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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독서와 복음 해설
조회수 | 251
작성일 | 21.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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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스바니야 예언서 3,14-18) 해설
하느님께서 우리 한가운데 능하신 구원자로 계시니 우리 마음은 기쁨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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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니야 예언서는 복된 미래를 그윽이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그 날이 오면 이방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들은 쓸려나가고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고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르며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우를 받으며 편히 쉬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은총과 호의를 드러내실 적에 그 위대하심에 기뻐하고 축제를 지내도록 초대받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특히 당신 백성 가운데서 주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현존하신다는 생각으로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라고 초대한다(참조. 이사 12,1-6). 이 기쁨과 환희는 장차 새로운 예루살렘 안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마음속에 넘칠 것이다(참조. 이사 54,1-5; 60,1-5; 62,3-5).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떨 필요가 없게 되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사랑을 새롭게 쏟으신 까닭에 평온함과 평화가 가득 찬 속에서 축제를 지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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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필리 4,4-7) 해설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께서 계시므로 기뻐하라고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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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4절): 사도 바오로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필리피 신자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필리피 신자공동체 안에서 당신 업적을 펼치셨기 때문이다(1,4-5.25;2,16-18;4,1).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도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업적 때문에 기뻐하고 춤추라고 초대한다. 이 기쁨이야말로 메시아 시대의 특징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5-7절): 바오로는 또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한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온 데 그치지 않고 주님 자신이 당신께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6절).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뜻은 시간이 없다거나 아니면 여유가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매 순간마다 모든 사람의 생활 가운데서 활동하고 계신다.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모시고 마음 든든한 평화와 기쁨을 느껴야 한다.

평화와 기쁨은 옳은 일을 실천하고 실행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진실과 정의를 마음속에 굳게 간직하고 실행에 옮길 때에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참된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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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루카 3,10-18)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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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고하면서 각자 자기 생활을 변혁시켜 진심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10-14절): 세례자 요한은 생활을 바꿔 회개하는 세례를 설파했다. 마음으로 회개했으면 반드시 회개한 사람다운 행실을 보여야 한다(8절). 그의 거친 외침은 사회 각계각층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자기 직책과 신분에 알맞은 권고를 받는다. 요한은 그들에게 생활 자체를 바꾸라고 촉구한다. 요한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지 말라고 촉구한다.

메시아가 오신다고 예고한다(15-18절): 모두 사람이 혹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자기는 오로지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선언할 뿐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베푸시어 사람의 마음과 영과 혼을 속속들이 깨끗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당신 초대를 받아들이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을 심판하리라고,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가려내어,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들의 전통에 따라(아모 9,9-12; 이사 44,3; 에제 36,25-27 등) 메시아의 나라가 오리라고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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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맛보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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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 전례는 특히 기쁨을 나타내는 전례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의 첫째 독서는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아 환희에 넘치는 사람과 백성의 기쁨만을 말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당신 백성을 보고 환희에 넘쳐 기뻐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18절). 하느님께서는 단지 ‘구원하시는 용사’로서 당신 백성 가운데 거처하시는 승리자이실 뿐 아니라 당신 사랑으로써 예루살렘을 새롭게 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당신 생명을 보고서 환호하는 신랑이시다.

화답송과 제2독서는 또 다시 우리에게 사람이 기뻐할 수 있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되며 가장 심오한 원천이신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고 춤추라고 권한다.

오늘 복음도 일단 회개하라는 복음이지만 회개를 통하여 참되고 오래 가는 기쁨을 얻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스바니야서에 의한 제1독서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서 이루신 정화사업과 구원업적을 두고 환성을 올리는 것처럼, 오늘 복음도 회개하여 깨끗해진 당신 백성을 주님께서 기쁨으로 인도하려 하신다고 말한다.

당신 백성을 위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성경적 계시 전체가 오늘 읽은 스바니야서 몇 구절에 가장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사람이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자기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으며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서 당신 기쁨을 느끼고, 기뻐하시며 환성을 올리신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이 보인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고자 터뜨리신 분노도 체험했으며, 마침내 구원받은 당신 백성을 두고 환희를 느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적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백성들의 행복만이 아니라(15절), 또한 자기를 악과 두려움과 파탄에서 늘 구해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예루살렘의 기쁨만이 아니라(16-17ㄱ절), 하느님 자신의 기쁨, 신랑과 신부를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의 축제, 또한 신랑과 신부가 함께 맛보는 혼인 잔치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의 신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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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비유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오늘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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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백성에게 자기보다 훨씬 훌륭하고 강한 분이 와서(15절),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예고한다(16절). 인류가 마음속으로 늘 고대하고 있는 분, 자기를 속박으로부터 구출해 줄 가장 강력한 분이 오면 인류를 당신 사랑으로써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우리를 당신께 이끌어 하느님 아버지의 똑같이 귀중한 자녀로 만들어 주신다.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시기에 동시에 그 사람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하느님, 태워 집어삼키는 불같은 하느님(신명 4,24)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즉 우리를 영원한 사랑 속에 잠기게 하실 것이다. 그 영원한 사랑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들여보내 태워 버리는 불과 같다. 거룩하게 하는 불같으신 성령 속에 잠기지 않고서는 결코 강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다가설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다.

인류가 자기 신랑과 만나고 그 만남이 가득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땅 위에 오시어 우리 안에서 정화작업을 해야 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군중에게 행한 설교와 세례는 하느님 홀로 이루어 주실 수 있는 세례와 정화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게 된 것이다. 그분은 죄지은 인류를 깨끗하게 하며 당신의 빛나는 신부로 만들고 순결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 주어 하느님 자신의 영광으로 감싸 주신다(참조. 묵시 19,7-8; 21,9-11).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 날뛰는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신다고 선포하는 자기 사명을 수행한다. ‘신랑’에게 길을 열어 놓은 다음 자기는 사라지겠지만, 신랑은 세상 속으로 오시어 당신 사랑으로써 인류를 정복하여 당신 백성으로 삼고, 인류를 당신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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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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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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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말은 천둥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질타하며 회개를 권고하고 세례를 베푸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합니다. 자신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르 6, 18)라고 당당하게 지적하던 요한을 헤로데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는(6, 20)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요한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군중이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 3, 10) 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답과 같습니다.(마르 10, 17 – 27과 병행구절)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문제를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나누는 것’ 을 강조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문제에서 세리와 군인들로 당시 지배계층의 문제를 암시하며 구체적 사안으로 넘어갑니다.

구원의 길은 세리들한테도 열려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를 요구하는 요한의 말을 받아들이고 삶의 태도를 바꾸고자 합니다. 세리들이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루카 3, 12) 요한을 ‘스승님’ 이라고 부르는 이 물음에서 요한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13절) 그들은 때로 지배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동족에게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요한은 그들이 직업을 이용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합니다.

