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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인가?
조회수 | 1,704
작성일 | 12.02.03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인가?

오늘 말씀에서는 저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날마다 주어진 삶에 대하여 제대로 자각하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살아가면 갈수록 통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존재의 가치에 걸맞게 자신이 맡은 역할을 책임감 가지고 충실히 수행하기란 정말 어려운 현실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자녀이자 참된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사는 일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만큼 많은 유혹과 아픔이 뒤따르는 이 시대에, 복음적으로 산다는 것이 순탄하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각고의 노력과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의 성숙은 이러한 피땀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임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내가 복음적으로 산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 16 참조)) 마치 우리의 자존감과 의지를 꺾는 듯한 말씀으로 들리지만, 오히려 이 말씀은 큰 격려와 위로를 주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과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실천하는 데서 나오기에 그렇습니다. 이는 누가 하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선택과 결정은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 따라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지금 내 인생은 무엇을 하며, 어디쯤 와 있습니까? 혹시 이제 죽어도 후회나 여한이 없습니까? 누구에게나 잘 살았노라고 기억될 수 있으리라 여깁니까? 첫째로 복음을 전하는 이의 자세는, 자기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이지 못하다면, 결코 다른 이에게 선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내가 먼저 신앙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신앙을 증언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 모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충직한 일꾼으로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 23)

박근범 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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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 활동한 예수님의 하루 일과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렸다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네로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 공동체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것을 이야기로 남겼습니다. 그것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다가 상당한 시일이 경과된 후에야 기록되어, 오늘의 복음서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같은 것이었지만, 그들이 회상하고 이야기하고, 문자로 정착시켜 문서로 만드는 과정에 서로 차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네 개의 복음서들이 서로 간에 차이를 지닌 이유입니다.

마르코복음서는 그 첫 구절(1,1)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마르코복음서의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게 된 경위와 그분의 가르침이 어떤 기쁜 소식인 지를 알리는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먼저 마귀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마귀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마귀들이 알려준 정보에 그 기원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초능력을 지니고 원하는 대로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 상상하면, 우리의 복음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다양한 기적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게 된 것은 그분이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당신이 몸소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마귀라는 단어들이 일상에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이나 마귀라는 단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고,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행동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루가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어느 아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대신 주겠습니까?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11,11-12). 인간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재앙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겪는 불행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5,45).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선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율사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죄인이라고 버려지고, 좌절된 사람들이 그 절망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데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각종 불행이 있습니다. 병고, 가난, 인간의 횡포와 실패 그리고 사고 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각종 어려움을 겪으면서 삽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인간은 성숙하고 마음의 깊이도 가집니다. 돈이 많고, 권력을 가져서, 혹은 걱정이 없어서, 인간은 행복하고 성숙하지 않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과시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열등의식에 시달리는 미숙한 인간입니다. 자녀를 제대로 키우는 부모는 재물과 권력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숙한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행복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아무도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에서 우리를 면제시켜 주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 안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아쉬울 때, 동원하여 이용할 수 있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실천하여 당신 자녀로 살 때, 그 생명의 기원인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웃을 고치고, 살리며,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노력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과 교감(交感)하는 시간을 특별하게 가지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배웁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그것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은 것은 그 시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내가 수확한 것은 모두 내 것이고, 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명절에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행복하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한 그만큼 우리 주변의 불행한 생명들에게도 시선이 가야 합니다. 그들도 행복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노력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기쁜 소식입니다.

서공석 신부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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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새벽기도

그 새벽, 주님께서는 무엇을 기도하셨을까요? 종일, 문이 닳도록 찾아드는 수많은 사람들, 갖은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일일이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몸은 녹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병자치유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안수하시고 손수 그들을 일으켜 주는 섬세한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주님의 고단함을 선명히 느끼게 됩니다. 새벽, “아직 깜깜할 때” 지친 몸을 일으켜 외딴 곳에서 홀로 기도하게 했던 그 간절한 원의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늘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구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궁금한 마음 한쪽, “오늘은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게 해 달라”거나 “오늘은 어제보다 덜 피곤한 날이 되게 해 달라”는 따위를 간청하지는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싶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에서 감을 잡고 뜻을 캐낼 수 있지 않을까요?

