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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97
작성일 | 22.01.12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뒤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 날 머무르지는 않으셨다. (요한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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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라고 한 서약이 그저 형식적인 의례인가? 혼인이 아직도 기쁨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의 이혼율, 낙태율은 심각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님을 통해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잔치를 벌이는 때를 가르쳐 주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세례로 마귀의 모든 행실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철저히 믿는 삶을 살겠다고 한 우리의 약속, 이 약속도 그저 세례 받기 위해 한 말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영적으로 나는 이미 하느님과 결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혼인잔치는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이루어집니다. 곧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증언한 다음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그 다음날 세례자 요한의 제자 요한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그 다음날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부르심을 받는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이니 헤아려 보면 7일째 날이 됩니다.

창세기에서 제7일은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사람을 지으시고 쉬신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내라고 명하심으로 인간이 노동의 열매를 누리고 쉼으로써 사는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창조주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이날을 의식하며 복음서 저자는 7일째를 혼인잔치의 날로 의도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결합하게 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이루어지기에 예수님은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물을 맛좋은 술로 만들어 잔치를 흥겹게 함으로써 메시아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때를 앞당긴 것은 어머니의 전폭적인 신뢰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 말씀은 설사 예수께서 포도주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들의 행위는 무엇이든 뜻이 있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일주일간 계속되는 잔치 도중에 술이 떨어진 것은 낭패가 아닐 수 없기에, 예수님이 알면 어떻게라도 할 것임을 믿는 마음도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잘 압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약속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은 다 그들을 위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근원적이고 깊은 체험이 오늘 예수께 이르러 완성됩니다. 이는 우리도 어머니처럼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모든 것을 그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예수님의 ‘기적’과 ‘때’에 한몫을 하시며 어머니의 역할에 집착하지 않고 늘 아들의 사명에 봉사합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번 어머니를 향해 ‘여인’이라 하시는데, 바로 이 장면과 지상 생의 마지막 때인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공생활 중 어느 날에는, 예수께서 군중에게 둘러싸여 설교를 하고 계시는데 어머니와 그 친척들이 찾아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인간으로서 마리아보다 잘 실천한 분이 없다고 본다면 마리아는 예수님 개인의 어머니를 넘어서서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하는 교회의 어머니, 영적 어머니의 ‘여인’이었습니다.

정결예식용 돌항아리 여섯 개 역시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체결하기 전 준비를 갖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하게 준비된 셋째 날 하느님은 시나이산에 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래서 의식적으로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항아리는 아직도 완전에서 하나가 모자랍니다. 율법을 딱딱하게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철저히 율법을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제 맹맹한 물 같은 구약의 율법으로부터 ‘은총과 진리’란 새로운 질서의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맛좋은 신약의 술을 만드십니다. 인생이라는 삶의 잔치를 흥겹게 하는 그 술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옆구리에서 나온 물이요, 그 가는 곳마다 모든 사물이 생기를 얻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린 물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 삶에 기쁨과 생명을 주십니다. 또 그분은 은총과 진리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담는 술항아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제7일은 세례로 시작되었음에도 주일미사에 가는 것이 의무감에서라면 우리 마음은 아직 돌항아리입니다.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청합시다. 주님께서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믿음을 담고, 주님과의 혼인잔치 기쁨을 누리는 술항아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면 삶이 억울하지 않습니까?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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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정 세라피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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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하느님,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이 카나의 평범한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일에서 당신 아들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십시오.

▪ 독서

오늘 복음은 우리를 갈릴래아의 시골 마을 카나에서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 데려갑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손을 씻기 위해 마련해 둔 물을 혼인 잔치를 위한 포도주로 변화시킵니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혼인 잔치에 와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초대된 예수님(요한 2, 1?2),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 앞에 놓여있는 어머니와 예수님(3?5절),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과 사람들의 반응(6?11절).

성경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완전한 일치의 실현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호세 2, 21?22; 이사 62, 4?5). 이것 때문에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이 혼인 잔치에 제자들과 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은 깊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흥겨운 잔치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잔치 분위기를 돋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는 간단한 말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예수님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간청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답변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그분을 죽음으로 이끌어 갈 사건들로 이어지는 전주곡인데,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에 의해 정해진 시간 전에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답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다른 곳에서 자주 보여주듯이 예수님은 항상 당신 '때(시간)'에 충실하게 사는 분으로 소개되는데(요한 7, 30; 11, 8?9; 13, 30) 그분의 '때'는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그분의 구원사업이 완성을 의미합니다(요한 4, 21. 23; 5, 25. 28). 요한의 마음 안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의 강조점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1코린 15, 3?4).

둘째,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한 답변은 구원 역사에서 그분의 '어머니'로서 해야 할 소명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항상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부르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십자가 밑까지 아들의 죽음과 영광이라는 시간에 함께 동반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하면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몸으로 채우게 될 것입니다(콜로 1, 24; 루카 1, 38).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을 요한은 '기적'이 아니라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을 낳는 그리스도의 말과 행위를 요한은 표징이라고 부르는데 기적적인 사건 아래 감추어진 그분의 신비 계시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카나의 혼인 잔치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여섯 가지 표징의 시발점이자 모델이 됩니다. 표징으로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 한 행위나 말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벗겨낼 수 있는 더 깊은 가치를 지닙니다. 혼인 잔치에 예수님 옆에 있던 어머니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포도주의 표징에서 예수님이 구약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 시대를 여는 메시아임을 알아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 분을 믿었다.",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시간', 십자가 위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을 본 사람들 편에서는 그 '놀라운 체험'에 의해 삶이 변화되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요한 1, 12-13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1, 12) 예수님의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여라."(2, 5)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구원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신비를 보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줍니다.

