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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조회수 | 115
작성일 | 22.05.19
[원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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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분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평화로운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신부님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저를 너무 힘들게 해요 원수처럼 느껴지고 미워 죽겠어요.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미워요 용서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이거 죄 맞죠? 어떡해야 해요?" 참으로 난감한 질문입니다. 물론 답은 분명 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을 용서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 신부님 말씀은 맞지만 그게……. 그렇지만 노력해 볼께요." 하고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뒷모습이 개운치 않아 보입니다.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이야기로 일관한 제 마음이 공허해 집니다. 어찌해야 하나? 다음에 또 이런 일로 찾아오시는 분에게도 똑 같은 대답을 해야 하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 맞다. 다음엔 이렇게 대답해 드려야지……. 형제(자매)님은 그리스도인이시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하시죠? 마음으로 이렇게 다짐해 보세요.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원수가 아니다. 이들은 내가 사랑해야 할 형제요 자매다.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다."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선함, 악함, 이기심, 사랑스러움, 나약함, 관대함, 친절함을 복합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지속하면서 각자의 성향과 태도에 맞추어 이웃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말한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일러준 방식대로 이웃을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말한 참된 평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가족이, 친구가 잘해주고, 고마움을 갖게 할 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조금이라도 섭섭하거나 억울하거나 미운 마음이 들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싫건 좋건 간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의 마음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닙니다. 가져도 되고 안 가져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시작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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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조원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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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shalom שׁלו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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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제는 샬롬이라는 말이 평화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이 평화는 주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인사말로 하신 단어입니다.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존경하는 스승과 사랑하는제자 사이에 죽음이라는 이별이 있은 후에 다시 만났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리에서 이 평화의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별 후에 반가움,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난 평온, 안심이라는 심리 상태를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 주님을 잃어버리고 다시 만났으니 그동안 제자들을 덮고 있던 슬픔, 고통, 불안,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제까지 체험할 수 없는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과거의 제자들에게 물을 수 있는 비겁함, 배신 등등이 아닌 주님의 넓고 깊은 용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혼란이나 실망, 심지어는 당신을 버리고 흔들리는 도망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바로 이 ‘평화’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실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이렇게 혼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는 거저 주는 그야말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힘든 것, 때로는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넘기고 나서야 참다운 평화의 순간을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평화의 인사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하고 기쁨이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어려운 순간이나 사람을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내가 사람을 골라서 만나는 것 같아도 사실은 피할 수 없는, 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람 만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쁠 때는 말 할 수 없지만, 고통스러울 때는 말 그대로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때로는 피하고 싶고 안 만나고 싶어도 딱딱 붙는 껌처럼, 옛날 우리 표현대로라면 ‘찰거머리’처럼 떼지도 못하고 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은 한 교우가 자기는 자기 직장의 상사가 너무 꼴 보기 싫어서 그 직장을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생기기도 너무 못 생긴데다가 목소리까지 그리고 하는 짓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데 사사건건이 자기를 ‘이런 표현하면 안되는 데...’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표를 써야 하는 데 대학 다니는 둘째와 막내가 있어서 죽지 못해서 직장에 나갔습니다. 자기가 너무 힘들어서 점심 식사 후에 직장 부근의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주님, 그 지겨운 사람, 아프지도 않습니다. 아니 휴가라도 많이 내서 아주 오래있지도 않습니다....’등등의 푸념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다른 방법은 없고 그래도 성체 앞에서 그 사람 욕도하고 오면 좀 나은 것 같아 그렇게 하기를 일 년을 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수도 외나무 다리’라고 점심 시간에 일을 하다보니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그 꼴보기 싫은 상사에 남았는데 ‘점심이나 같이 하자.’라고 하더랍니다. 꼭 지옥 같은 분위기여서 무슨 핑계를 대야 하는데 댈게 없어서 마지못해서 ‘그러지요’라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식당에 갔다고 합니다. 밥을 먹다 말고 그 상사가 ‘천주교 신자이지요?’라고 말하며 성실하고 진실하다고 칭찬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몇 차례 업무에서 힘들었는데, 우리 신자를 보고 용기를 얻고 몇 차례 그만 두고 싶은 것을 참고 견디었다는 말을 하면서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서 너무 고마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사는 자신이 때로 성격이 못 되서 ‘소리도 지르고 무시한 것은 너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신자는 어리둥절해서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하면서 혼란스럽게 식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 후에 기적 같은 일이 우리 교우에게 일어났습니다. 주위에 친구가 없고 못된 사람으로 평을 받는 그 상사가 불쌍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차차 그 상사와는 서로 믿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교우는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기까지는 ‘일 년이라는 지옥 같은 시기’가 있었다고하면서 ‘주님의 평화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닌가 봐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꼭 이 교우의 이야기와 같지는 않지만 우리도 때로 나를 힘들게 하는 꼴 보기 싫은 이웃을 이해하는데, 용서하는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나봅니다. 그 교우 말대로 거저 얻는 주님의 평화는 없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십니다. 어리석은 우리가 너무 늦게 깨닫고 용서하기에는 너무 더디고 때로는 옹졸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극복하기가 어렵겠지요?

성령께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때론 얻기 힘든 주님의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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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2년 5월 22일
  |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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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가 사라지면 마치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해는 막대한 인명과 물질적 손실은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무릎쓰고 재해 현장에 뛰어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기도 합니다. 국가와 언어, 종교를 초월하여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모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금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느끼곤 합니다.

지리적, 물리적 공간에 얶매이지 않고 선(善)을 파괴하는 악에 함께 대응하며 박애와 자선을 향하여 함께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국적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언어와 인종 등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 단지 그 사람의 마음만으로 결정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 나라의 국경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주님 나라의 국경 또한 산과 바다 등 물리적인 구분이 아니라 마음으로 구분 지어집니다. 사랑의 벽으로 둘러 쌓였기에 경계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안과 밖이 아니라 사랑의 안과 밖이라는 것입니다. 즉 비록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나라에 있는 것이고, 몸은 교회 안에 있으나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주님의 나라 밖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선과 사랑입니다. 넓고 열린 사랑으로 아픔을 공감하고 나눔과 봉사를 하는 사람, 믿음이 없지만 박애와 사랑을 지닌 사람은 모두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지만 좁고 협소한 빈약한 마음으로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에 따라 주님의 나라는 참으로 넓고 큰 나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폐쇄된 너무나 작은 나라일 것 같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만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사방 팔방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만들어졌기에 제단은 없지만 사랑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곧 빛이기에 그 곳에는 조명도 필요 없습니다. 넘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반짝이는 옥과 투명한 수정으로 지어진 성은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밝게 비춰 주고 있습니다.

박애와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계속,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들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이 수정처럼 빛나고 단단한 돌이 되어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세울 수 있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이것을 위해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노력을 영원히 멈추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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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대교구 키엣 대주교
2022년 5월 22일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제공
  |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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