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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조회수 | 2,308
작성일 | 09.11.13
요즘 시어머님들은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신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들 하시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과제요, 정녕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또한 가장 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공평한 것이 또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부자이건 거지이건, 최고 권력자이건 서민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손님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하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위령성월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시는 한편, 그 날과 그 시간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죽음을 앞에 두면 하나같이 남기고 싶은 말이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라,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엮어가라'이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천국을 향한 순례자들이며, 잠시 지나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하기 위해 여기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학생들의 귀에 이렇게 말합니다. “까르페 디엠(Carpe Diem),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 인생을 남다르게 살아라.”(Carpe Diem은 라틴어로 "seize the day"의 뜻인 "현재를 즐겨라", “이 순간 최선을 다하라”의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과 동시에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잘 죽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잘 죽는 것은 곧 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전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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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가르치시는 예수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과 더불어 교회의 전례력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인 그리스도의 왕 대축일을 지내고 나면 교회의 전례력은 2003년에 이별을 고하고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2004년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른 교회의 전례력에 발맞추어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 특히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세상이 이제 끝나는 듯한 성격을 띤다는 말이다. 즉, 세상의 종말,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그분의 심판 등을 주제로 한 독서와 복음을 듣게된다는 것이다. 성서의 이러한 부분은 원래 묵시문학에 속하는 것들로서 박해와 압제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낡은 세상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는 강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 예수께서 오시던 서기 원년 전후에 편집되었다.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야훼의 영을 받아 세상의 종말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난리가 일어나 죽었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심판은 받게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릴 자와 영원한 수치와 모욕을 당할 자로 구별될 것이라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는 바로 야훼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자들로서 그들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날 것이라고 말한다.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최후의 심판 후에 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영원히 사는 자는 결국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단 한번 희생 제사로 인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오늘 복음은 실로 소름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마치 최후 통첩 마냥 우리 귀에 들린다. 복음이란 본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지만, 오늘 복음은 차라리 ’공포의 소식’처럼 들린다. 지상의 재난이 일단락 되면(13,1-23), 하늘에 종말적 징조들이 출연한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천체가 흔들리는 등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멸망에 치닫게 된다. 그러나 우주의 멸망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 순서는 인자의 재림이다. 인자는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실 것이다.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들이다. 사실 땅과 하늘에 벌어지는 재난의 목적은 종말에 있다기보다 인자의 재림에 있다. 재림하실 인자는 뽑힌 사람들을 모아들이신다. 그러므로 종말은 곧 완성을 의미한다.

교회의 전례력이 마지막에 이른 이 시기에 교회가 의도적으로 성서의 이러한 부분들을 들려주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해마다 교회의 전례력이 마감되는 11월 위령성월에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세상이 교회의 전례력과 더불어 2주간 후에 끝장이 나서 내가 죽는다면, 그래서 모든 이가 함께 지켜보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면, 나는 이제 남은 2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물론 마지막 날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예수께서도 그 날의 설정을 철저하게 아버지께 유보하였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32절) 그러나 죽음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분명한 것이라면,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과 동시에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잘 죽는 법을 배워야 하며, 잘 죽는 것은 곧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공포의 소식’을 통하여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도 진정한 ’기쁜 소식’이다. 옛 말에 "모사재천(謀事)이요, 성사재인(成事在人)이라" 하는 말이 있다. 그 의미인즉, 뜻은 하늘이 세우되 그 뜻을 받들어 이루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처음과 같이 마지막까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박상대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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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전례의 1년 주기는 12월초, 대림 첫 주일에 시작하여 11월 말,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전례주년이 끝나는 시기의 미사에서 우리는 복음서가 전하는 세상 종말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생각할 때는 당연히 유대교 묵시문학의 언어를 상기하였습니다. 묵시문학은 기원 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남긴 문헌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문헌들에 익숙하였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 문헌들의 언어를 빌려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묵시문학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모두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언급된 주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미래가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종말의 ‘시와 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3,32). 기원 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70년, 유대아의 완전 패배로 끝나면서 수도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전까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이스라엘의 패전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를 겪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며, 건강식품과 보약을 먹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재물과 권력을 얻어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 앞에서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미래가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일만 실천하며 살았던 생명이 겪는 종말이었습니다. 자기의 지상적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던 대자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들더니 어느덧 낙엽 되어 떨어지고, 이제 우리의 발에 밟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푸르지만 않습니다. 단풍도 들고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던 우리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삽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업과 보람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시선과 몸짓,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사람을 살리는 몸짓이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찰 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나의 나라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만이 내 인생의 최대 보람이라면,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실현하는 나의 미래를 보며 축복이나 하고 계시라고 하느님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가 만드는 우리의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보장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미래를 찾아 나서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을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행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삶입니다. 한 번 하는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도,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예행연습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이 하는 소중한 일들은 모두 이렇게 연습도 없이, 준비된 대사도 없이, 보장도 없이 감행해야 하는 모험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모험,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또 죽음을 앞두고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모험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현재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하느님의 현재를 사는 사람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하실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빌며, 이루어야 할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우리에게는 어려움, 곧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것이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를 사는 길이고, 또한 하느님의 미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서공석 신부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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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준비히라는 주님의 배려

교회에 대한 생각과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정의마저 왜곡시키고 있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애쓰시는 교우분들의 수고로움이 생각납니다. 어떤 말씀으로 힘을 북돋워 격려해드릴지, 고민해 봅니다.

오늘 교회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는 복음 환호송을 소리 높여 노래합니다. 그분 앞에 당당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앙인들이 전례 형식이나 종교적 의식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해하는 현실이 아픕니다. “성당에 다니면 마음이 편해서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고 유유자적하는 미지근한 신앙자세에 마음을 앓습니다. 마치 그런 생각들이 겸손과 겸양의 처신인 양 여기는 모습들에 속이 썩습니다. 이야말로 신앙의 중심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감에 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야말로 주님의 열성을 무시한 행태이며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신앙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모르고 주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는 소치이며 신앙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이용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이유는 그처럼 느긋하고 편안하고 한가한 사항이 아닌 까닭입니다.