▪ 성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 가져오시는 신선한 포도주, 아무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이사 62, 1?5). 그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바로 그분 자신으로 (요한 4장) 우리를 위해 '쏟아 부은 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서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 온 그 향기 나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선물, 메시아의 도래가 실현하는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 기도

"와서 주님께 환호하세. 우리 구원의 바위 앞에서 환성 올리세. 감사드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세. 노래하며 그분께 환성올리세."(시편 9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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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님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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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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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즉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부부관계처럼, 당신의 교회를 아내처럼 사랑하신다는 표징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마리아의 역할도 우리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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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 예언서 62장 1절-5절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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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1독서에서는 고레스의 칙령(BC 538/37) 후에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건되는 새로운 예루살렘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혼인식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하고 있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있는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여자’라 하지 아니하고...이제는 너를 ‘사랑하는 나의 임’이라, 너의 땅을 ‘내 아내’라 부르리라. 주님께서 너를 사랑해주시고 너의 땅의 주인이 되어 주시겠기 때문이다. 씩씩한 젊은이가 깨끗한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듯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아내로 맞으신다”(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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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2장 1절-11절
가나의 혼인잔치: 첫 번째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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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 이야기는, 즉 그 표징은 혼인에 대한 축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와 맺으실 혼인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마리아께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때’는 아버지의 뜻을 결정적으로 이루시는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로 열려져 있다(요한 12,23.27-28; 17,1 참조). 원문에 보면 ‘그 때에’는 본래 ‘사흘째 되던 날’이다. 이 ‘사흘째 되던 날’은 부활에 대한 어떤 암시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또한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에서, 그 포도주가 그때까지 마셨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사실에서 메시아가 와서 이루어지는 그 어떤 의미를 알 수 있다. 많은 예언서에서 이 종말에 대해서 모든 결실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쳐흐르게 되리라고 한다(참조: 아모 9,13-14; 호세 14,7; 이사 25,9-10; 55,1).

오늘 복음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그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새로운’,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신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요!”(10절). 이러한 것을 성체성사에 대한 암시적인 내용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나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그 가나 혼인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떨어졌다”(3절)는 말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이 신뢰심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는 것은 거절의 의미로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그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신이 끝까지 따르고 일치해야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하겠습니다"(출애 19,8),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하겠습니다"(출애 24,37).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 때에 우리는 구원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메시아적 포도주'를 얻는다. 이 메시아적 포도주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에서의 기쁨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아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깊은 신비가 오늘 복음에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고 하였다.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즉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인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 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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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1고린토 1서 12장 4절-11절
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선물은 공동체를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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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께서는 각자가 받은 성령의 크고 작은 은총의 선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 선물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공동체를 위하여 쓰라고 권고한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7절). 이 말씀은 정확히 말하면 가나에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잔칫집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당신 자신의 신적 모성의 ‘은총’을 사용한 마리아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치르실 거룩한 혼인잔치에 합당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갖고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은총을 잘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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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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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혼배미사에서 낭독하기도 하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해 요한이 기록한 말씀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렵다. 우선 이 혼인이 어떤 혼인이었으며 신랑은 누구이고 신부는 누구였는지 의문이 앞선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펼쳐진 공생활의 첫 번째 표징이다.
물이라고 하는 필수적이고도
일상적인 소재가 메시아 시대의 선물인 포도주로 탈바꿈한다.

‘다’해의 복음은 대체로 루카복음에서 선정하는데,
오늘 복음 말씀은 루카가 아닌 요한복음에서 채택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는지 전하는 유일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Lord Byron(1788~1824년)이
오늘 복음을 두고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 붉혔네!
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라고 묘사하였다 전해진다.

오늘 복음의 혼인에서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면서 예수님, 그분의 어머니, 일꾼들,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예수님이 단연코 주인공이신 것은 틀림없다.
실질적으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의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부는 나타나지도 않고,
과방장의 질문을 받은 신랑은 아예 답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제4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앞 장인 제1장에서 선발하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당신께로 불러 모으시고,
당신과 함께 새로운 혼인 계약을 맺게 된 신부와도 같은
그 공동체와 혼인 잔치를
거행하시는 것처럼 묘사하려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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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요한 2장 1절-1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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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요한 2,1)에서 보듯이 이 복음서에서 한 번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ἦν ἐκεῖ, ên ekeî)”라고 묘사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어머니를 먼저 기술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요한 2,2) 한다.