욥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온전했던 의인이었습니다. 그가 당한 억울한 사연이나 끝내 그분께서 열배의 축복으로 갚아주신 일들은 익히 알려진 성경의 고전입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은총의 답안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욥이 자신의 믿음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친구들의 헛된 입쌀에 마음이 휘둘려서 “인생이 고역”이라고,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희망도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보통사람으로 전락해버린 일을 안타까워합니다. 또한 주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세상에서 ‘한 건’ 올린 일에만 신이 난 제자들의 모습,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며 흥분하는 제자들의 들뜬 모양새를 딱하게 여깁니다.

옳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날 주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새벽기도의 주제는 여태껏, 덜렁덜렁 주님 뒤를 쫓아 다니며 구경꾼 노릇만 하는 철없는 제자들의 믿음이 욥처럼 강해지기를 원하셨을 것이라 짚어집니다. “복음을 위하여”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청하신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능력으로 땅을 만드시고 당신 지혜로 세상을 세우셨으며 당신 예지로 하늘을 펼쳐 놓으신”(예레 10,12)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에 대단한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분의 안색을 살필 수 있습니다. 행여 그분의 것이 아닌 것을 선택할 때, 잠깐 그분의 뜻이 아닌 것에 한 눈을 팔 때, 우리 영혼에 한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은 경직된 복종이 아닙니다. 주님과 세상을 오락가락하며 혼돈스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에 마음을 모아 생각과 행위와 말을 정리 정돈시켜 단정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혹여 미사에 참례하는 마음이 계명에 얽혀 성사를 피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잠을 설치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를 질시하는 모습이 그분을 통곡하게 할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아직 캄캄한 새벽” 외딴 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어김없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우리들이 그분의 뜻을 헤아려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청하셨을 것입니다.

이른 새벽, 그분 기도에 힘을 보탰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세상의 좋은 표현에 혹하는 일이 없기를 청했습니다. 세상의 매력적인 문장에 꼬드김 당하지 않는 지혜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폭력의 언어에 동조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보호해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분의 뜻을 내 생각대로 편집하는 죄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이 아닌 세상논리에 휩쓸리는 탓에 주님께서 피땀을 흘려 기도하는 기막힌 일이 없기를 소원했습니다. 하여 그분께서 터억, 마음 놓고 단잠을 주무시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그분께서 매일 매일 올려주시는 새벽기도 덕분에 우리들이 욥이 몰랐던 참 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기도하시는 그분 사랑에 큰 찬미 올립니다.

장재봉 신부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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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일어나… 가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연중 제3주일, 4주일 복음을 요약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회개의 선포와 네 제자들을 부르시고(연중 제3주일),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 내신(연중 제4주일) 앞 구절의 내용은 변주곡의 형태로 오늘 반복됩니다.

한 제자 부인의 어머니를 고쳐주시고,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이야기는 기적과 말씀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권위를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말하고 싶은 마르코 복음 사가의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세상은, 욥의 말처럼, 허무로 끝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 7, 6∼7) 희망 없이 스러질 것 같은 세상을 향해 마르코 복음 사가는 예수님에게 회복과 치유의 힘이 있음을 기회가 닿는 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마르 1, 35)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이 장면을 읽는 신자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밤과 낮이 맞닿아 있는 새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친숙한 부활의 시간 배경(마르 16, 2 참조)입니다. 아주 이른 새벽, 빈 무덤 장면(마르 16, 2. 9 참조)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마르코 복음 1장 참조) 제자들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예수님이 주위에 없다고 느낄 때, 예수님을 찾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마르코 복음 사가가 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부활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리십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에게까지 특별한 권능을 펼치십니다. 아니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누구든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 계실까요? 예수님을 빈 무덤 속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찾으려면, 그분과 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일어나야 하고, 그분이 걸었던 길뿐만 아니라, 늦기 전에 그분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끝에 우리는 어떤 사명을 받습니다.“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 38)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다시 일어섬의 믿음이며 용기이겠습니다.

<부산교구 김정완 신부>
  |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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