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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34
작성일 | 22.06.23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제 마음에 심어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는 예수님이 당신 길을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1절) 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와 대비되어 57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의 맨 마지막 장면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24, 51) 이로써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사명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 사도행전에서 보게 될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소명을 위해 그분은 ‘예루살렘’ 을 받아들이십니다. 예루살렘은 당신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장소지만, 또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보다 조금 앞에 나오는 거룩한 변모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 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9, 31) 예수님은 그곳에 가신다면 장차 무슨 일을 맞을 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굳히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한 고통이 수반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더하여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분을 냉대합니다.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예루살렘에 가시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수난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수고와 희생을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나를 지지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요 !

예수님께서 받으신 사형 선고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그분을 죽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그분을 죽였을까요 ? 어쩌면, 그분께 사형 선고를 내린 이들은 그분의 말씀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미적지근하게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잘 인식했는지도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범을 죽이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이들보다 그의 말을 더 잘 알아듣는 것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부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온전히 받아들이십니다. 그 거부와 박해를 받는 것이 당신 사명의 일부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는 그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이어서 그분을 따르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은 정처없는 당신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으십니다.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는 예수님의 말씀은 (58절)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철저한 가난과 복음 선포를 위한 전적인 자유를 받아들이라는 초대로 들립니다.

이어서 나오는 두 사람은 따름과 응답에 어떤 조건을 붙이려 합니다. 이들은 부르심에 따라나선 이들이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걸 수 없었고 이전에 그들이 지닌 관계인 가족에게 계속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두 번째 사람에게 하신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는 말씀에서는 (60절)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는 말씀은  (62절)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나 가족에게 해야 할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할 때는 그 부르심에 따르는 모든 요구, 치러야 할 희생과 고통까지 전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찰

한 가지를 선택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계셨지만,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할 때는 아직 그 응답이 어떤 포기를 요구할 것인지 명백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무조건적인 것이라면 이어서 맞게 될 어려움과 반대와 희생, 그 모든 것은 이미 했던 응답 속에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럴 때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 12, 2) 예수님 당신께서 먼저 보여주신 삶, 이것이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을 위한 거울이 됩니다.

기도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마실 잔이신 주님, 당신께서 저의 제비를 쥐고 계십니다. (시편 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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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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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으로 루카복음의 제2부가 열리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소위 ‘예루살렘 상경기(루카 9,51-19,28)’가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전 과정은 궁극에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단죄를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련의 과정을 증언한다.

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루카 9,51-6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대장정의 첫 구절은 자못 엄숙하게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한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루카 13,33-34) 하고 한탄하신 것처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속으로 당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마음을“굳히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원수를 피하지 않으며 당신의 소명을 온전히 이루시어 마침내 ‘하늘에 오르실’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하늘에 오르심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스러운 출애굽을 완성하실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떠나는 이 길의 시작은 희망과 기대, 온갖 어려움과 저항, 그리고 두려움이 뒤범벅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장차 제자들마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날”(마르 14,50) 길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힘으로 다시 한번 교회가 시작될 그 길의 장대한 시작이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시간과 역사라는 성지를 여행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다. 거룩한 여행이다. 성지순례이다. 루카는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2열왕 2,8-11)라고 기록한 것처럼 예루살렘 상경기의 첫 구절에서도 “하늘로 올라가실 때”를 기록하며 이미 예수님의 “승천”(참조. 사도 1,2.11.22 정확하게는 동사 ‘아날람바노, ἀναλαμβάνω, analambáno=올라가다’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 말에서 ‘승천ascension’이라는 말이 나온다. 참조. 루카 24,51)을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때이다.

“마음을 굳히셨다” 한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이사 50,7) 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종으로 당신을 의식하시면서 비극적인 종말을 마주하러 가시는 것을 아시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이를 악물어 단호한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온 힘을 끌어모아 용기를 내신다. 마음을 굳히고 굳은 표정을 짓는 것은 박해의 운명을 각오하고 얼굴을 굳게 하여 원수들을 맞서도록 도우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아는 예언자의 전형적인 체험이다. “보아라,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네 이마도 그들의 이마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네 이마를 바위보다 단단하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떨지도 마라.”(에제 3,8-9) 하는 말씀에 따라 예언자는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전해야 할 때가 있고, 원하지 않으면서도 행동해야만 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느끼신 두려움과 수고, 그리고 고뇌를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당신 앞에 닥쳐온 거부와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단죄, 폭력적인 죽음을 고스란히 맞아들이셔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이제벨의 박해를 온몸으로 받아야만 했던 엘리야의 절망(참조. 1열왕 19,1-8)을 느끼셔야 했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 같은 예레미야의 고통(참조. 예레 11,19)을 치르셔야 했으며,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기 위한 “주님의 종”이 겪어야 했던 이사야의 수고(참조. 이사 53,12.13-14)를 겪으셔야만 했다.