성모님께서 ‘이미 거기에 계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메시아의 시대가 오기를 고대하는 이스라엘의 표상이자 시온의 딸로서, 그리고 7개의 표징을 기록하는 이른바 ‘표징의 책’(1-12장)으로 알려지는 부분, 첫 번째 표징 첫 문장에 성모님이 “거기에 계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미 거기에 계신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표징을 완성하시는 십자가 밑에서도 “거기에 계신다.”(참조. 요한 19,25)

요한 복음사가가 첫마디 말을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으로 이 혼인 잔치가 있었던 날을 명시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시나이 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에게 가거라.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 셋째 날을 준비하게 하여라. 바로 이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탈출 19,10-11) 하셨고, 그에 따라 “셋째 날 아침 우렛소리와 함께…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탈출 19,16.20)

요한 사도는 마치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만남과 계약이 이루어지던 그 구약의 내용을 상기하듯이 “사흘째 되는 날”, 이어질 4일을 암시하는 바로 그날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기적과 혼인 잔치를 지내셨다고 기록한다.

“사흘째 되는 날”은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1코린 15,4)라고 바오로 사도가 기록해준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계시된 예수님 영광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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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장 1절-1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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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두가 혼인 잔치에 가 있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요한 2,3)에서 보듯이, 포도주가 없었다.
잔치에 반드시 있어야 할 포도주가 없자,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신)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예수님의 어머니는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예수님께 상황을 알리면서
간접적으로 예수님더러 무엇인가를 하도록 정중하게 요청한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잔치가 흥겹게 이어질 수 있겠는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와도 같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포도주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기쁘지 않다.’라는 것과 같은 사실을 주님께 알리는 역할만이라도 성실히 할 수 있다면 이것이 교회로서 이미 중대한 임무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해본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행복이요
기쁨의 선물로 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약속이며 메시아 시대의 선물이다.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시편 104,15)이요,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는 이 포도주”(판관 9,13)라는 표현대로
하느님의 마음마저 흥겹게 하는 술이며,
또한 예언자를 통하여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이사 25,6.8) 말씀하신 대로
세상 모든 이에게 약속된 종말의 잔치,
죽음에서 인간이 결정적으로 풀려날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한 신랑과 신부의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축하하는 것이며
(참조. 아가1,4;4,10;5,1;7,10),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요엘 4,18) 하듯이
축복의 땅에서 시냇물처럼 흘러내릴 것이 포도주이다.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고 기름으로 얼굴을 윤기 나게 하십니다. 또 인간의 마음에 생기를 돋우는 빵을 주십니다.”(시편 104,15) 하듯이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빵을 초탈하게 하는 것은 거저 얻어지는 무상의 술이며, 남성과 여성을 자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술이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기억하도록 명하신 성체성사(참조. 마르 14,22-24와 병행구. 1코린 11,23-25)에는 인간이 살기 위해 꼭 먹어야만 하는 빵과 거저 얻어지는 무상과 은총의 포도주가 담겼다.

인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먹어야만 사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춤을 추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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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요한 2장 1절-1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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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생각할 수도 없으므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이에 개입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님께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한다.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정도 어머님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육친의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이니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냥 가만히 계시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당신 어머니와 당신과의 관계는 육체적으로 낳아주셨다는 그 관계에 우선하여 좀 더 결정적이고도 깊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말씀도
아무리 어머니라 할지라도,
또한 당신 자신마저도 자신의 “때”를 결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겠지만
여전히 모호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때”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때”일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관한 징조를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것이다.

이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즉각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말없이 몸과 행동으로 보여주시며 아드님에게 순종하는 분으로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듯이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5)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는 당신 역시 들음과 순종의 “제자”임을 보여주시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는 자세로 일꾼들에게 요청하신다.

성모님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일절 남기지 않는다. 참으로 믿음의 여인이었고 들음의 여인이었으며 순명의 여인이었고 제자 중의 첫 번째 제자로서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육감이 빠른 여성의 본능을 지니신 여인이셨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든 이의 필요를 살피시는 분이셨으며,
사람들의 필요를 예수님께 전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신 분이셨고,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예수님께 간청하여
그 열매를 얻어내시는 분이셨으며,
예수님의 첫 번째 표징으로부터 마지막 표징까지
예수님을 동행하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아들과 연결되어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오로지 십자가 위에서 피로 이루어질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완성하실 표징을 예고하시고자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두세 동이들”(요한 2,6)에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 하시고, 이어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 2,8) 하고 일꾼들에게 이르신다.

일상의 범상함이 범상치 않음으로,
물이 술로, 인간의 때가 하느님의 때로 바뀐다.
파국으로 끝날뻔한 잔치가 엄청난 풍요로움과 기쁨의 잔치로 전환된다.
일꾼들이 곧바로 순종하며 “물독마다 (물을) 가득 채운다.”

“여섯”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뜻하는
일곱을 향하는 불완전한 숫자임이 분명하다.

하느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창세 1,31)
일곱 번째 항아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사랑으로 채워질 것이다.(참조. 요한 19,31)

교회의 교부들에 따르면 구약의 구원 계획을 상징하는 물이 예수님의 현존 아래 신약 메시아 시대의 ‘새로운 계약의 음료’가 된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포텐, πόθεν, póthen>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 순명하며) 물을 퍼 간 일꾼들은
(메시아의 음료가 예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2,9) 하는 구절도 매우 상징적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에파네로센, ἐφανέρωσεν, ephanérosen>.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카나의 표징은 실로 예수님과 당신의 교회 사이에 이루어질
어린양의 혼인과 계약을 위해 대단히 깊은 의미가 담겼다.