믿음은 내 뜻을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방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에 관하여 강론을 듣고 예수님에 관하여 연구하고 배우는 일에서 머물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라는 매정한 말씀으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십니다. 그날과 시간은 꼭꼭 감춰져 있으며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단속 시키십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뻔한 상황에서는 별로 긴장하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돌발적 상황에서는 바짝 긴장합니다.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대처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기질을 백번 헤아려 주님께서는 삶의 마지막을 꼭꼭 숨겨놓으신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삶의 마지막이라는 비상사태에 깨어 준비하라는 배려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 순간이 그분의 적과 전쟁을 치르는 전투 현장입니다. 믿음인은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하느님의 용사입니다. 힘들고 어려우며 생각지 않은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바짝 긴장하며 지내야 옳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매일 사투를 벌이는 그분의 군사이기에 안락하고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기도를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오해하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계획과 뜻에 하느님의 최종 사인을 얻으려는 꼼수신앙인 틈에서, 자기 뜻과 생각과 주장을 관철하는 것을 강한 믿음인 줄 오해하는 짝퉁 교우들 사이에서, 묵묵히 깨어 그분의 뜻만 위하여 충실히 살아가는 교우분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악을 더 큰 악으로 이기려는 땅의 궁리를 버리고 악에게 마저도 선으로 대응하려 고심하는 교우분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모두 그날의 승리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필리 1,20)을 소원하는 깨어있는 신앙인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미사가 마지막인 양 참례하는 진심으로, 지금 부르는 노래가 마지막 찬양인 듯 부르는 열정으로, 지금 나누는 사랑이 삶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사실에 깨어, 진지하고 진정어린 최선을 살아가는 교우분들이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신부이며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규칙이나 법에 앞서, 깊은 사랑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실천하는 교우분들을 진심으로 칭찬해 드립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모든 평신도분들이 제13차 세계 주교시노드의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으로 좌절을 극복하며 사랑으로 무관심을 극복하자”는 당부에 ‘깨어난’ 영적전쟁의 승리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해드립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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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덟 번째 평신도 주일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표징들을 말씀하시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으라 말씀하신다. 깨어 기다림이 단순히 잠을 자지 않고 눈떠 있음이 아니라 시대의 징표를 잘 살피라는 말씀일진대, 깨어있으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구체적 행동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방송 매체를 보면 다가올 미래가 불안하니 보험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는 광고를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여러 보험 상품에 가입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고 이런 준비가 부질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확실하게 다가올 노후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종말에 하느님을 뵙고 심판을 받게 될 신앙인들은 또 다른 준비를 하나 더 해야 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진다.

하느님께 내 삶을 심판받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 어떤 종교적 행위와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할까? 종말의 날이 멸망이고 징벌과 재앙이라는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예수님 당시에 심판에 대해 예수님은“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 40)이라며 의인으로 인정받는 삶은 계명과 율법의 준수를 뛰어넘어 작은 이들에 대한 연민의 실천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 현재 삶의 자리에서 그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종말을 준비한다는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우리는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라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얽매여 있거나 혹은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허비하고 흘려보내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당신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라.’ 말씀하셨다.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철저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는 영재 고등학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입시와 성공이라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학생들에게‘순간에 충실하라’(Carpe Diem) 외쳤다. 평신도 주일인 오늘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으로서 다가올 종말을 준비하며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사는지 잠시 묵상해 보자.

▥ 부산교구 김정렬 모세 신부 / 2015년 11월 15일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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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가난하고 불쌍하오니--(시편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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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주님, 귀를 기울이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가련하고 불쌍한 이 몸입니다.”라고 말한다. 왕인데 스스로 불쌍하고 가난하다니, 그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시편 86장을 통해 고백한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불쌍할 수 밖에 없으며, 종말에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선택하고 모아주시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2016년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셨다.

가난은 어려움에 부닥치는 모든 인간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빈곤만이 아닌 인간실존의 궁핍을 뜻하는 말이다. 가난했던 보릿고개의 6-70년대에 비해 경제적 규모가 전반적으로 커지고, 생산과 소득 총량이 증가했으나, 계층 격차는 놀라울 만큼 벌어졌고 빈익빈 부익부로 표현되는 양극화는 삶을 비참과 불행에 구겨 넣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을 통해 가난한 사람의 비참함을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간직한 자녀가 되는 길임을 말씀하셨다.

가난의 비참함(misera)에 우리의 마음(cordia 심장)이 더해진다면 자비(misericordia)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어 벌거벗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내어주시지만(창세기 3,21)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속옷마저 빼앗았다.(요한19,23-24)세상은 가난과 빈곤에 약탈을 일삼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신다.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심장이 되고,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닌 자녀가 된다.

교황께서는 “이제 자비의 희년은 폐막되었고 성문은 닫혔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자비의 문은 계속해서 활짝 열려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자비와 비참>16. 2016년 11월) 이제 우리가 자비의 마음으로 항상, 즉시, 기쁘게 우리의 사랑을 가난한 이웃에게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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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윤승식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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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2] 1105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5] 2308
706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5] 2729
705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2] 2695
704   [대구] 빛과 소금의 삶  [2] 2124
703   [청주] 낼까 말까? 얼마 넣을까?  181
702   [광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171
701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8] 2766
700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4] 2453
699   [전주] 종말론적 교회  [1] 2554
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223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959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229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200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232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959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746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730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76
689   [부산] 참된 봉헌  [5] 2539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91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809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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