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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감사의 생활
조회수 | 70
작성일 | 19.11.22
[청주] 감사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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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왕대축일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추수감사미사를 겸하는 날입니다. 오늘 교우들이 이 미사 중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될 영적선물은 첫 번째가 감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제대 앞에는 올 1년 동안 우리 교우들이 농사지으면서 가장 알차고 깨끗하게 추수한 것을 다 제대 앞에 봉헌하셔서 이렇게 풍요로운 제대가 꾸며져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감사는 분명히 종류가 있습니다. 종교인과 신앙인들이 드리는 감사의 내용과 질이 다르고 이방인들과 신앙인들이 봉헌하는 감사의 모습이 다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몸뚱아리만 왔다갔다 하는 허깨비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종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종교인과 이방인의 감사의 모습이 다르고 이방인과 신앙인의 감사의 모습이 다르다고 했는데 뭐가 다르겠습니까? 종교인이나 이방인들도 우리들처럼 감사합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감사할 결과가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와야만 감사를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거기에 대한 결과가 안 나타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손에 잡혀야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떻게 감사하며 살겠습니까? 미리 당겨서 감사합니다. 지금 현 상황으로 봐서는 도저히 이 일이 해결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앞도 절벽이요, 뒤도 절벽이요, 캄캄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해결 될거야! 주님, 감사합니다.’

종교인들은 일이 해결된 다음에 감사예물을 가져 오지만 신앙인들은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미리 당겨서 감사예물을 봉헌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과 우리 신앙인의 감사의 차이점입니다.

1년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먼저 감사부터 해야 됩니다. 간혹 이런 말을 드리면 “신부님, 감사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1년을 아무리 뒤돌아봐도 우환이 그치질 않았고...고통을 하나 넘어가면 또 다른 고통이 왔는데 뭐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하겠습니까? ” 그래도 그 어려운 고비고비를 우리들은 넘어왔습니다. 내 뒤에 그림자가 짙다고 하는 얘기는 앞에서 강한 빛이 비추어졌다는 뜻일겁니다. 우리는 늘 살면서 뒤에 있는 어둠만을 바라봅니다. 앞에서 오는 빛을 안 봅니다.

교우들을 제가 지켜볼 때는 두 종류입니다. 어둡게 열심한 사람이 있고 밝게 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둡게 열심한 사람은 자기 뒤에 있는 상처만 끌어안고 상처가 아물만 하면 또 후벼 파내고....그러니까 늘 열심하긴 한데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밝게 열심한 사람은 어둠은 아예 쳐다보지 않습니다. 흐르는 물에 씻어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오로지 내 앞에 쏟아지는 은총의 빛만을 보고 아침부터 잠 잘 때까지....감사, 감사... 감사의 말이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자살하고 싶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것 같지만 그래도 그 고비를 넘고 넘어서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이게 감사할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거울에다가 자기 모습만 비쳐보면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고 나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있고 나처럼 하는 것마다 안 되는 사람이 어디 있나......하는 절망과 우울함이 옵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서 주변의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정말 감사할 건덕지가 없어 보이는데도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우울과 근심과 불평불만이 쌓일 때에는 꽃동네에 가서 며칠 동안 봉사하고 오십시오. 그러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로...'내가 이토록 하느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존재구나!' 하면서 '주님, 그동안 불평불만 속에 살아온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겁니다.

감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본이요. 해도 해도 모자람이 없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큰 덕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감사를 못하고 살아갑니까? 지난 1년 동안, 아니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고 사셨습니까?

우리 신자들이 감사를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 번째는 욕심입니다.

뭐라고요? 욕심입니다...만족할 줄 모릅니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줄 모릅니다. 소유하는 기쁨은 늘 나를 속이기 때문에 소유하고 잠깐 기쁘지... 그 외의 것을 찾아 헤매야 합니다. 감사할 틈이 없습니다. 바로 욕심이 생기기 때문에......