600리터가 넘는 많은 물이 잔치의 풍성한 포도주가 된다.
양과 질 모두에서 그 어떤 포도주와도 비교할 수 없고 결코 다함이 없을 예수님 사랑의 선물인 포도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카나의 포도주를 아직도 마신다.
바로 예수님의 식탁에서 우리가 순종하고 믿는 그분과의 만남을 거행하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간에 이루어지는 혼인을 거행하고 축하하면서 카나의 포도주를 아직도 우리는 마신다.

혼인 안에서 “둘이 한 몸”
(창세 2,24 마르 10,7.8 마태 19,5.6 에페 5,31)이 되는 것처럼
성체성사 안에서 믿는 이들은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
온전히 당신을 내어주시는 그분의 몸과 하나가 된다.

혼인이라는 메타포가
그렇게도 강력하면서 무한한 내용을 함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화의 신비에 관한 진리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혼인 안에서는 두 몸이 하나의 몸이 되고
포도주의 흥겨움 안에서 사랑의 노래로 일치와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의 언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묘사하려 할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인간적이고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
먹고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속한다는 사랑의 거행을 위해
몸들이 만나는 것과 같은 현실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카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다.
없는 신랑과 신부를 찾으라고
그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체가 만나는 자리에 초대를 받는 것이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 서둘러 가야만 한다.
그 초대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 간다.
믿음의 눈으로 보려고 간다.
믿어야 할 말씀을 들으러 간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실행에 옮기려고 간다.
하느님 나라의 포도주를 맛보려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져보려고 간다.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와 병행구) 하신 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새 포도주를 우리와 함께 마시기 위해 기다리심을 느낄 것이다.

이미 그분께서 이 땅에서 드신 포도주가 있고,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남겨주신 포도주가 있지만, 그분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66,22 2베드 3,13 묵시 21,1)에서 우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드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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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1월 16일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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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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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 내용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이적 사건입니다.
이 카나의 기적은 공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일곱 기적이 나오는데 카나 기적은 그 첫 번째 기적입니다.

그 다음 4장의 왕실 관리의 아들 치유 기적,
5장 벳자타 못 가 삼십 팔년된 병자 치유,
6장 오병이어의 표징,
6장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
9장 날때 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고치시는 기적,
마지막으로 라자로의 소생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첫 기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항상 처음의 일은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둘째, 셋째의 사건을 내장하고 암시하는 조건이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크게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 기적의 배경,
둘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부족한 상황(문제의 발생)
즉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짐,
셋째 성모님의 전구자적 요청 및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리아의 믿음,
넷째 예수님의 개입, 항아리를 물로 가득 채우게 하고
그것을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게 함,
다섯째 일꾼들의 순종,
여섯째 물이 포도주로 변함(질료적, 실재적 변화),
일곱째 기적의 의미와 결과, 과방장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됨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초대받아 모였을 때에 일어난 일을 매우 사실적으로 긴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뉴스를 보도하듯이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긴박하게 보고합니다. 전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행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복음의 시간적 배경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첫 시작이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매일 미사책에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 대신에 그냥 애매모호하게 ‘그때에’라고 해버립니다.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과 ‘그때에’라는 표현은 서로 등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명맥한 의미 축소를 발생시킵니다. 매일 미사책 대신에 성경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매일 미사책이 가지는 편리함 때문에 그 의미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급적 매일미사책 대신에 찾가 귀찮더라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때에’가 아니라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은 본문의 사건이 앞의 말씀과 일에 연결 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흘되던 날이란 나타나엘을 부르신던 날로부터이며, 곧 제자들을 부르신 지 일곱째날에 해당되는 날입니다. 그런데도 “사흘째 되는 날”을 ‘그때에’로 바꿔치기하면 시간적인 접속과 상황적 연동으로 컨텍스트를 이루는 전이해(Précompréhension)들을 다 잘라버리고 파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렉시오 디비나를 하자면 반듯이 컨텍스트를 확인해봐야 합니다. 바로 앞 장인 요한복음 1장 5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제자로 부른 후 너는 이 보다 더 큰 일을 볼거라는 암시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요한 복음 1장에서 제자를 부르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특히 바로 앞구절 50절 말씀은 특별히 그 제자 중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건은 예수께서 나다나엘과 만나신 후, 사흘 째 되는 날에 일어났음을 밝힙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한 후 곧바로 물을 포도주와 변화시키는 큰 이적을 소개합니다. 카나의 기적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알아본 것보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즉시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암시가 성취하는 도식입니다.

어쨌든, 매일 미사책은 복음의 배경 설명을 본문에서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친분이 있는 사람의 혼례 찬지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결혼 잔치에 예수님과 마리아가 참석을 하고 제자들이 동참한 것을 보면, 혼인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친척이 되거나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입니다. 또한 요한이 복음의 지리적 배경을 "갈릴래아 카나"라고 밝힌 것은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수리아 가나'와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Kana(카나)는 "갈대"라는 뜻으로 갈릴래아에서 갈대가 많았던 어떤 지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정황적 배경은 혼인잔치입니다.

