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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부활 신앙
조회수 | 87
작성일 | 19.11.06
[청주]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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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거나 잊고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사실 자신에게는 죽음이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은 내 차례가 된다니 미구에 닥쳐올 죽음을 외면하며 살수는 없습니다. 과연 죽음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입증이라도 하시듯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믿기에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에서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신명기 말씀(25, 5-6)을 인용하며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칠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살다가 죽으며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루가 20, 34-36)고 하시며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일축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친 가족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아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왕 때에 돼지고기는 바알 신에게 바치던 제물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당시 신앙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율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용기 있게 대답하면서 죽음으로서 신앙을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희망하며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희생과 사랑을 요구하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더 원하고, 신앙이 요구하는 계명을 지키기보다 성공과 세상의 이익 때문에 계명을 외면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부활의 삶을 위해 회개와 반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항상 고백하며 신앙인의 모습을 간직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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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조영현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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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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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불쾌한 질문일수도 있을 듯합니다. 대부분의 한국인 은,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해 일정한 해답을 지녀야 할 신앙인들조차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듯 합니다. 세상 떠나는 어느 날, 이 세상을 향해 잘 살았노라 고 행복했노라고 웃음 지으며,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활짝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이 정확히 어떠한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음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죽는 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우리 삶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 을 것이라고, 적어도 죽음은 나에게 아직 멀리 있는 것이 라고 생각하면서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거부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직 하루살이처럼 오늘 이 순간, 물질적인 행복과 쾌락을 찾아다니며 바둥거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사두가이파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살아가 는 우리에게 부활하신 당신 자신을 보고, 당신이 사셨던 삶을 지금 이 순간에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모두가 아님을 믿으면서 죽음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죽음이 눈앞에 임박해야만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죽음에 직면하면, 우리 삶이 어떠했는지 보다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왜 우리는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 삶을 들여다보지 못 하는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직면하지 않는 한 우리 삶은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영적 성장은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삶은 변화하는 것이고, 그 변화하는 삶은 항상 죽음과 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다양한 만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만남에 의하여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느낀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부활은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통해 삶을 완성시키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죽음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11월 위령 성월을 보내면서 오히려 하느님과 하나 되는 부활을 체험해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죽음 없는 부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는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셨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을 자신을 내어놓으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내어 놓음으로써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의 증인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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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남규 비오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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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희망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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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도 영원에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소중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상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성경의 인물을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늘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고 옛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쓴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도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죄책감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마침표를 찍어 주셨는데도 자꾸 물음표를 던지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미래의 약속된 천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사두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허영에 빠져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성공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너무 짜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이야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지상논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상을 넘어 천상의 새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지상은 중간역이고 천상이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잘 지으려면 지금 수확을 하고서 농토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밭을 갈아엎으며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력이 떨어져 다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농사를 계속하려면 힘들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게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더라도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한다면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거름을 주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시간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고 나도 영적인 사람으로 항상 그분 앞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새 생명에로 초대하셨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 땅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된 새 삶이 펼쳐질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죽은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늘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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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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