이제 군인들이 요한에게 옵니다.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14절) 곧 폭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강탈하거나 허위 명목으로 갈취하지 말고, 할당된 임금에 만족하라는 것이지요. 세리들에게 주어진 대답과 일맥상통합니다. 지위와 힘을 악용해 힘없는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 주어진 정당한 대가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세리와 군인들에 대한 요한의 대답에는 기존제도를 인정하면서 직권남용에 따른 부정과 착취를 금지하는 공통점이 엿보입니다. 이 요한의 대답에는 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짖던 ‘정의와 공평’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에도(9절), 요한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리와 군인들에게 그들의 직업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특별한 금욕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 …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 (미카 6, 6 – 7) 하고 묻는 백성에게 미카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아, …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 (6, 8)

이야기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 으로 넘어갑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팔레스티나 지역의 외국 통치세력 밑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국을 재건하고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시켜 줄 ‘메시아(기름부음받은이)’ 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요한의 선포는 사람들의 이러한 희망을 더욱 강화했고,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이 혹시 우리가 기다려 온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결코 그 선을 뛰어넘는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1, 20)에서처럼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부인하는 표현이 이곳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분을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심판하실 분’ 이라고 묘사하며 자신과 메시아의 모습을 대조시켜 설명합니다. 요한은 ‘그분보다 작고’, ‘물로 세례를 주며’, ‘심판을 예고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자신이 메시아인 양 행세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 놔둘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고 칭송하셨습니다.(루카 7, 28)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고 그대로 실천한 사람 요한 !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한 사람, 요한 ! ‘세례자’ 이면서 ‘선구자’ 인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며 그분에 관한 ‘기쁜 소식’ 을 전했습니다.(루카 3, 18)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스바 3, 14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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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위원 강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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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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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는 온통 기쁨을 알리는 표징과 말씀들입니다. 제대와 대림환의 초도 제의 색상도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도 그렇습니다. 그냥 기쁜 것이 아니라 두 손을 쳐들고 환호하며 춤추는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사랑으로 나를 새롭게 하고, 그분 또한 나 때문에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1독서, 17절) 그리고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그 신발의 의미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원인을 더 깊이 해줍니다.

복음의 전반부(10-14절)는 기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 말하는 요한 세례자의 선포에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군중들도 세리들도 군사들도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다는 것은 요한의 선포를 듣고 마음에 무엇인가 와 닿았다는 뜻입니다. 변화를 위한 자유로움이 그들 마음에 생긴 것입니다. 답변에 나선 요한은 특별한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상의 변화, 곧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변화를 말할 뿐입니다.

옷도 먹을 것도 현재 자신의 것을 제외하고는 가지지 못한 이와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자신의 것에 만족하고, 베푸는 삶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선포입니다. 이는 선을 향한 자유의지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불의하고 부조리한 것은 부의 분배가 균형을 잃었고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삶을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루카 복음의 특징이 잘 드러난 부분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하늘을 향한 수덕생활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지상의 가난함에 향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유한 것에 만족할 수 없어 더 많은 것을 추구한다면, 더 갖고 싶은 욕망에서 타자의 것을 자기 것으로 탐낸다면 자신의 욕망이 결국 자신의 참 기쁨을 앗아갈 것입니다. 자신의 몫보다 더 취하지 않고 가진 것에서 기쁨을 누리는 요한의 모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요한 세례자의 말을 듣고 혹시 그가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에 차 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16절)라고 고백합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신발의 상징적인 의미를 인간과 신적 일치로 설명합니다. 요한은 인간과 신이 만나 일치를 이루는 자리에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이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오시는 그분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것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신발을 벗기기 위해 선재 되어야 할 끈을 푸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발의 또 다른 신비적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요한 3,29)이고, 자신은 신부의 친구가 아닌 신랑의 친구로서 기쁨에 넘친다고 말합니다. 신발은 혼인 잔치에서 신랑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 누구도 신랑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그분만이 신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발 끈을 풀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신발을 벗겨주는 봉사 행위를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신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권리도 자격도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키는 요한 세례자의 기쁨에 넘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신랑은 하늘의 권리를 지니고 땅의 신부를 찾아오시는 분이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새롭게 다시 세우는 분입니다. 지금 신부(우리 각자)는 그 신랑과 나누게 될 기쁨과 사랑으로 흥분되어 초조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신구약 모두에 계시된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고 계약을 맺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자 원하신 분입니다. 이제 성자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혼인’이라는 형상에 든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고 신부에게 함께 할 것을 초대합니다. ‘혼인’의 형상에 든 질료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혼인의 내적 길은 ‘완전한 기쁨, 완전한 행복’을 향하는, 곧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사랑의 특징은 주인과 종, 명령과 복종의 형식이 아니라, 부르심(이끔)과 응답(끌림)으로 형성되는 인격적인 친교입니다. 신랑-신부는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탁월한 스스로의 선택과 자유를 통해 상호 내어줌과 받아들이는 인격들간의 친교를 나누는 일치, 곧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한 몸은 한 쪽이 없어지거나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선을 향한 같은 지향에서 얻어지게 됩니다.

왜 우리를 부르시고 계약을 맺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셨는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랑이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신부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준 그리스도 사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매일 일어납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로, 신부와 일치하는 신랑의 혼인적 속성으로,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언어로 신부에게 옵니다. 신뢰에 바탕을 둔 희망과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요 전혀 단식할 필요가 없는 기쁨이 넘치는 잔치입니다.(마르 2,18-20; 마태 9,15; 루카 5,33-35)