이 당시의 결혼연령은 탈무드를 보면 여자는 적어도 12세를 먹고 하루라도 지난 13세가 되어야 하고 남자는 13세가 되고 하루라도 더 지난 14세가 되어야 신랑이 되고 신부가 되는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보통 신체적으로 성숙한 연령은 여자로는 15-16세이고 남자는 17-18세입니다. 결혼식은 처음 중매쟁이의 연결로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아주 어릴 때 부터 약혼이 시작됩니다. 결혼의 결정은 혼인 당사자가 아니라 양가의 아버지가 결정합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할 때가 오면 양가가 함께 만나서 신랑은 신부에게 포도주를 자신을 마시고 난 후 신부에게 주면서 “나는 당신을 신부로 맞이하여 생명을 다하여 살것을 하느님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하고 나면 신부가 그 잔을 받으면 정혼이 됩니다. 이때 합방하여 함께 살지는 않지만 혼인의 효력이 정식으로 시작되고 신랑은 준비를 하고 신부는 언제라도 신랑이 데리러 오면 갈 준비를 합니다. 신랑의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되었다 싶으면 신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신랑과 신부는 속죄를 위한 금식을 합니다. 이것을 개인의 욤 키푸르(대속죄일) 라고합니다. 그리고 합방을 하고 나서 일주일간 잔치를 벌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1-2주간에 걸쳐 길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주로 결혼식을 수요일에 거행하는데 우리는 결혼식을 하고 잔치를 하지만 그들은 먼저 잔치를 하고서 그 중간에 식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은 더운 낮을 피해서 대개 밤에 행합니다. 낮 시간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즐깁니다.

명문 집안은 7일동안이나 잔치를 합니다. 밤에 횃불을 들고 예정된 시간에 신랑이 혼례복을 입고 친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신부의 집으로 행진합니다. 이때에 신부의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축제용 옷을 갖추어 입고서 길을 밝히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합니다.

이 결혼식은 대개 추수기가 끝난 가을에 많이 거행하는데 신부집에서 신랑과 신부가 마련된 신방에서 초야를 지내는데 하객들은 계속해서 잔치를 참석하면서 그들이 한 몸이 되고 신부가 순결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신방에서 나오면 신랑과 신부는 일 주간이 다 끝나도록 축제에 참석해야 한다.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신랑의 혼례를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가 종반으로 흘러갈 즈음에 아주 난처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잔치의 흥을 돋아주는 포도주가 바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술은 잔치집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신명나게 축제를 벌이는 데 도움을 주는 매개체입니다. 잔치에서 흥을 돋아주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혼례의 기쁨을 불만과 불평으로 바꿀 수 있는 요인이었습니다. 물론 잔치는 온 손님들을 고려해서 준비되었겠지만,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하여 포도주의 결핍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난리가 난 것입니다. 잔치의 분위기가 험악한 상태로 바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술이 떨어졌다면 막바지에 이른 잔치의 흥을 깨뜨리고 그 잔치는 파장입니다. 이제 끝장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잔치는 일찍 술이 바닥났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큰 낭패였고 속수무책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눈치를 채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개입하심으로써 다 끝장이 난 잔치를 더 흥겹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문제를 알게 된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잔치 집에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모자랄 때 마리아는 아직 한번도 기적을 베풀지 않는 예수님에게 가서 말한 것을 보면 마리아는 30여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서 성모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위기의 국면에서 전구자적 역할을 자청하십니다. 성모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 바로 고하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를 먼저 찾아가는지 생각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마리아처럼 어떤 문제든지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면 해결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면 내 머리로 먼저 생각하고 안 된다고 판단해버리는 사람인가? 문제가 생기면 먼저 누가 떠오르고 어디에 가서 부탁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가?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그대로 말합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성모님의 짧은 말입니다. 앞앞이 일일이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요구와 말하지 못할 참담한 탄식 그리고 미래의 희망 심지어 명령까지 담긴 말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해결되어야 할 문제의 발생 즉 기적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잔치가 포도주의 덫에 걸렸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 예상외로 손님이 많이 왔고 혼인 잔치가 종반으로 넘어간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문화권이든 결혼 잔치는 그 사회에서 가장 기쁘고 축복된 시간입니다. 그 날만큼은 신랑 신부가 최고의 대접을 받고, 또한 동네 사람들도 새로운 부부가 탄생한 것에 대해 축복하며 기뻐합니다. 마을 전체의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기쁨을 더해 주는 것이 풍성한 음식입니다. 고기와 포도주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중동의 잔치에서 잔치에서의 포도주는 핵심 음료입니다.

