결정됩니다.

주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두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입니다. 어떻게 최후의 순간이 즐거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두려움과 걱정으로 힘들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최후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오기 때문에, 이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십니다.(마르 13,32 참조)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만 아시기에 매 순간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는 재앙의 때가 올 때, 구원을 받을 책에 쓰인 이들입니다.(다니 12,1 참조) 내 사랑의 실천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책에 기록하듯이 우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에 기록된 이들이 영원 무궁히 빛날 것이라고 말합니다.(다니 12,3 참조)

걱정과 두려움이 필요한 지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당신 스스로 제물이 되셨고, 우리를 계속해서 이 구원의 길로 올 수 있도록 기다리십니다.(히브 10,12-13 참조)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커다란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삶을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좋은 고급 승용차를 샀습니다. 그런데 이 승용차를 전혀 관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또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 가지 않아 그 누구도 고급차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고급차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정비하고 관리한다면 어떨까요? 오랫동안 고급차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훌륭함을 당연히 간직할 수도 없고, 더불어 나의 소중한 가치도 잃어버립니다.

나의 훌륭함과 그 소중한 가치를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든 실천하며 사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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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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