이 사랑은 자신들에게 머물지 않고 더 큰 것을 갈망하게 하고 나를 변화시킵니다. 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합니다. 사랑 그 자체의 역동성이 확산되고 누구로 살 것인지 응답을 선택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2독서, 5절) 우리의 자선이 세상의 자선과 다른 이유가 여기 나타납니다. 단순히 나눔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사랑으로 열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열고 나간 나의 모습에서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그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이 시간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겠습니다. 목동들도 동방박사들도 만나기 위해 습관에 젖어있던 자신의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가난한 베들레헴 말구유였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낮은 곳이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의 만남이 인간의 갈망을 채우고 기뻐 춤추게 합니다. 자신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성탄이 나에게 준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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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숙 막시마 선교사
가톨릭신문 2018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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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항상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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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필립 4,4)라는 기뻐해야 하는 내용이 두 독서에서 강조되고 있고 복음에서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루가 3,10)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는 세례자 요한의 권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하느님은 마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복음을 선포”(루가 3,18절)하고 있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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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스바니야 에언서 3,14-17
주님께서 너를 보고 기뻐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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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서는 이미 기쁨의 분위기로 들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쇄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원수인 사탄에게 끌려가 죄의 노예생활을 하던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전(예루살렘)인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오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고 하였다. 이같이 우리에게 오신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시고’ ‘원수들을 쫓아내시어’(15절)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17절). 그리고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분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하고 있다(마태 1,21).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항구히 당신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데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입증된다. 바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더 훌륭한 분에 대해 말하고 그분의 오심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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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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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서는 기쁨이라는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으나,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한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16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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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필리피서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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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쁨이라는 주제는 2독서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리고 여기에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5절)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우리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뢸 때”(6절),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정신적 긴장과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육체의 본능적 거부반응을 진정시켜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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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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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은 “기쁨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두 독서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기쁨’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구원은 크나큰 희망과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가까이 다가오는 구원을 맞아들이기 위해, 죄와 잘못에서 회개하고 또한 그 회개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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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독서 : 스바니야 예언서 3장 14절-18ㄱ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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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독서에서 예언자 스바니야는 해방을 위한 전쟁을 치르는 어두운 날들에 백성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스바니야는 이미 구원을 보고 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을 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온은 두려워 말고 기운을 내라고 합니다. 그를 구해 내신 용사이신 주 하느님께서 시온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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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독서 : 필리피서 4장 4절-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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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확신은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둘째 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이러한 말씀은 어려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시며,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참다운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며 평온함과 기쁨 속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요 우리의 참다운 희망과 기쁨입니다. 대림절은 바로 이것을 기다리며 희망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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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 : 루카 3장 10절-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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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세례자 요한은 다가오는 구원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와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에 대한 군중의 반응은 즉각적었습니다. 무리들 중에는 요한의 회개의 선포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합니다.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 안에서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립니다.

(1) 군중에게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다가오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요한에게 묻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합니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일교차가 심하기 때문에 밤의 추위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겉옷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탈출기에서는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22,25-26)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은 겉옷이나 옷을 “두 벌” 가지고 있는 경우에, 그것을 못 가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음식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여유가 있는 음식물을 굶주린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나눔을 실천하라고 요구한 것이 분명합니다. 여분의 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고 자선을 실천하라는 요구입니다. 회개의 표시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세리들에게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요구합니다.

세리들은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심지어 “죄인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각종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위탁받았는데,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갈취하곤 했습니다(마르 2,14-17 참조). 그들은 세금을 더 많이 걷어 일정량을 착복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 세리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금 관계 등의 일로 그들의 압제자인 로마 사람들과 접촉했기에, 이로 인해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마태 11,19), 요한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사회 제도 자체를 전복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폐단은 개인의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세리들의 부정직한 행위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의 요구는 그들이 지위를 남용하거나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지나친 과세를 하지 말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세리들에게 구체적으로 솔직함과 정의를 요구한 것입니다.

(3) 군사들에게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 당시 군인들은 무력으로 남의 것을 갈취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군사”란 로마 군인이 아니라 국내 정세를 담당하는 유대의 군인들을 뜻합니다. 이 군사들은 업무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소지가 많았는데, 예컨대, 그들은 세리들의 징세 업무를 도와 수탈하는 경우입니다.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라.”는 말 자체는, 당시의 군사들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당시의 군사들은 월급이 적어 생계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들의 부정은 갈수록 심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압적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강탈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따라서 군사들에게도 역시 요구되는 바는 정의롭고 솔직함을 실천하는 회개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이 각 집단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선을 위해 일을 해야지 악을 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로 세 무리의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진정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사랑과 정의의 실천은 각자가 처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맺혀져야 할 회개의 열매들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그룹에게 각자가 처한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회개란 생각이나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군중에게 다가오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회개했다는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는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습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새로 태어남을 뜻합니다. 또한 그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회개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 오늘의 실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오시며,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참 ‘기쁨’과 ‘위로’와 ‘평화’의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그분을 믿고 따르며 평온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어 함께하여 주시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 구원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기쁨 속에서 대림절을 지내야 하겠지만, 또한 ‘구체적인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군중처럼 우리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삶을 개선해야 합니다. 요한이 당시 사람들에게 요구한 사항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나눔과 베풂과 자선, 솔직함과 공평과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하며 어려운 사람들은 더욱 어려워지고, 착취와 부정이 여전하고, 권력과 돈을 가진 자가 떵떵거립니다. 요한의 선포는 오늘날에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들의 올바른 물질관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재물은 축적을 목표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사용하고 남은 몫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될 때 그 재물은 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마태 25,31-46; 1티모 6,18; 야고 2,14-16).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며 구체적인 실천해야 함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모든 회개의 출발점을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 각자는 실생활 안에서 ‘사회정의’와 ‘나눔’과 ‘공존’과 ‘사랑’이라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회개를 실천 때에 비로소 다가오는 구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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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광호 베드로 신부
2021년 12월 12일
  |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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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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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제대에 초가 세 개 켜져 있습니다. 첫주에는 자주색, 둘째 주에는 연보라, 그리고 오늘 장밋빛의 초에 불을 켜져 있습니다. 대림초의 불빛이 더욱 강해지고 밝아졌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성탄하실 때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제는 또한 장미색 제의를 입고 있습니다. 사제가 장미색 제의를 입는 건 오늘 대림 제3주일과 사순 제4주일 이렇게 1년에 딱 두 번뿐입니다.

저는 유학하다가 들어와 서품을 받았기에 새 신부 때에 흰색 제의 한 벌 밖에 없었고 장미색 제의가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전례를 잘 아시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제의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그 분은 자주 입지 않더라도 있어야 할 것은 있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1년에 두 번씩 장미색 제의를 입게 되었지만 작년에는 시골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입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입게 될지...