술이 있어야 흥겹고 좋은 술이 있어야 그 잔치가 성대하게 됩니다.
중동의 잔치에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주인데 모자라지 않는 것이 통례입니다. 잔치를 하려면 미리 올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잔치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잔치 당일에 초청하여 온다고 한 사람들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서 확인합니다.
온다고 약속하고서 당일에 오기를 거절한 사람은
그 잔칫집과는 교제가 끝나고 원수가 되기에 꼭 참석하기 마련이고
잔치집에서는 얼마나 올지 미리 알고 넉넉하게 준비하기 때문에
포도주가 부족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모자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마시거나
예상치 못한 불청객들이 많이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모님은 몰라도 예수님과 제자들은 불청객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구약의 관습에 따르면
혼인 잔치는 보통 7일간 지속될 만큼 큰 축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길다 보니 자칫하면
음식과 술이 모자라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잔칫집에서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이며 디스카운트입니다.
이 당시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는
단순히 포도주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잔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초청되어 온 손님에 대한
엄청난 실례가 되는 일입니다.
탈무드에도 “포도주 떨어짐은 신랑 신부의 수치”라고
기록할 정도의 큰 실수가 바로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편 104, 15에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나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기쁨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시작된
이 잔치가 포도주로 인해 중단될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이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없구나.”라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인이시여’라고 호칭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한 이 말은,
번역 성경을 보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어색한 표현으로
우리가 오해할 만한 단어입니다.
어머니에게 “여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다니!
이런 대답은 막돼먹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호칭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자이시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γύναι(귀나이, guvnai)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여자를 의미하는 호칭이었습니다.
간혹 낮춰 부를 때 사용하기도 하지만
존칭 호격으로 "여성, 부인, 여사"를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아내를 다정스럽게,
그리고 최고로 높여 부르는 존칭이고
왕후를 부를 때도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모친 마리아를 부를 때(요한 19,26),
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부를 때(요한 20,15)도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 4)

여기에서 "때"는 지정된 시간을 말합니다(루카14, 17, 사도 3, 1). 우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의 때’에 대한 기록이 여러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막절 축제 때에도 예수님은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8)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은 파스카 명절에 참여한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을 보고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요한 12, 23) 하십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 1)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요한 16, 32)라고 하십니다. 또한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 1)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모두 ‘구원과 십자가의 카이로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카이로스를 자신이 마음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있음을 보여주고 지금까지 공생활의 ‘그때’를 기다려 오신 것입니다. 주어진 때를 서두르거나 회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완전한 부정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생각하기에 마리아의 요청은 아직 구원경륜의 결정적인 때에 뭔가 맞지 않는 요청이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때, 즉 정해진 시간 또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맞게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잔칫집 떨어진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님이 못한다고 거절을 하는데도 마리아는 이것을 거절로 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퉁명스러운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요청이 이루어지라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모님의 전구가 이루어지리라 믿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위기에서 사건을 해결한 열쇠는 먼저 마리아의 믿음과 희망입니다. 마리아는 아드님이 무엇인가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고 또 내놓기를 희망합니다. 일꾼들에게 지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지시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믿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4절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섭섭하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느님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성모님은 엄마로서의 자신의 입장과 인간적인 생각을 포기한 채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항아리들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마당 한구석에 준비된 그릇이 있는데 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하게 채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 복음서는 물동이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유대인들은 관례에 따라 집 입구에 항아리를 둡니다. 이 항아리는 민수기 19, 1-22에서 유래한 정결 의식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항아리를 집 앞에 두어 통상 식사를 할 때나 외출한 후에는 꼭 손과 발을 씻어 정결케하였습니다.(마태 15, 2, 마르 7, 2-4) 유다인 가정들은 집안에 항상 항아리를 준비하여 물을 가득하게 담겨두는데 이것은 샌들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집안에 오면 반드시 물로 발과 손을 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항아리는 매우 커서 매우 큰 항아리로 약 70-120리터 정도 들어갑니다. 이런 항아리가 6개이면 적어도 420리터에서 720리터에 달하며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충분히 마실 양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씻었기에 물 항아리는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 항아리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빈 물 항아리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비움이 먼저 있어야 채움이 그 뒤를 따릅니다. 비움이 없으면 채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래 포도주가 담겨 있다가 다 떨어진 기존의 술 항아리에다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항아리에 채우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왜 예수께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항아리를 선택하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에 대해 프랑스 리옹 가톨릭 대학교의 성서학자 프랑수아 프랫지(François, Fraizy) 신부는 옛 결약의 단절과 새 결약의 연결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의식의 발로입니다. 맹물의 항아리가 와인의 항아리로의 변화는 율법에서 복음으로 변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돌 항아리들의 물은 율법의 규정을 지목하고 포도주는 메시아에 의해 구약이 신약으로 넘어가는 복음의 더 풍성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포도주 기적은 습관적으로 헐벗은 반복의 종교 생활을 했던 유다인들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변화를 예표합니다.