두 번째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사를 늘 찾아 헤매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나와 내 주변에서 감사를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감사를 찾을 길이 없을 겁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은총을 받아야만 이런 마음도 생깁니다. 먼저 내 안에 있는 성령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달라고 겸손하게 청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눈을 크게 뜨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가 지난 한 해가 지난 한 주가 하루하루가 다 감사덩어리입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있을 때 정말 불평불만만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훌륭한 남편에, 다 자식들도 다 잘 되었는데. 집에서도 늘 불평불만이고 ... 안에서 새는 바가지 어찌 밖에서 안 새겠습니까? 성당에 들어와서 레지오를 하고, 액션단체에 가입해도 늘 불평불만 신부님이 바뀌어도 늘 불평불만.....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사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고 그 자매 마음에 드는 수도자도 아무도 없었고 마음에 드는 교우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보다 못해 그 자매를 불러서 “내가 보속을 주겠으니 2박 3일 동안 개인 피정을 하고 오십시오!” 피정 장소까지 마련해 주고, 거기 가서 2박 3일 있는 동안 다른 것 하지 말고한 가지만 하십시오. 노트 한 권을 주면서 이 노트에다가 “아무리 당신이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아도 감사할 거리를 찾아봐라! 몇 가지나 되나....” 며칠 있다가 그 자매가 얼굴모양부터가 달라져서 왔습니다. 그 자매는 눈꼬리가 올라간 독살스러운 눈이었는데 눈이 밑으로 쳐지면서 얼마나 부드러운 얼굴로 변했는지... 눈물을 글썽이면서 “신부님, 숙제 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노트를 보여주며 감사할 거리를 적어왔는데 세상에~~ 다섯 페이지를 적어왔어요 자기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밥도 굶고,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얻어터지면서 입 덜라고 16살에 가난뱅이한테 시집을 보내서 모든 그런 것이.... 그 인생이 불평덩어리였는데 .... 그래도 2박 3일 동안 성체 앞에서 뒤돌아보니까 얼마나 감사할 거리가 많은지...이렇게나 많았습니다. 여러분들 그 자매 그 다음부터 불평불만하고 살았겠습니까? 안 그랬습니다. 그저 감사..감사...... 오죽하면 그 자매 별명이 그 전에는 불평이었는데 그 다음에는 감사로 변했어요.

농부들 하느님께 감사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농사 잘 지어 놓으면 “아이고, 올해 내가 농사 잘 지었어.” 어떻게 내가 짓는 겁니까? 농부가 한 건 뭡니까?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대고, 약 주고, 돌 골라주었을 뿐이지.... 싹이 나와서 열매를 맺게 한 분은 내가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올해 내가 도우미를 잘 했어!” 농부들은 도우미지 열매를 맺게 하는 주인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내가 농사 잘 지었다 그런 이야기 하시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농사 참 잘 지어주셨다!” 이게 우리 믿는 이들의 입에서 나와야 되는 농부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 아닐까?. 우리는 감사미사 때 가장 좋은 것을 봉헌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할 때 카인은 쭉정이를 중간에 섞어서 하느님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제일 살찌고 제일 견실한 양을 바쳤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올바로 봉헌하지 못했을 때는 반드시 질투와 시기가 따라옵니다. 올바로 봉헌을 한 사람은 하느님께 떳떳하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고 질투할 이유가 없지만 올바로 봉헌하지 못한 사람은 늘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자기보다 성실하게 봉헌한 사람에 대해서 질투와 시기가 나서 나중에는 살인까지....... 결국에는 영적 살인까지 이르게 됩니다.

두 번째로 우리 본당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 우리 감곡신자들은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 본당이 성모님순례지가 되어서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옵니다. 끊이지 않고 성모님을 만나러 옵니다. 물론 순례지가 된 이후에 본당신자들의 일이 많아지고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불편한 점은 우리 본당에 쏟아지는 은총으로 되어야지.... 기쁨이 되어야지... 불평불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평불만이 많은 곳에 하느님은 축복을 거두어 가십니다. 또 성당도 안팎으로 정리가 되고 엄청나게 많았던 빚도 하느님의 은혜로,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빚도 이제 다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본당신자들이 하느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때는 이 축복은 거두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하느님 앞에 봉헌해야 하는 영적선물은 십자가 잘 지고 가겠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왕이 사셨던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기쁘게 지고 가겠다고 하는 것을 봉헌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감사를 봉헌해야 되고

두 번째는 내 십자가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하는 결심을 이 미사 때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왕처럼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애쓰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은 대궐에 안 사셨어도 군대가 없었어도.... 왕입니다. 천상의 왕입니다.