대림시기는 지향하는 목표의 꼭짓점이 있고 보속과 희생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사순시기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대림시기는 성탄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준비하고 기도와 희생과 자선을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사제가 고운 장밋빛 제의를 입는다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대림 제3주일에 분홍 장미색의 초가 켜지고 사제가 좀 칙칙하게 보이는 보라색 제의 대신에 산뜻한 장미색 제의를 7입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뻐하는 의미도 있고 이제 성탄을 목전에 두고 깔딱 고개에서 좀 쉬어가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대림 3주는 기다림의 긴 터널을 절반 넘게 지나고 있는 셈이고, 주님께서 이미 많이 가까이 오심에 대해 희망하고 기뻐하는 기쁨과 희망의 주간입니다. 오늘은 곧 도착하는 광명의 빛을 선취하여 파편적으로 이미 와 있는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기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장미색의 초가 켜지고 사제가 아름다운 장미색 제의를 입은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적으로 기분 좋게 지내는 날입니다. 미사 마치고 점심도 맛있는 것 드시고 한 잔 하셔도 좋겠습니다. 부활에 가깝게 도달한 사순 제4주에 장미색 제의를 입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제도 오늘 화려한 색상의 장미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절제와 속죄, 기도와 자선을 하는 것이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기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울러 대림절 동안 계속 이어지는 긴 속죄 행위의 중간 휴식처럼 잠시 쉬면서 머지않아 아주 구체적으로 성취될 그 기다림을 기억하면서 기뻐하라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장밋빛 초를 켜고 장미색 영대와 제의를 입는 장미주일에 딱 맞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과 기쁨과 희망을 주는 분홍빛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는 자세로 기쁨을 강조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퉁쳐서 거칠하게 말하면 오늘 우리가 지내고 있는 분홍빛 장미주일에 딱 맞는 적합한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 입당송은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고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기도 역시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서에서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기쁨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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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 1독서는 스바니야 예언자의 말씀을 전합니다. 스바니야는 '야훼가 숨겨주다' 또는 '피신시켜 주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아몬의 아들 요시아 왕이 유다를 다스릴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성전 주위에 머물며 심판을 예고하고, 동시에 열심히 살려는 이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스바니야가 활동한 시대에는 우상숭배, 부정 부패 등도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신의 죄를 범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분명하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니야도 야훼의 뜻을 받들고 끝까지 남은 백성들에겐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는데 오늘 말씀이 바로 그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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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선포하십니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오늘 제1독서의 배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처지와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바로 이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두려움과 절망의 탄식에 빠져 한과 원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빠져 힘없이 손을 늘어뜨린 채 살고 있었습니다. 올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 그야말로 주님의 개입과 구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피투되어 몇몇을 빼곤 대개 다 흙수저를 쥐고 을(乙)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부조리의 상황을 피할 길 없고 그래서 부조리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오늘 성경의 표현대로 불행을 두려워하게 되고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게 됩니다. 칼 야스퍼서는 소위 한계상황에서 두려움 속에서 힘없이 손을 늘어뜨린 상태로 살아가는 인간의 슬픈 실존적인 상황에 관해 말합니다. 그에게 한계 상황이란 사람답게 사람살이를 열심히 영위하고자 하는 인간의 창조적이고 약동적인 선한의지를 파괴하여 손목의 맥이 풀리게 하는 몰이성적이고 몰상식적인 조건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주장에 의하면 부조리는 세상 살 맛을 잃게 하고 관계적 자살을 당하게 하여, 심한 경우에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하지 경우라고 해도 모멸감과 자괴감으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혹은 어떤 능동적인 일도 하지 못하는 아노미에 빠지게 합니다.

요즘 우리가 부조리한 현실에 던져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두렵고 힘이 없더라도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손목의 맥이 풀려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돋우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가 꺽인다 하더라도 주님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환성을 올리고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하는 대림절이 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해 주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 오늘 독서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용기와 희망과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스바비야는 환성을 울리고, 크게 소리치고.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기쁨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기뻐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도는 기뻐할 것을 거듭 권고하시고 오늘 전례 말씀은 기뻐할 것을 거듭 거듭 권고합니다. 계속해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장미주일에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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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라고 할 때 늘 즉 πάντοτε(pantote, 판토테)란 부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 always입니다. 이 단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주님께 청할 때도 활용된 부사 ‘판토테, 항상’입니다. 이것은 πάν+τοτε인데 판은 모든 것이란 의미이고 토테는 그때에란 뜻입니다. 판토테는 필요한 그 때의 모든 순간의 시간 혹은 매사를 행하는 그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매사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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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환호성은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셨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기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신분에 따른 회개 생활(10-14절), 둘째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내용(15-1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는 내용입니다. 기쁜 소식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고 기쁨이 오늘 복음의 최종 결론입니다. 오늘 대림 제3주는 기쁨의 주입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지금까지 오늘은 기쁨의 주일이라는 점을 먼저 강조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인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자 요한의 예고 혹은 증언에 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성서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에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들었는가? 왜 각개 각층의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는가? 한 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이 몰린 이유는 요한이 죄의 용서를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더 많이 몰렸습니다. 그 당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정결의례를 치루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죄를 용서받는 통로가 죄인들에게는 거의 막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복음에 세리가 나오는데 그 당시 요즘도 마찬가집니다만 세리는 부정을 많이 저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앞잡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인상도 각인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상 세리하면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가 만일 깨끗해지자면 먼저 자신의 직업을 버려야 하고 유다교가 정하는 참회, 정화, 보속의 절차를 거쳐야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손해를 끼친 모든 사람에게 그 액수에다 1/5을 더 가산해서 보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창녀인 경우에도 먼저 자신의 직업을 버려야 하고 또 돈을 들려 정결예식을 해야하는데 나쁜 방법으로 번 창녀의 더러운 돈이 사용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이 등장하여 세례를 받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니 사람이 안 몰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서전체라는 문맥안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에게 사람이 몰린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절실히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은 요한의 획기적인 가르침과 활동을 보고 그를 메시아로 착각했든지 아니면 요한의 선포대로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기 위해서였든지 간에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혹시 요한이 오기로 되어 있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몰려온 사람들의 의도는 어떠했든지 간에 요한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준비비시키는 사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요한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과 부르심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견지망월(見指忘月)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때가 왔을 때,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습니다.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갑니다.(요한 1,35-37)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자 요한 예언자에 관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요한은 소리이고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요한은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보았습니다.
자신은 등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교만의 바람으로 그 둥불을 꺼버리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 11:11)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그는 겸손되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리고 장차 곧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자신과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고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곡간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정확히 알고 있던 요한의 가르침은 거침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포괄하고 있는 컨텍스트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먼저 요한은 군중들에게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오"(루가 3,9)라고 이미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에 따라 백성들은 군중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고 대답하는 장면이 오늘 복음의 전반부를 구성합니다. 이는 "어떻게 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로는 군중과 세리와 군인들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주인공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한 마디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지배계층의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군중과 세리와 군인은 세례자 요한에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실존 태도에 대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하고 묻고, 요한은 자신들의 신원(Lidentité)에서 나오는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합니다. 요한은 이들과의 대화에서“회개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답합니다.

먼저 일반 군중이 요한에게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묻자 요한은 자선과 나눔을 강조하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외친 것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여분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옷과 먹을 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과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자를 뜻합니다. 여분의 옷이나 음식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무언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원죄에 물든 탐욕의 중생은 그저 자기 것만 끝까지 움켜쥐고 삽니다. 그리고 그 좁고 답답한 '골짜기 인생'에서 결코 벗어 날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나누고 베푸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회개한 사람이라면 꼭 맺게 되는 대표적인 현상이고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군중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으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군중들 다음에는 세리들이 와서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세리의 정체성에 맞는 정의와 공정을 요구합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당시 세리들이 정해진 것 이상의 세금을 착취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할당된 세금액에 자신의 몫을 더하여 동족을 착취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각 지역에 세리들을 임명할 때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그것은 세금징수를 위해 외주를 주는 제도입니다. 당국은 세리가 되고 싶은 사람을 공개로 모집합니다. 그 중에서 자기 배당 지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겠다고 입찰하는 사람이 세리로 임명됩니다. 그리하여 임명된 세리는 그 지역의 세금은 자기 마음대로 정합니다.