율법 생활의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돌 항아리의 물이 정결을 위하여 씻는 용도로 쓰인 것처럼, 물이 변화하여 만들어지는 포도주도 단순히 손발을 씻는 것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셨던 포도주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후 우리 가톨릭 교회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사의 성체성사에서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라는 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웁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하인들은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몰랐지만, 마리아의 명에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질문이나 불평 없이 빈 항아리를 가득 채우는 일은 어쩌면 포도주를 구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일꾼들은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일꾼들에게 순종은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포도주가 다 떨어져 없는 현실이 문제인데 엉뚱하게 포도주 항아리가 아니라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은 약간 뜬금없는 일입니다. 가뜩이나 물이 귀한 데 갑자기 물을 길어 여섯개의 항아리를 채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아리의 용량도 컸고 그 숫자도 여섯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소 발을 씻는 물통에다가 물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기적은 항상 이런 이성과 편견의 장애물을 넘어가야 일어납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카나의 기적에서 물이 질료적 조건이라면 순종은 관계적 조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진정 필요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들의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라면 과연 그대로 순종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일꾼들이 물을 다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떠서 과방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그리고 일꾼들은 곧 그것을 날라다 줍니다. 예수께서 이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에 어떠한 행위나 말도 필요 없으십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라!"라든가 이런 명령도 필요 없이 새로운 창조(New creation)가 일어났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됐다는 것은 단순한 화학적인 변화 이상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죠. 완전한 변화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완전히 변해 버리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냥 착한 사람이 됐다 뭐 이 정도의 변화 이상입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포도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옛 사람이 변하여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이번에도 일꾼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과방장에게 날라다 줍니다. 보통 과방장은 신랑, 신부를 잘 아는 동네의 어른이었으며 잔치에 제공되는 음식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맛본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포도주를 준 것에 대해서 칭찬을 합니다. 기적으로 만들어진 포도주에 관한 과방장의 평가가 나옵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은 H2O이고, 포도주에 포함된 에탄올은 C2H6O입니다. 물의 화학식과 에탄올의 화학식을 비교해 보면 에탄올에는 물에 없는 C2 즉 탄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촉매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화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날라다 주라고 말씀하시자,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상식이나 과학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성자로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하시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방장의 평가에 이어 마지막으로 기적의 의미와 결과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됩니다. 기적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표징은 인간을 하느님의 영광의 계시와 이 계시에 대한 신앙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혼인잔치의 포도주 기적의 결론을 이렇게 맺은 것입니다. 결혼식의 신랑신부나 하객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이 일로 인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후일담만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더 깊이 묵상해보겠습니다. 술이 떨어진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은 누구를 위한 기적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번 맞춰 보세요. 1번 성모님 2번 신랑신부 3번 결혼식 하객 4번 혼주 5번 예수님 6번 다른 아무개.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은 누구를 위한 표징이었을까요? 문제가 어렵습니까? 리옹 가톨릭 대학교의 프랑수아 프랫찌 신부는 단호하게 제자들을 위한 표징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인공은 신랑도 아니고 신부도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예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앞의 컨텍스트 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고 그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제자 교육을 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댓바람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흘 째 되는 날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갈릴래아 지방에서 기적을 한 번도 행하시지 않았고 예수님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분이었습니다. 오늘 카나 사건으로 예수님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주요 첫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포도주 표징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구절이 바로 오늘 복음의 11절입니다. 결론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제자들을 등장시켜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표징이 영성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생각하기 전에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인잔치가 열린 카나라는 마을은 제자 중 하나인 나타나엘의 고향인데 이곳에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 자신을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의 신앙 확립을 위해 표징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나는 누구이고 어떤 능력을 가진 이인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일이라는 것도 밝혀집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가 오늘 복음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혼인 잔치는 오늘 1독서에도 나오듯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결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교회 사이의 새로운 결약을 혼인 관계로 설명합니다. 포도주는 메시아 시대의 기쁨과 풍요로움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기쁨을 배가시키는 것이 포도주요, 그런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의 기쁨은 반감될 수밖에 없듯이 예수님 당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가 마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처럼 위기에 처해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 기적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시대의 풍요로움과 은총의 기쁨을 가져오실 분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에 담긴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 영국 옥스포드 대학 종교학 시험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시인 바이런의 답안은 유명합니다. 바이런은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답했습니다. “물이 사랑하는 임자를 만나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도다.” 감수성이 뛰어나 공감이 가면서도 매우 신학적인 답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혼인 잔치를 암시합니다. 여기에서 물은 교회이고 임자는 창조주 말씀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신부는 교회라는 것을 암시하고 신랑 신부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물론 이 혼인잔치의 사건은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란 측면에서 의미가 있고, 또한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켰다는 것에 주요한 의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 카나의 기적 사건은 우리에게 믿음을 강화하는 필요한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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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테살로니카 1서 5장 17절에 나오듯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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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런 후에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불만스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할 적에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다가도
조금 후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거절하시다가도 허락하시는 경우가 종종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잔치판의 흥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간혹 받아 들려지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도
믿고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판이 깨어지는 것을 그냥 방관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잘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수록
더 매달리고 기도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는 아픈 아이이거나 엄마 없는 아이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도움을 청할 수 있어 큰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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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주님은 변화시키는 분이고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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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맹물을 질이 좋은 포도주로 변화를 시키십니다.
주님은 질적인 수준에서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옛 사람이 변하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이 구름을 만나면 빗물이 되고
강을 만나면 강물이 되고
바다를 만나면 소금물이 됩니다.

물이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로 남을 것이고,
소를 만나면 우유가 될 것이고
독사를 만나면 독이 될 것이지만,
오늘 물이 예수님을 만나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가 되는가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물이 포도주로 변모했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면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루저 밖에 못 되는 내가 위너가 될 수 있고
꼭 필요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의하면 변화에는 헐벗은 변화와 풍요로운 변화가 있는데 풍요로운 변화가 사건(evenement)으로 발생할 때 행복이 온다고 합니다.