2.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사마리아인들…불을 불러내려”(루카 9,51-6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음을 굳히시고”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루카 9,52-53) 갈릴래아 출신 유다인들은 그들의 주요 축제일이 되면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 가장 짧은 지름길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참조. 루카 10,33-35)라는 유명한 비유를 통해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라고 몸소 말씀하실 정도로 사랑하시고,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행적을 찬양하였다고 알려지는(참조. 루카 17,15-16) 사마리아인들로부터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이 배척을 받는다.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분열주의자들이요 불결한 이들이며 쓰레기라고 취급받으며 억압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갈릴래아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믿지 않고 거부한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루카만의 이야기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부 왕조 이스라엘을 패망시킨 다음부터 이스라엘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생긴 혼혈족이다. 이들을 반半이교도로 생각하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협력하겠다는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부하자, 이에 맞서 사마리아인들은 야훼 신앙을 변질시켜 일종의 혼합교를 신봉하고 가리짐 산에 성전을 세웠다. 따라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사이가 나빴고(집회 50,25-26 요한 4,9;8,48), 적어도 500여 년 이상 서로 적대감 속에 살고 있었다. 이런 배경 안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루카는 기록한다.

루카는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두 제자의 반응을 기록해준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9,54) 예수님의 공동체 소속으로서 예수님께서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마르 3,17)이다. 그들은 기분이 나빠 화가 나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신 능력을 신뢰하면서 예수님께 제안한다. 아마도 엘리야가 청하여 적대자들을 쓸어버리려 내려온 “주님의 불길”이요 “하늘의 불”(참조. 1열왕 18,36-40 2열왕 1,10)을 생각하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가 행한 일을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한다고 해서 야고보와 요한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당시 열성적이고 성실한 제자들로서 그들도 예수님의 길이 단죄의 길이 아니고 자비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뜻을 비록 인간적이지만 정확하게 해석하는 제자들은 아니었을까?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무력함과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심판이나 단죄가 아니라 죄인의 구원을 도모하시고자 하는 사목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말 성경의 각주는 일부 수사본의 경우 두 제자의 말이 “엘리야가 한 것처럼 저희가…”라고 되어 있다고 전해 주며, 이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 말씀 역시 “너희는 자기들이 어떤 영에 속하는지 모르느냐?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전해 준다. 예수님 몸소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7) 하신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께서 느끼시는 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과 선교 방식에 대한 무지,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에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는 영이 자리 잡고 있음을 꾸짖으신 것이다. 불행하게도 역사 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예수님의 뜻과 원의原意를 수행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뜻에 모순되고, 악인을 단죄하고 벌하며 멸망시키려고 덤벼드는 엄한 얼굴의 재판관이자 심판관의 얼굴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제자들이 자주 생겨날 것이다. 불을 내려 벌을 주자고 하였던 바로 그 사마리아인들이 훗날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사마리아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쳐났다.”(사도 8,4-25)고 성경은 알려준다.

3. “따르겠습니다…따라라…따르겠습니다”(루카 9,51-62)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여정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세 가지 경우를 증언해준다. 먼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 한다. 확신에 차서 하는 조건 없는 제안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열정을 알아보시지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하시면서 성소聖召는 열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하지 않고 “스승님”이라 호칭한다. 아직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자신을 내어놓으려 하지만 받으려 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으면서 마치 군인이라도 된 듯이 스스로 열정적인 자가 성소자(auto-candidate)가 된다. 주님을 따르는 “이 영예는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히브 5,4)임을 알아야 한다. ‘소명’이요 ‘성소’는 쉬운 것이 아니고, 거부당할 리가 없으며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과 불안정, 형제자매로서 져야 하는 부담, 상호 간의 책임, 불확실과 불안정, “마음을 굳히고” 가야만 하는 실패의 길, 어떤 의미에서는 야생의 동물들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자가 성소는 시도해 볼 기회조차 없다는 듯이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라나선 이는 주님의 집 말고는 집이 없는 사람들(homelessness)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9,59)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계명(참조. 탈출 20,12 신명 5,16)이나 장례를 아름다운 선행으로 여기는 관습(토빗 4,3-4;6,13-15;14,11-13)에 근거한, 어찌 보면 정당한 요청을 예수님께 청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상처喪妻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곡하지도 말고 상례를 갖추지도 말라고 하신 적이 있고(에제 24,15-24),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결혼하지도 말고 향연에 참석하지도 말라(예레 16,1-4.8-9)고 하신 적이 있다. 사목자들에게 ‘요새 바쁘시죠?’가 흔하고 보편적인 인사말이 된 오늘날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으로 바쁜지를 돌아볼 일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께서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올바른 질서를 찾고 또 그렇게 찾도록 해야한다.』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통상의 가족 관계나 종교적인 계명의 준수라는 굴레마저도 단호하게 끊으라 하신다. 아무리 거룩한 계명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분을 선택할 수도 있고, 죽은 이와 계속 머무를 수도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확고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가정이나 가족을 두고 우리는 우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받아들이거나, 자신도 모르는 과장에 과장을 더해 모든 것을 가름할 수 있는 대명제로 여기거나,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것이라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그에 함몰되거나, 마치 가족만이 최종적이고 영생을 위해 본질적인 것인 양생각하면서 가족과의 단절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아등바등하기 일쑤이다.

