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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 사랑의 빛
조회수 | 2,171
작성일 | 06.08.26
우리는 요한 복음에 나타난 생명의 빵에 관한 마지막 말씀을 듣습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에,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갈등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며 투덜거리고 심지어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요한 6,66). 이것은 당시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 곁을 떠나게 한 갈등과 분열, 그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님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의 문제는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에 비유해 말합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여기서 무심코 지나치지 말아야 할 구절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몸에 밴 모든 고정된 사고방식을 뛰어 넘어, 또 다른 삶의 자리를 가진 배우자와의 새로운 만남으로 도약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되듯이 말입니다(마태 9,17). 과거의 헌 가죽 부대만을 고집한다면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한다는 것은 영과 생명에 관련된 차원입니다(요한 6,63). 이것은 주님의 사랑과 결합하여 그 사랑이 우리 내면에 스며드는 심오한 영적 만남입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에 결합하여 온전히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아내를 제 몸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과 자기 아내의 내면에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만남의 필수 조건입니다. 주님 사랑의 빛은 우리 내면을 가리고 있는 고정관념, 선입견, 이기적 행복을 밝게 비추어 자신의 내면을 올바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당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주시려고 했던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복 추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광야의 여정에서 주님을 버리고 다른 신(神)들을 섬겼던 이유는 바로 그 신들이 세상의 행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은 삶과 죽음과 부활로 그것을 몸소 보여 주신 한 분뿐입니다. “그들이 울부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시편 34, 18-20).

서울대교구 홍승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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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물건을 하나 사는 데도 순간 잘못하면 10년 동안 마음 고생을 하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선택하고 또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망설이는 시간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하고 유행가 노랫말처럼 많이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도 때가 되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결단을 해야 하고 결단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정을 하는데 끝까지 우유부단하거나 결단을 하고 나서도 결단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련을 두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매순간 하느님께로의 결단이 필요하며, 한번 결단하고 나서는 거기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자기가 죽게 될 때를 알게 되자 백성들을 모아놓고 강하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 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24,15)

이렇게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야훼 하느님만을 선택해야 함을 아주 강력하게 확인하고 또 다짐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지요.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으로 몰려왔겠습니까?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그 빵을 받아먹었고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을 때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지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마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에 마음을 두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당신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열 두 명의 제자만이 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비장한 각오로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가 즉시 대답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오직 예수님만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듯이 신앙은 결단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앙만이 결단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결단입니다. 하느님과 다른 신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것과 영원한 것을 동시에 계속해서 향유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고,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일생에 딱 한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 이루어집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결단해야 할 순간은 다가옵니다.

이렇게 결단을 내렸다면 그 결정하고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은 여기에서 명확하게 나누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깊은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하고, 결단을 한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미련한 사람은 우유부단하게 우물쭈물 결단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가까스로 결단을 하고 나서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은 것은 점점 이상화하고 또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불평을 쏟기 일쑤입니다. 또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마련이지요.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더합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선택하며 그 외의 모든 것을 끊어버린다는 약속을 하지요. 하지만 그런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서 이것에도 저것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신앙이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하지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결단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 미사를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신앙과 게으름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나오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겁니다. 저 뒤에 계신 분들은 아니시겠지요? 고민 하다가 아마 아직도 우물쭈물 망설이고 저녁 미사 때까지 미루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변에 아직도 하느님과 미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녀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불안해하며 찾아가는 곳이 있지요.

󰡒이 대학에 붙겠습니까? 저 대학에 붙겠습니까?󰡓

부채도사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또 결혼을 할 때가 되면 궁합을 맞춰 보기도 하고, 이사를 해야 하면 이사할 날을 정하러 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양다리를 걸치고 우물쭈물 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여유 없고 궁색한 모습입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뿐입니까?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의 이익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의 재물을 택했다가 후회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바칠 믿음이 있고, 목숨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목숨을 바쳐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이웃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콤팰트󰡑라는 유다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콤팰트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에 수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를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고 일체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콤팰트가 수용소의 법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수용소에서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사상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시가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콤팰트는 의사로서 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치료가 미루어지고 수술에서 제외가 되자 마침내 콤팰트는 그를 위해서 수술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의사로서 양심에 걸리는 일을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수용소의 법을 어기고 금지된 수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콤팰트는 수술을 감행하였고 곧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이 행해지던 전날 밤에 콤팰트는 수술을 해 준 젊은 남자를 찾아갑니다. 콤팰트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자기가 왜 수술을 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 젊은이를 수술해 준 죄로 당신이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여기서 아주 유명한 대답이 나오지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결심은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콤팰트는 처형장으로 담담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콤팰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 때 수술을 받고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중한 것에 목숨을 바쳐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주변의 상황에 타협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선택하도록 요청한 대로 하느님을 믿고 충실할 때 주변 상황이 어떻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면서도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작은 이익에 얽매어 연연해하면 평화는 결코 내 것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 결단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번 많은 유혹과 시련에 부딪힙니다. 이 유혹과 시련 사이에서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베드로 사도의 이 고백을 내 것으로 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 때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모습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뿐 아니라 진리와 사랑에 대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수 있는, 결단하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남들은 바보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의 질은 다른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구보다도 많이 향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은 참 신앙에의 결단에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세상의 유혹에 시달릴 때 고민하지 마십시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거기에 바로 길이 있고 거기에 바로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기양 신부
  |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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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결심은 후회가 없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사소한 물건을 하나 사는 데도 순간 잘못하면 오랜 시간 마음 고생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고 또 결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 것을 포기해야 한다면 생각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라는 유행가 노랫말처럼 자꾸 망설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때가 되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매순간 하느님께로의 결단이 필요하며, 한 번 결단하고 나서는 거기에 끝까지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자기가 죽게 될 때를 알게 되자 백성들을 모아놓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여호 24,15).
 