알맹이는 빼고 껍데기만 바뀌는 변화가 헐벗은 변화라면 풍요로운 변화는 내면에서 새로움이 솟아나는 변화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생귤라리떼(singularité, 특이성)의 강도(intensité,强度)를 높여 자신의 인생에서 대체 불가능한 변화가 이루어질 때 삶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자신의 특이성과 유일무이성을 발휘하고 회복하는 변화가 참된 변모이고 울림과 떨림이 있는 행복한 변화입니다. 이것은 돈이나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을 담아 종횡으로 풍요롭게 새로워지는 변화가 풍요로운 변화입니다. 내가 메마르고 맹물 같은 인격의 사람일지라도 포도주의 향기를 풍기고 향기로운 인격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한 사람인가 아직도 맹물 그대로입니까?
내가 가로지르기와 세로지르기를 통해 사방 팔방으로 새로워져야 새해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물과 피로서 거듭난 완전히 새로운 존재다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을 내 안에 담아 닮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 답은 오늘 제2독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아홉가지 은혜는 공동선을 위해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을 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성령의 9가지 은사는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 믿음
4. 병 고치는 은사(복수형)
5. 기적(뒤나미스, 능력 권능) 행함
6. 예언
7. 영들의 식별
8. 신령한 언어(방언)를 말함
9. 신령한 언어(방언)의 해석입니다.

이 성령의 아홉 은사는 교회의 지체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한 봉사자가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선 공동선(共同善은 그리스어로 ϭυμψερον(쉼페론, symperon, bonum commune, le bien commun, common good)인데 이것은 ϭυμ(sym, cum, with, 함께) + ψερον(peron, bonum, good, 선)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선을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으로 하여금 보다 완전하고
보다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생활상 여러 가지 조건들의 총체’(사목헌장 26)라고 정의합니다.

공동선은 공동으로 함께 짓는 선,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를 위해 베푸는 선,
‘함께’ 이익이 되고 ‘함께’ 좋고
‘함께’ 기쁘고, 함께 득이 되는 선을 말합니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 세 가지 기본적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1) 인간 존엄성의 원리 : 하느님 모상으로서 누리는 존엄성,
2) 정의의 원리 : 분배의 정의, 법적 정의, 사회의 정의,
3) 보조성의 원리 : '상위의 보다 큰 사회 구성체'의 권위가 '하위의 보다 작은 생활 써클'의 권리를 존중하는 원리. 보조성의 원리에 의하면 소공동체가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도록 큰 공동체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 가지 원리의 궁극적 목적은 공동선의 추구입니다.
오늘 복음은 공동선을 위해 연대성의 원리가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오늘 기적은 예수님, 성모님, 일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함께 연대한 결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공동선을 위한 기적에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성모님의 요청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표징이라기 보다
공동선과 타자를 위한 일입니다.
어머니를 위해서이고 잔치집 주인을 위해서이고 하례객들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예수님 자신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의 능동적인 변화가 때를 만들고
기적을 이루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탄생시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변화하시는 분이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변화의 출발은 남 볼 것 없이
또 남 탓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시선에서도 탈출하고
나 자신에 전선을 긋고 과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변화가 풍요로운 ‘달라짐’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도 변화하여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인년 새해에 나는 무엇이 달라지고
나의 인생은 어떻게 새로워질 것인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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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월 16일
  | 01.14
505 7.6%
카나의 혼인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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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장 1절-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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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가 없구나.”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기적을 일으켜 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원래 ‘기도’는 이렇게 하는 법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때, 자기의 어려운 사정만 말씀드리고,
그 상황을 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뒤의 11장을 보면,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는
말만 전했습니다(요한 11장 1절-3절).>

‘여인이시여’ 라는 말은,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존칭입니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에서 ‘저의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계시되는 때입니다.
그 ‘때’는 십자가 수난 때입니다(요한 17장 1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한
어떤 백인대장은(마르코 15장 39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공적 계시를
첫 번째로 받아들여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요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으로 보이는데,
예수님께서 곧바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거절은 아니고,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로 해석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는 성모님 말씀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무엇을 시키든지 아무것도 안 시키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잔치를 그만 끝냅시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웃집에 가서 포도주를 얻어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해결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것인지,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실 일입니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요한 2장 6절-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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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기적의 과정은 나오지 않고 기적의 결과만 나옵니다.
‘빵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적 이야기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언제 어떻게 많아졌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수천 명의
군중이 배불리 먹었다는 말만 나옵니다(요한 6장 9절-12절).

‘기적’이란, 인간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고,
그래서 복음서 저자의 입장에서는 과정과 방법을 세세하게 기록할 수도 없었고,기록할 필요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어머니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때’를 앞당기셨는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인간의 사정에 따라 쉽게 바뀔 수 있는가?

그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이고,
지금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은 ‘사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그 ‘때’를 앞당기신 것은 아니고,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라
이웃의 딱한 사정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사랑에 ‘자비’로 응답하신 일입니다.

‘사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성모님과 제자들과
일꾼들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요한 2장 9절-10절).

(예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융통성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원칙대로만 해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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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더욱’ 깊이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꾼들은
원래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적을 보았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적은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은 성모님의 믿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적을 기적으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보더라도 믿음으로 곧바로 연결되지도 않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입니다.
물론 신랑 입장에서는 대단히 난처한 일이지만,
사람의 목숨이 위독한 일도 아니고, 집안이 망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성모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보이는 일이라도 성모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도 내용에 대해서, “당신은 왜 그런 하찮은 일까지
기도해서 주님을 귀찮게 하는가?” 같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찮은 일은 있어도 하찮은 기도는 없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말씀드리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더라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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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월 16일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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