세 번째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주님을 따르겠다는 약속의 전제 아래 가족이나 부모, 식솔이나 형제자매들과의 작별 인사만을 청한다. 엘리야의 부름을 받은 엘리사 역시 같은 요청을 하였고, 엘리야가 이를 허락하였으므로(참조. 1열왕 19,19-20) 어찌 보면 이는 타당한 요청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엘리사의 요청과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밭고랑을 잘못 팔 뿐만 아니라 방향을 잃는다고 하시면서 그런 이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신다. 도달해야 할 목표에 전념하지 못하고,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면서 지상의 삶에서 누린 여러 가지 것들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이미 나선 길에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미련을 지적하신다.

어느 면에서 다소 슬픔을 느끼면서 오늘 복음의 강해를 줄인다. 성소를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어찌 보면 복음이 전해 주는 충격적인 급진성과 전격성을 우리 자신이 제대로 살지 못하기에 섣불리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목자들이 복음 자체가 강하게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전달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지고 자신이 없어졌으며 힘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슬프다. 성소 부족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값을 제시하지 않은 채 상품만 소개하는 떠버리처럼 소명을 미화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유혹이고 세속화일 뿐, 복음의 전격성은 결코 아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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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6월 26일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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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 해방의 노마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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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부르심과 추종 자세에 관한 전승 세 가지를 모아서 대화의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 제자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루카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교우들의 신앙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뒷 부분의 에피소드 세 가지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다음 이미 제시한 바 있는 제자되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이미 제자들에게 제자도(弟子道)에 관해 말씀해 놓았습니다.

먼저, 첫째 사람은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고 말합니다. 뭔가 진정성 있게 들리는 말이라서 칭찬을 들을 만도 한데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유명한 구절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동문서답으로 들립니다. 이것은 ‘제자가 되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그네와 같이 가난하고 자기 집 없이 사셨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노마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정주가 아니라 계속하여 움직이는 유목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거친 가시밭길을 감수하고 풍찬노숙(風餐露宿),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의 떠돌이 생활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 사람은 자기가 먼저 자진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하고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이 둘째 사람은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우선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깜짝 놀랄 답변을 주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이 말씀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마치 천륜과 인륜을 거스른 듯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은 최우선의 의무였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십계명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례식은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아버지 장례를 내버려 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지금 당장”“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가 중요합니다. 악마는 타이밍에 있습니다. 악마는 끊임없이 ‘지금은 아니고 다음’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그 달콤한 속삭임에 걸려 실족합니다. 결국 우리는 악마가 속삭이는 “다음에”라는 기도를 주문처럼 따라 바칩니다.

“예수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고 다음부터 따르겠습니다. 취직한 다음, 결혼한 다음, 아이가 좀 더 큰 다음,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 직장에서 진급한 다음, 돈을 좀 더 벌어놓은 다음, 좀 더 건강해진 다음, 지금의 실패를 극복한 다음, 나이가 더 든 다음, 손자 다 키운 다음, 농사철이 지나고 난 다음, 은퇴한 다음 따르겠습니다. 다음, 다음에 여유가 생기고 한가할 때 당신을 꼭 따르겠습니다.”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에 혹은 나중에 가 아니라 ‘지금 당장’“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 나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단호하고 직설적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예수님은 쟁기의 은유를 들어 작별 인사조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추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고랑과 이랑이 바르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쟁기질은 뒤로 가는 게 아니기에 정면을 봐야 바르게 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첫째 과거에 아쉬움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가 화려했던지 불우했던지 간에 새로운 이랑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과거와의 인연을 끊고 파부침주(破釜沈舟)하는 각오가 요구됩니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트라우마, 어두운 자책감이나 후회, 돌이킬 수 없는 욕망과 죄책감 등에서 탈주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고 말한 바로 그것에서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유와 해방으로 경험됩니다.