로마의 세금이 실제로 얼마인지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기에, 백성들은 세리가 그들에게 부과한 금액대로 얼마라도 납부해야 합니다. 따라서 당시 세리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착복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정부 관리들에게 두둑한 이익을 보장하지 않고 그 계약을 따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거둔 것 중에 로마 정부에 약속한 액수를 내면 나머지는 세리의 자신의 몫이 됩니다. 그러니 한번 세리가 되면 공권력을 등에 업고 돈을 엄청나게 모을 수 있고 자연히 고액의 세금 징수가 되었고 백성들의 허리는 휘청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세리들의 改過不吝(개과불인) 즉 세금 징수에 있어 발생하는 과오를 고치는 데는 인색하지 말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세리들을 가리켜 정한 세금과 그에 합당한 수수료에 해당할만한 액수 이상의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세리들에 이어서 군사들도 또한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역시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군인의 신분에 맞는 지침을 제시합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은 당시 군인들이 봉급으로 만족하지 않고 강탈하고 갈취하며 살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군인은 실질적인 무장을 갖춘 힘있는 자들의 대명사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군인들은 폭행과 착취를 허락받은 받은 사람들처럼 행세했습니다. 군인들은 실제 무기를 갖고 있는 공권력이므로 일반 사람을 위협하거나 협박할 수 있었습니다. 군인이란 육체적으로 고되고 위험한 직종이면서도 월급은 적은 직장입니다. 자연히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강요하여 부당한 부수입을 갈취하고자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군인들에게 비록 받는 보수에 비하여 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늘 만족하면서 살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군인들의 개과자신(改過自新)을 요구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부당이익의 유혹에서 벗어나 자신의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역시 신분에 맞는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각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고유성에 때라 그들이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세리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고 말한 것이나 군인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한 것은 조직적인 반칙과 불공정이 깊이 뿌리내린 직업인에게 매우 극단적인 말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세리나 군인이라는 직업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 삶 속에서 열매들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그 열매란 그 이전까지의 생활 전체를 통째로 뒤바꾸는 것이긴 하지만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많이 주어졌을때 여분의 재화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바로 회개한 자가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그리고 완장을 차게 되었을 때 힘이나 권위를 그것을 내 욕심 위해 부당하게 오용하거나 갑질을 하지 않는 것 등이 바로 기초 상식에 입각한 회개의 현실적인 열매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아니 그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든지, 그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바로 자기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의 현장 바로 그 안에서 각자의 신분과 고유한 정체성 걸맞게 이런 회개의 구체적인 열매들이 하나씩 둘씩 맺어지게 되는 것이 참된 회개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거의 비슷한 질문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군중은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고, 세리들도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하고, 군사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군사들에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온 군중, 세리, 군인에게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에게 가난한 자, 지위 없는 자, 힘없는 자들을 각별히 돌보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 역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요한의 구체적 가르침은 군중, 세리들, 군인들에 해당되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한정되지만 사실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군중에게 한 가르침은 성탄을 앞에 두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년 교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을 ‘자선의 날’로 선정하여 보다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강조합니다.

자선(Charity)이라는 영어 단어는 체다카(צדקה, tzedakah)란 유대 개념을 번역하기 위한 단어로 쓰입니다. 그러나 체다카는 ‘사랑’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에서 기원되는 ‘자선’이란 문자적 의미와 어느 정도 구별됩니다.

체다카의 유대적 의미는
‘정의(Justice)' 혹은
‘정의롭게 하는 것(the act of justicing)’에 더 가깝습니다.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 원래 히브리어에는
‘남에게 베풀다’라는 뜻으로 자선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의미로 체다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오늘날 자선을 의미하는 카리타스라는 단어로 번역하였고,
이 카리타스를 오늘날 자선
혹은 애덕, 사랑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체다카라는 기표는
해야 하는 당연한 행위 혹은 의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기부를 위한 저금통도 체다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 가정에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적은 돈을 저금통에 모으는 습관이 전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금통이 가득 차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맛있는 것을 사 먹거나
옷이나 다른 물건을 사는 데 요긴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금으로 기부합니다.

제주시에 있는 빵집 체인인 어느 한 ‘파리 바게트’에서는 가게 문을 닫을 때가 되면 5000원에 10000원어치 이상의 빵을 한 봉지에 넣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술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마을의 시장에서는 오후가 되면 상인들이 팔던 물건의 한 부분을 한쪽으로 떼어놓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타임세일' '반액세일'의 용도가 아니라 체다카 정신에 따라 그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게 한 배려입니다.

체다카의 신학적 원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100만원을 주었다고 할 때
그에게 그것을 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돈을 받을 자격이나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의가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선이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에서는 정의와 자선이 구별되지 않고
체다카라고 해서 한 가지입니다.
재화의 절대적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다면
상대에게 줄 의무가 있는 정의와
우리의 관대함에서 기인하는 자선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물의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지는 분은
창조주 하느님이시고 인간에게는 이런 소유권이 없고
인간은 그저 관리인이기에
엄격한 의미에서는 법적인 정의와 동정심에서 나오는 자선이 일치됩니다.
개인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 소유권이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보관하거나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은 필요보다 적게 소유한 사람에게 여분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말하는 체다카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7년 마다 빚을 탕감하게 하고,
7년의 종살이 후에는 자유를 주고,
농부는 밭 한 모퉁이의 추수를 남겨 두도록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체다카에도 일정한 제한이 있습니다.
자기 수입의 어느 일정한도 이상을 자선에 내놓는 일은
계율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여유있는 사람의 경우 5분의 1정도가 허용되고,
보통 가정의 경우 10분의 1까지 허용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덜 내게 되고 더 어려운 사람이 받게됩니다.

유대교 랍비 예후다는 체다카 정신에 대해 예찬합니다.
“돌은 딱딱하나 쇠가 그 돌을 자르고,
쇠가 강하다 하나 불이 그 강함을 녹인다.
불은 강력하나 물이 불을 끄고,
물은 무겁기는 하나 구름이 물을 나른다.
구름은 강하나 바람이 이를 흩트리고,
바람은 강하나 우리 육체는 이를 견디어낸다.
육체는 강하나 두려움이 이를 파괴하고,
두려움은 강하나 포도주는 두려움을 피하게 하고,
포도주는 강하나 잠이 정복한다.
죽음은 이러한 것 중 가장 강하나 체다카는 죽음에서 구한다.“

이 예찬을 통해 랍비 예후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체다카는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이
다 잘 알고 있던 바로 이 체다카의 정신을 다시 한번 일깨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예수님에 의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통합됩니다.

자선활동은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의도에서
자기들의 재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부자들이 자기과시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나오는 행위 역시 아니어야 합니다.