그리스도 왕은 일치의 왕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힘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학연과 혈연을 가지고 하나를 만들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를 가지고 일치해야 됩니다.

원죄 이후에 하늘과 땅이 끊어졌습니다. 그 끊어진 사이를 십자가로 주님이 이어주셨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을 이어주는 게 뭡니까? 결국에는 가족들의 각자각자 십자가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십자가가 있고, 엄마는 자기 십자가가 있고.... 자식들도 자기 십자가가 있는데, 지금은 자기 십자가를 버리려 하기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파괴된 가정을 이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타락하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버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도 자기 십자가를 버리려 하고, 수도자도 버리려 하고, 평신도들도 버리려고 할 때 그 교회는 건물만 있을 뿐이지...... 주님은 떠나시고 없는 껍데기의 교회일 겁니다.

교회가 성화되는 것도 교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기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야 됩니다. 교회 봉사단체가 점점 없어지고 분열만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 와서도 늘 계산하고 머리를 굴립니다. 이것 하면 내가 시간이 빼앗기고, 돈도 빼앗기고,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사단체가 쇠퇴해 가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은 용서의 왕이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의노를 여러 번 하셨지만, 용서를 청하는 인간에게는 무한한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지만 예수님 때문에 용서해야 합니다. 성모님 때문에 용서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 용서해야 됩니다.
세 번째 주님은 봉사하는 왕이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부수어서 나누는 삶이었고, 미사 때마다 빵이 되어서 음식물로까지 봉사하시는 와이셨습니다. 그 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윗자리에 대접받고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안 알아 줄 때는 얼마나 분노가 일어납니까? 그래서 교회의 모든 직책은 내가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만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라도 나를 안 앉혀 놓으면 엉망진창으로 살 까봐 주님께서 맡겨주신 봉사직이요, 하인직이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꾀부리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한문 중에는 王자가 들어간 한자가 많은데 그 중에서 특히 거룩할 성(聖)자를 많이 묵상하십시오. 거룩할 성자는 귀 耳자와 입 口자와 밑에는 王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왕자는 뭐로 이루어집니까? 1획이 하늘이요, 3획이 땅인데 그 중간이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왕자입니다.

성인은 누구냐? 귀를 다스리고, 입을 다스리면서, 하늘과 땅 사이를 자기의 십자가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성인인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입으로 농사지은 것, 귀로 농사지은 것, 십자가로 농사지은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감사의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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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웅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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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그리스도 왕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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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을 시작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면서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마감하는 날 입니다. 오늘로 특별 희년이 끝난다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고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그 자비의 은총이 더 풍성히 자라나고 열매 맺도록 새롭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강론을 준비하다가 전, 현직 대통령들의 주요 공약을 다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약속들은 모두 국민들과 나라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내용이며, 그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이행 되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행복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더 사람답게 살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공적 약속들은 대부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자기들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모습과 자신들의 거짓과 잘못을 가리기에 급급한 세속 권력의 악한 모습을 바라보며, 과연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왕은 권력 혹은 모든 주권을 가진 권력자를 의미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치 세상의 권력자와 같은 악한 모습을 그리며 마음 속에 반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인간과 그 제도의 주권이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은 단순히 주님께서 세상의 권력자들보다 위에 계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으며, 교회의 신앙이 무엇을 선포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복음에서 지도자들, 군사들은 물론 십자가에 달린 죄수조차 예 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리며 말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혹은 유다인들의 왕이라면 자신을 구해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라는,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하늘의 권력을 사용하라는 유혹의 말들에 깊은 침묵으로 대응하십니다. 다만 자비를 청하는 다른 죄수 를 향해 당신의 자비와 구원을 베푸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상 제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 끝없는 사랑과 희생입니다.

동시에 이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라고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께 희망과 믿음을 두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시는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영예와 영광과 주권이 속해 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자비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죄의 근원, 곧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자 하는 욕심과 그 욕심을 감추는 악, 곧 온갖 거짓과 위선들 에 대항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불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거룩한 삶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사랑 그리고 정의를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이번 주간에 다시 한 번 새롭게, 거룩함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 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사랑과 자비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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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형민 안토니오 신부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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