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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조회수 | 66
작성일 | 19.09.23
[춘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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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주일학교 꼬마아이가 학원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나갔다가 상금을 탔는데 그 상금에서 5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불쌍한 분들을 도와드리라고 가져왔다. 참 예쁜 마음에 나의 마음까지도 흐뭇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이 모두 다 자기 것인양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서만 소비를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 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가난한 라자로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에게 무관심한 것이 그의 잘못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 우리는 이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나와 함께 살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와 같은 취미와 같은 생각으로 정겹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부자로 등장하는 이가 저승의 고통을 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에 대한 정의는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고, 우리 신앙인들의 숙제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신과 친한 이들에게만 잘해주고,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에게만 마음을 연다면 예수님께 받을 상급이 무엇이 있을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 33)는 말씀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생각하실지 모른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웃’에 대한 생각을 예수님과 일치시켜야 한다. 오히려 나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더라도, 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와 현실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을 때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임을 늘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

부자의 진정한 이웃은 그가 외면했던 가난한 라자로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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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혁순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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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내 마음의 고향, 그곳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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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늘 내 마음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첫 마음입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고향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아~ 바다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한참 바라보며 그렇게 바다를 거닐곤 했었습니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알갱이들이 정겨웠고, 눈을 감으면 시원한 파도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묘하게 겹치면서도 싫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향은 나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고향도 많이 변해, 마트도 많이 생겼고 횟집이며 어판장의 규모도 커졌습니다. 찾아오는 관광객의 수도 늘어 주문진항 주변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난데없는 뱃고동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유람선 한 척이 다가옵니다.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변함없이 반겨주는 모습 이면에 변화된 거리거리의 모습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사람들의 생기있는 얼굴이 좋았고, 변함없는 바다 내음도 좋았고, 신선한 생선들의 팔딱거림도 좋았습니다. 고향은 그렇듯 제게 재충전의 힘을 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이 주는 힘에 대해서는 종종 잊고 삽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의 고향은 어딜까요? 내가 하느님을 처음 알게 된 곳! 그곳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이들의 축하와 엄숙한 전례 속에서의 숙연함,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대한 묘한 기대와 궁금함.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지나온 시간 속에 훌륭한 거름이 되어 지금의 여러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었겠지요. 하지만 변함없이 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로 향한 첫 마음입니다. 그 첫사랑의 모습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마치 변함없이 반겨주는 바다의 내음과 파도 소리, 등대의 불빛처럼 하느님께로 향한 첫 마음이 생기있게 남아있습니까?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첫마음은 변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은 퇴색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과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처럼 지금 당장의 삶이 힘겹더라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고향, 신앙의 고향인 하느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실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행복이 여러분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지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 있죠.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찾으십시오. 현실을 탓하지 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오. 혹시 놓치고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십시오. 그 속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고향의 향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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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원훈 갈리스도 신부
  |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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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부자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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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축일과 주일 미사 전례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바치게 되는데, 그 사도신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나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우선, 우리 가톨릭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는 교회 구성원들, 즉, 살아있는 신자들과 죽은 신자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떨어져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결합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라는 기도문의 내용은,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이들은 이 세상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또한 죽은 이들은 저 세상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의 내용 안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안락에만 집착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물욕에만 집착하는 부자에게 내린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마태19장 24절) 이 부자는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늦게나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를 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부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저승의 고통을 경험하니,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신의 가족들, 자신의 형제들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조이신 아브라함 에게 성인의 통공, 즉, 부자는 살아있는 가족들, 형제들을 위해서 회심(悔心)의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이 세상적인 물욕에 빠지지 말고, 하느님의 선행과 공로를 실천하면서 살기를 그 부자의 가족들, 형제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 주님! 그저 말로만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마태 7장 2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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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방기태 루이스 신부
2016년 9월 25일
  |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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