자선활동은 자선을 베푸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합니다.
자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증명해 주는 하느님의 행위를 본받는 것이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자선이 됩니다.
즉 자기가 선행을 하면서도 자기의 선행을 보지 않는 것이 참된 선행입니다. 사실 선행은 오른 손도 왼 손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는 돌에 새기고 베푼 자선은 물에 새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풀고 살면 손해 본다는 이야기를 잘 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손해와 이익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이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마태오 6,7∼21참조).
땅에 쌓으면 좀먹거나 녹슬어서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훔쳐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에 쌓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됩니다.
땅에 쌓은 것은 아무리 쌓아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선은 향수를 뿌리는 일입니다.
자선은 남을 행복하게 해 주면서 자신에게도 몇 방울 정도는 묻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고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우선 자기가 가진 것들
(능력, 재능, 시간, 재물)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구체적인 자선활동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자선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사회복지기관 및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밀알회, 릴리회, 요양병원...). 우리는 이러한 기관이나 시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생각으로만 해야 하겠다고 여긴 분들과 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던 분들은 이러한 교회의 뜻을 따라 정성된 헌금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길모퉁이에 앉아 있는 거지를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형제 중에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늘 같이 있는 사람은 제쳐두고
먼 곳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곳을 소홀히 하면 형식적인 행사가 됩니다.
인생의 기초관계는 가까운 사람들이 아닙니까?

교회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오늘을 자선의 날로 정했습니다.

근본적으로 기초신학의 관점에서 성탄과 관련해서 체다카에 관해 생각해보면 모든 자선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무한하게 부유하신 하느님께서 완전히 자신을 벗어버리고 비천한 인성을 취하셔서 세상에 오신 육화에서 출발합니다.

자선의 출발은 객사의 방도 얻지 못하고
외딴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가난하게 세상에 오시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어 풍요롭게 함이 체다카 자선의 참 의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자선주일을 맞아 우리는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참된 회개는 생각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림기간 동안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회개의 표지가 체다카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겠습니다.
우리가 얻는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많은 선행과 희생, 고통을 통하여
또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가진 것을 나눌 때,
즉 그러한 희생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봉사할 때
우리의 삶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할 것이고,
그럴 때 기쁨과 평화가 깃들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즐거운 성탄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장미주일 우리 모두에게 기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장미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맛있는 것 먹고
기쁜 마음으로(laeto animo)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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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1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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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은 전통적으로
‘기쁨의 주일(Domenica gaudete, Laetare Sunday,
혹은 Rejoice Sunday, Sunday of rejoicing)’ 등으로 부른다.

이는 직접적으로 오늘 제2독서인 필리피서에서 취한 입당송이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입당송, 제1독서, 화답송, 그리고 제2독서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전례는 ‘기쁨’이라는 주제어로 관통되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고통 중에 살면서도 기쁨 중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살면서 기뻐한다. 하느님의 평화 안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슬픔과 어려움을 함께 슬퍼하시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시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시는 기쁨은 그리스도인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어지거나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생기는 열매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가까이 있을 때 얻어지는 열매들이다.

바야흐로 대림절의 절반을 넘기는 전례력의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찾아오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 와 계신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기쁨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신원을 확인시켜 준다.

1. “요한…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루카 3,10-18 침조)

지난주 복음(루카 3,1-6)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소명과 그의 사명에 관해 들려주었다. 여느 예언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살고 있던)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기에게 내린 말씀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사셨다.”(요한 1,14)라는 사실을 자기 제자들에게 가리키고자 했다.

세례자 요한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 말씀이 내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말씀 자체이심을 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하려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루카 3,3) 한다.

과연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통해서 선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온 역사를 통해 특별하고도 유일한 사건을 선포하고자 했다.

사람들 가운데에 사람으로 계신 하느님이시므로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진정으로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에 임하시도록 가르쳐 줄 선생(세례자 요한)과 형제들의 공동체(세례자 요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성모님과 요셉에게서 교육을 받으시면서 일정 기간 ‘숨겨진 시기’가 예수님에게 필요했듯이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자기의 사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그런 시기가 필요했다. 인생 자체가 평범한 매일 단순함의 연속이듯이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설교를 통해 요구한 것은 평범한 일상의 단순함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맞이하기 위하여 특별한 제물이나 희생을 바치거나 성전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전례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단식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인간적이고 또 인간적인 내용만을 요구했다.

2.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18 침조)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 “군중이 그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3,10)

역사와 세대를 거듭하면서 사람들이 항상 갖는 질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군중에게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한다.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여 생필품과 음식, 의복, 주거(의식주)를 나누라 한다. 주님의 오심에 맞추어 회심하고 회개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표시를 그렇게 행하라 한다.

오늘날 교회가 대림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전례를 준비하고 9일 기도를 바치며 여러 장식과 신심업 등으로 준비하라고 하는 것과는 대비를 이룬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요구하는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은 정작 ‘의식주’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의 것을 나누기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예수님과의 진실한 만남으로 회개가 이루어지며 회개한 이는 자기가 가진 것을 흔쾌히 나눈다. 자캐오는 주님을 만나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놓는다. 그렇게 하여 자캐오의 집에 “구원이 내렸다.”(참조. 루카 19,1-10)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유다인들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2,44;4,32) 그래서 그들 중에는 아무도 가난한 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주 우리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걱정한다.

그렇지만 복음은 우리 집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하며 나눌 것을 당부한다. 나누면 우리가 깨끗해지고 곧은 마음이 된다.

군중에게 이렇게 말한 다음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찾아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2.14) 하며 똑같은 질문을 한다. “세리”와 “군사들”이다. “세리”는 로마 제국의 권력에 빌붙어 동족이나 이방인들을 자주 접해야 하는 이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세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 직업을 그만두라고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 하며 그저 정의롭게 살라 한다. 세금을 징수하면서 자칫 세금 낼 능력이 없는 이들을 다그치느라 사나워지기 쉽고, 또 웃돈을 얹어 자기 몫을 과하게 챙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세리들에게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한다.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대림절을 지내는 우리는 우리의 인간관계와 사업, 그리고 가정에서 과연 정직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예’ 할 것을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 하는 것이 진실한 믿음의 태도요 정의이다. 거룩한 믿음은 정직을 껴안는다.

어떤 힘도 없이 결국에는 자기들 손에 죽을 세례자 요한에게 “군사들”마저 매력을 느끼고 찾아와 같은 질문을 한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심지어) 은인이라 부르게 한다.”(루카 22,25) 하는 말씀대로 “군림”과 “권세”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군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 하고 이른다.

사회적 질서와 공존을 위한 자유를 보장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 한다.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위임된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면책권과 무기를 가진 자들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거짓을 쉽게 범할 우려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강탈”과 “갈취”를 하지 말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불완전한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다.(metanoia, that is, changing one’s imperfect way of thinking to the divine way of thinking and acting.) 자신의 안팎을 바꾸어 놓는 결단이다. 정의에 따르는 새로운 삶이다.