죽음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주님만을 선택해야 함을 아주 강력하게 확인하고 또 다짐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가르치시자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하며 말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하는 결론을 내고 모두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비장한 각오로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가 즉시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오직 예수님만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콤팰트라는 이름을 가진 유다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콤팰트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수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를 만나 예수님을 알게 됐는데, 주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고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콤팰트가 수용소 규율을 어기게 됐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수용소에서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사상이 나쁘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시가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콤팰트는 의사로서 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차례 치료가 미뤄지고 수술 대상에서 제외되자 마침내 콤팰트는 그를 위해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의사로서 양심에 걸리는 일을 더 이상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수용소 법을 어기고 금지된 수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사형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콤팰트는 수술을 감행했고 곧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이 행해지기 전날 밤에 콤팰트는 수술을 해 준 젊은 남자를 찾아갑니다. 콤팰트는 그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자기가 왜 수술을 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이 젊은이를 수술해준 죄로 당신이 죽게 됐는데 후회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아주 유명한 대답이 나오지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결심은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다음 날 콤팰트는 처형장으로 담담히 걸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콤팰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때 수술을 받고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선택하도록 요청한 대로 하느님만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풍파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운 한 주간되길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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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보좌신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세례를 위한 면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이 근처 시장에서 신발 가게를 합니다. 여기 성당에 신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성당에 다니게 되면 신자들이 우리 가게에서 신발 하나라도 더 사주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루하루 예비자 교리를 받으면서 제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런 내 욕심을 채우려는 부정한 마음으로 성당에 왔는데, 제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웃으면서 그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님을 신발을 통해서 부르신 것 같은데요. 신발을 많이 팔기 위해 성당에 오게 된 것도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님께서는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시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게 되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해서 진정한 주님을 알게 되셨으니 이제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좋은 신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 후 2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분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기쁨과 풍족함,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한껏 누리면서 사는 삶 말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이 삶의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길과 안전한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길을 안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요?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 해답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을 찾고 그분을 따라만 가면 될 것입니다.

한동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 기적에 열광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의도는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알아보고 고백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당에 다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기적을 보고, 빵을 보며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유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한 유혹이 많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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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

예전에 예비자 교리반을 함께 했던 형제자매들이 세례를 받고 몇 달 후 모여 담소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주로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세례를 받고 난 후 삶이 과거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 한 형제님의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도 오래 기억이 남습니다. 치과 의사인 그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난 후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고는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던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 행동이 하느님을 믿는 신자로서 맞는 행동인가 하고 꼭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더 사랑을 갖고 대하려고 노력하고, 하루에 한 명분의 치료비는 따로 모아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봉헌하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시간을 내서 필요한 곳에 무료 진료도 가려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 내가 지닌 의학 기술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오래전의 그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훌륭한 설교와 대단한 기적 등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 기적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무척 열광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 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실망하면서 하나둘씩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자신들의 세속적인욕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가치는 사람들이 원했던 명예와 재산, 출세 등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많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도 혹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썩어 없어질 빵’, 세속적 가치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거나 신기한 능력이 있다는 이들 주위에는 예외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보고, 세속적인 이해를 따져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사도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에 모든 기쁨과 행복, 근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영원한 말씀을 갖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 삶의 길을 비추며 참다운 삶을 한껏 살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 2018년 8월 26일
  |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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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전주] 그대에게도 기적이  [3] 2316
564   [안동] "열려라"  [4] 2399
563   [마산] 주님 제 귀를 열어주소서.  [5] 2644
562   [광주] '그 날'은 이미 왔다  [1] 153
561   [의정부] 열린 귀?  [1] 152
560   [원주] 하느님 나라의 위력  [1] 134
559   [청주] 에파타  [2] 165
558   [대전/수도회] 주님 사랑만이 눈과 귀 열리게 해  [1] 173
557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에파타!” 곧 “열려라!”]  [3] 1738
556   [부산] 율법은 인간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3] 2166
555   [춘천]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  [3] 2159
554   [마산] 마음을 씻는 일  [4] 2758
553   [안동]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1] 2031
552   [의정부] 마음의 지지!  [2] 1984
551   [전주] 초대받은 자의 삶  [2] 1826
550   [수도회] 영혼이 깨끗한 사람들  [2] 1848
549   [인천] 내면의 아름다움  [3] 2161
548   [광주] 법이 곧 생명이다  [2] 1905
547   [군종] 사랑없이는 불가능한 행복  [1] 1782
546   [서울]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인간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4] 2157
545   [원주] 사랑이 먼저  144
544   [대구]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 2021
543   [수원] 선악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  [2] 2035
542   [청주] 하느님의 법  148
541   (녹) 연중 제22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  [5] 1457
540   [수도회] 영적 생활의 결실  1771
539   [인천] 힘들 때 들을만한 말  [1] 2188
538   [부산] 요한복음서에는 성찬, 곧 성체성사가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3] 2345
537   [군종]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1] 1972
536   [춘천] “주님의 자리를 찾아드리자”  [3] 2119
535   [의정부]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복됩니다.  [2] 2207
534   [원주] 우리 마음에 드리워진 구름을 걷어볼까요?  [1] 2133
533   [수원]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3] 2254
532   [대구] 총명(聰明)한 신자  [2] 1844
  [서울] 주님 사랑의 빛  [4] 2171
530   [전주] 나는 나다운가?  [1] 2233
529   [의정부]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  [2] 2013
528   [안동]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3] 2213
527   [마산] 교회가 교회다워야 교회지!!!  [3] 2471
526   (녹) 연중 제21주일 독서와 복음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생명의 말씀]  [5] 1777
[1][2][3][4] 5 [6][7][8][9][10]..[19]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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