죄스러운 생활방식과의 결별이다.
요한은 질문에 대하여
① “나누어 주어라”(11절)
② “더 요구하지 마라”(13절)
③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라”(14절) 하고
처방하면서 그것이 회개라 한다.

3.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성령과 불로 세례를”(루카 3,10-18 침조)

세례자 요한은 일상생활 안에서 삶을 바꾸고 사람들 간에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하라는 회개를 설교하면서 이 회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큰)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루카 3,15) 이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18) 하는 말씀이나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다’라는 민간 신앙에 젖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즉시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루카 3,16) 하고 선포한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같은 세례이면서 연속성도 있지만, 다른 한편 차이도 있다. 두 세례 모두 죄로 말미암아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결정적인 세례를 위한 예시일 뿐이다. 요한의 세례는 단지 물에 잠기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불, 새로운 영, 하느님의 영에 잠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이 성령의 불 세례는 최종적으로 제자들의 공동체가 “새 계약”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오순절에 받게 될 성령으로 완성된다.(참조. 사도 2,1-11)

그 “새 계약은…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하신 그 계약,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에제 11,19) 하신 계약,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하신 바로 그 계약이요 새로운 영에 의한 계약이다.

성령의 불 세례를 언급한 세례자 요한은 성경에 따라 성경에 순명하면서 자기 뒤에 오실 그분께서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 3,17) 하면서 의로운 이들과 불의한 이들을 가리시는 심판자이심을 강조한다.

오늘 복음은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루카 3,18)로 끝난다. 세례자 요한이 이미 예수님과 같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대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시는 엄하신 심판자로서의 메시아로 활약하시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실수한 것일까?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8-19 마태 11,2-3) 하고 여쭈었다는 기록에 따라 세례자 요한이 뭔가 다른 환상을 가졌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 하느님께서 시간의 끝에 이르러서야 세례자 요한이 희망했던 의로움을 완성하실 것이다.

감옥에 갇혀 ‘모든 것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던 순간에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예수님과 자신의 소명에 믿음으로 온전히 순명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 참조. 마태 11,11) 하실 것이다.

대림시기 한가운데에 있는 오늘 전례에서 이 주일을 ‘가우데떼Gaudete(기뻐하라는 뜻)’ 주일이라 부른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바로 입당송 첫마디 말을 따라서 그렇게 부른다.
‘기뻐하라’는 초대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 4,4-5)라는 사도 바오로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기뻐해야 한다.
우리 생각에 더디 오시려니 싶어도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시고 곧 오실 것이니 기뻐해야 한다.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하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아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기쁨이며 미래이고 영원한 생명이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촉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주변 환경과 여건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슬픔은
오로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이유와 동기를 찾는다.
주님과의 관계가 원만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것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 슬퍼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문화 안에서는
기쁨이라는 것이 곧잘 나의 밖에 있는 것들로
어떤 조건이나 만족이 채워지는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의 기쁨은 하찮은 것들에 대한 질투와 시새움들을 동반한다.
또한, 영향력과 소유를 지향한다.
그리고 허전함과 공허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람들은 헛된 환상을 좇아 집착과
욕심으로 자신의 삶을 몰아가는 경향을 지녔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은 바로 이런 것들을 세속적이라 불렀고
세속이 주는 온갖 재미는
사실 헛된 기쁨일 뿐이라며 이를 피하고자
고독한 광야로 발길을 돌렸다.(재미는 기쁨이 아니다)
참다운 기쁨은 끊임없는 기도로
진정한 나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하는 데에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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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1년 12월 12일
  |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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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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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미덕이자 훈련입니다.”(미로슬바브 볼프)
성경 신학의 여러 주제 가운데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예일대 신학부의
‘기쁨의 신학과 좋은 삶’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책임자인데
인터뷰에서 기쁨이 왜 좋은 삶에 필요하고
오늘날 왜 기쁨의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기쁨은 사라지고 걱정으로 움츠러드는 상황에서
대림 제3주일과 자선 주일을 맞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주제인 ‘기쁨’은 우리와 하느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면서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다시 찾아 살아내도록 우리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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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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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3장 10-18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요한 세례자가 요구하는 회개의 표지들을 소개합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자신처럼 은둔자가 되라거나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삶의 자리, 일상생활에서 삶의 형태를 바꾸라고 권고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공감만 하지 말고
실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절제하며, 착취를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요한은 나아가 사람들에게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을 가리키며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심판하러 오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물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보다 20여 년 후 바오로는 로마 감옥에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무엇을 하라기보다 존재의 근본이 되는 자세, 곧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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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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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인 스바니야서에서 스바니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3,17)

이스라엘, 시온을 대상으로 한 신탁이지만 이런 표현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생의 투쟁 한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싸우고 사랑으로 우리를 쇄신시키는 분입니다.

의무나 계명을 강요하거나 우리가 가진 것이나
능력을 보고 평가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웃는다거나 기뻐한다는 표현은 성경에 드물게 나오는데
하느님은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걸어갈 때
그런 ‘나 때문에’ 기뻐서 환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화답송)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하느님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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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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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제2독서인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기뻐하라고 하는데 스바니야와는 동기가 다릅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와 함께 기뻐하다”라고 말하지
“누구 안에서 기뻐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바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하는데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존재,
곧 주님과의 일치를 사는 한도 안에서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쁨은 오로지 주 예수님과의 관계,
친교의 체험에 의해서만 탄생할 것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너그러움을 보이라”는 명령으로 발전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움을 보입니다.
‘너그러움’은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님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기뻐하지만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무례하고 오만하며
잔인한 사람들이 늘 있는 법입니다.

‘너그러움’은 폭력이나 무관용과 반대되는
지혜롭고 균형 잡힌 자세를 뜻합니다.

그런 자세는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은총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너그러움’은 공동체 지도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덕목입니다.
주님이 구세주로 하늘에서 오시어 공정하게 심판하리라는
기대와 신뢰를 가진 사람은 힘들고
적대적인 환경에서 온갖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모든 사람과 너그러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피서 4,6)라는 명령형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습관적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을 멈추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바오로는 어떤 것에 예외를 두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오로는 걱정으로 가는 과정을 단절하기 위해 기도에 집중하라고 권고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필리피서 4,6)는
기도 안에서 지녀야할 올바른 자세와 전망을 제공합니다.

바오로 자신도 감사 기도가 그의 기도 습관이었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에게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
그분에게 우리를 돌보아달라고 내어맡기는 것,
우리 근심이 그분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꾸로 감사의 부재는 우상숭배로 이끌고
현재나 미래에 힘든 일에 대해 불평하게 됩니다.

바오로가 투덜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하라고 한
명령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간구’, ‘여러분의 소원’같은 기도 용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는 말과 나란히 나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기도에서 감사가 모든 기도의 뿌리임을 알려줍니다.

바오로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친 후에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할 것임을 약속합니다.
기도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우애와 연대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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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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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여러 종류의 비관주의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다보면 어떤 종류의 포기, 체념, 슬픔, 고난, 상처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 인생, 공동체, 사회와 교회 전체에 대한 비관주의로 이어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내부와 외부에 우울하고 고립된 비관주의자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돌보고 연대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대로
“연대라는 말은 세속적인 정신을 멸시하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을 가져오는 언어입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연대하기 위해 세상에 가난하고 낮은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을 보내고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기쁨은 힘, 사랑, 기도, 평화입니다.
기쁨만이 영혼을 낚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주는 사람을 기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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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2021년 12월 12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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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회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삶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군중에게는 옷과 먹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라고 권하고, 세리에게는 정한 것만 징수하라고 말하며, 군인에게는 사람들을 협박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지 말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라고 타이릅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을 잘 지키라고 말하지도 않고, 성전에 십일조와 제물을 충실히 바치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모세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이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자각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분”(출애 33,19)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일을 사람이 실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지침입니다. 제물봉헌은 인간이 생산한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바치면서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의 소출을 새롭게 보고 이웃과 나누게 하는 상징적 의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골몰한 삶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군중과 세리와 군인이 삶을 바꾸는 구체적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식주(衣食住)만을 생각하지 않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선한 일을 실천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요한의 설교에는 다소 위협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분은...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와 같은 말씀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요한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복음 사이에 어떤 동질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하느님은 엄한 심판자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도, 성전에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고 인간과 함께 계시는 그분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실세인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대제관과 백성의 원로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에는 충실하지만,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도, 가련히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하는 세리와 창녀들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실천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가르침을 연장하여 발전시킨 것은 하느님 앞에 자기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가들과는 달리 요한은 하느님 앞에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취하여 발전시키셨습니다. 다만 요한이 엄하게 심판하실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고 계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자기 스스로를 자녀에게 내어주면서 삶을 가르칩니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로 삽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꽃을 보면서(마태 6,26-28)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지를 깨달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집착하여 삶의 은혜로움을 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삶의 잔치에 초대하신 분입니다.(루가 14,15-24 참조).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초대받아 태어났으며 세상의 삶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우는 이도, 고통당하는 이도, 굶주리고 헐벗은 이도 많습니다. 초대받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을 배우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데에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는 선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을 모범적으로 하셔서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십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의롭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의롭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만 바라보고 초대 받은 우리의 인생을 원망과 저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 살려놓으신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불행을 넘어서 은혜로움을 찾아 살라는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삶을 바꾸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바꾸되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생명에 초대받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주변을 보고, 우리의 삶을 초대받은 잔치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초대는 이웃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사력을 다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초대하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그분의 베풂에 참여하고 이웃에게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 안에 태어난 우리도 휩쓸려서 즐겨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는 삶에서 베풀고 용서하는 자비의 삶에로 옮겨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가르친 엄한 심판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으로 바꾸셨습니다. 베푸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우리의 삶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키고 바치는 데에 있지 않고 베풀고 용서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서도 우리의 삶이 지닌 은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세상이 아니지만, 어두운 우리의 삶을 기쁨과 너그러움으로 채색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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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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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자기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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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제1독서(스바니야 에언서 3장 14절-18ㄱ절)

기원전 7세기 중엽 활기찬 예언활동을 펼친 스바니야는 ‘주님의 날’을 새롭게 인식시켜 나간 대표적 예언자이다.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의 날, 환희의 날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경우 이 날은 저주의 날, 응벌의 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또한 이 응벌의 시기를 넘어 하느님은 회개한 당신 백성에게 새 생명을 주실 것이며, 새 이스라엘은 구원의 충만함 속에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 제2독서(필리피서 4장 4절-7절)

수인(囚人)의 몸으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죽음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했던 사도 바오로는 희망의 빛이 전혀 없어 보였던 감옥생활 속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결코 잃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이와 같은 자신의 사도적 모습을 필립비 공동체와 나누고자 한다.

주님이 곧 오신다는 믿음으로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도록 가르친다. 이러한 믿음만 간직할 수 있다면 공동체의 삶은 변화될 것이며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이다.

■ 복음(루카 3장 10절-18절)

이분이 혹시 오시기로 되어 있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 속에 자신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던 청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대단한 준비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처한 구체적 상황 또는 직업에 걸맞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상식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요한은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행위 속에서 장차 메시아가 이루실 보다 근원적인 새로움의 출발을 미리 내다본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는 옛 세상을 청산하고 새 세상을 여실 분이기 때문이다.

[새김]

■ 대림시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우선 차분함이 요구된다.
들뜬 마음으로 실천하지도 못할 요란한 계획을 잔뜩 세워
결국 이 은총의 시기를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을 철저하게 되돌아보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복음 속의 요한 세례자의 가르침대로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에서
과연 나는 진실함과 의로움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러하지 못함으로써 오시는 주님을
나처럼 열심히 기다리고 있는 우리 이웃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고 있는 못난 사람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다.

■ 대림시기를 사는 우리는 또한 기쁨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차분하게 나 자신을 둘러보고 정리할 수 있다면,
오시는 주님을 영접함에 있어 초조해 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주님은 어두움을 밝혀주시고 참 평화를 심어주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며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쳐 봉사하기 위해서,
악의 세력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원하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교우 여러분,
성실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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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건태 루카 신부
2021년 12월 12일
  |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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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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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루카 3장 10절-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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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답변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또는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라.”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은, “회개한다면 사랑을 실천하여라.”,
또는 “사랑 실천으로 회개를 완성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랑 실천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권고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하는 훈계입니다.
회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라는 말은,
“세금을 거둘 때 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만 하여라.”라는 뜻인데,
“권력으로 도둑질하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도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을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권력으로 강도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역시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장 8절).”

이 말은, 그가 참으로 진실하게 회개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변화입니다.
‘새로운 삶’은 회개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해서 깨끗해졌다면 그 ‘깨끗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새롭게 되었으면서도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베드로 2서 2장 20절-22절).”

이미 은총을 받은 상태에서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면서 지은 죄가 더 큰 죄입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장 15절-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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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라는 말은,
“내가 주는 세례는 회개의 표시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는 말은,
“메시아의 세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세례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라는 말은, 알곡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이 되고,
쭉정이 입장에서는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알곡이고,
아무 변화 없이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기를 원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또 그 기쁨을 얻어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목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지만(루카 2장 8절-20절 참조),
당시에 왕이었던 헤로데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마태오 2장 1절-18절 참조).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뵈려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직접 가려고 하지 않고,
처음에는 동방박사들만 보냈고, 그 다음에는 군인들만 보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직접 갈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은 그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왕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기쁨이 커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의 기쁨이 커진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쭉정이 같은 사람들은, 즉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실수록 두려움만 커집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인데,
사람들 쪽에서 그 기쁨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두려움만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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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1년 12월 12일
  |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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