자유와 해방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큰 화두가 됩니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15번이나 언급하고 예능에서는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반지성주의적이고 반문명적인 신자유주의적인 세태에 휘둘리는 등장인물들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해방일지를 만들어나갑니다.

<나의 해방일지>에는 소외된 이들이 등장하고 삼 남매는 해방을 꿈꿉니다. 남매는 모두 계란 흰자위라 할 수 있는 경기도에 삽니다. 노른자는 서울이고 이를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가 경기도라고 표현합니다. 한다. 이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이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헐벗은 반복에서의 해방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헐벗은 반복에는 가족들이 함께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출근하고, 일하다, 술 먹고, 퇴근하는 일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잉 반복의 장면은 자신의 삶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체험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대와는 달리 역시나 조금도 새롭지 않은 헐벗은 반복의 연속이 삶임을 표현합니다.

지루한 반복을 지속하는 등장인물이 해방되고자 하는 것은 소소한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그들의 해방은 한결같이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들의 해방일지를 분석해보면 돈, 오염되고 감동 없는 사랑, 인정욕구, 선입견, 껍데기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그 근저에는 각자의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해방의 능력을 포기한 채 살아가지만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기나름대로의 고유한 해방의 길을 찾아 노마드합니다. 해방은 ‘뚫고 나가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필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큰 등장인물 염미정은 말합니다.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관계를 관통하고 뚫고 나가는 것이 해방이라면 그것의 추동력은 추앙과 환대입니다.

첫째 추앙이란 생경하고 원래 뜻에서 많이 변주된 단어인데 한 마디로 무조건적인 응원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염미정은 말합니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둘째 환대라는 개념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내용이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보자”.

프랑스의 레비나스가 말하는 환대는 타자와 약자를 향한 무조건적 관용과 수용을 의미합니다. 추앙은 무조건적인 응원이며 환대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지칭합니다. 추앙과 환대란 결국 주체와 대상이 상호인격적으로 조건과 상황과 가능성의 영역에서 응원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를 있는 그대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추앙과 환대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추앙과 환대는커녕 거절당한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상에서 어떻게 해방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드라마를 보면 해방은 관계 안에서 서로 상호주체적으로 추앙하고 환대하는 데서 선물로 발생합니다. 거대담론의 이론이 아니라 미세한 상호 관계에서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고 수용하는 데서 해방일지는 실현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두 부분적으로는 해방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맛보는 해방의 경험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내가 달라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전반적인 삶에서 완전한 해방은 요원해 보이고 근본적인 해방은 불가능하지만, 추앙과 환대를 통해 상호주체적으로 서로 해방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노마드 인생 안에서 추앙과 환대는 일상의 헐벗은 반복에서 탈출하게 하는 추동력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아무쪼록, 다가오는 이번 한 주간도 서로 간의 추앙과 환대로 나의 해방일지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제자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노마드하는 한 주간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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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6월 26일
  |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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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독서와 복음은 따름이 주제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차이가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를 따르기 전에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하고 있지만(1열왕 19,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사람들에게 금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내용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엘리사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받아 입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1열왕 19,21) 또한 자기가 농사를 짓던 쟁기를 부수고 겨릿소를 잡아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이 행동은 과거와 인연을 끊고 예언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부르심에 대한 기쁨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있는 모습이다.

루카 9,51-62 :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 앞에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51-52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하신 순간을 맞고 계시다. 이 순간은 평범하지 않은 엄숙하고도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마음으로부터 확고히 결정하신 여행은 예수님께는 죽음과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기 위한 여행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이기 때문에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늘에 올라가실 때”(51절) 라는 말은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질 파스카 신비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고통의 신비이며 동시에 영광의 신비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보여준 적개심은 예루살렘에서 군중들이 보여줄 맹렬한 반대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요한과 야고보는 “하늘에서 불을 불러”(54절) 벌을 내리자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다.”(56절) 정말 그 순간 사도들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몰랐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따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향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길과 영광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루카는 이 세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우리에게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하느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7-58절)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예수님께서는 당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셨다. 마지막 순간에 차지하시는 십자가도 다른 사람들이 짊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유물뿐만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부터도 자신을 끊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59-60절) 죽은 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아직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다(로마 6,13 참조). 이 생명은 복음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다시 생각한다든지 향수에 젖어 뒤를 돌아봄 없이 항구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1-62절) 돌투성이의 밭을 가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갖지 않고서는 헛된 수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 장면을 보면 누구도 제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저마다 자기 일을 내세우며, 어떻게 해서든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거머쥐고 있으려고 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부름을 받고 이미 내디딘 첫걸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그의 과거 생활로부터 갈라놓는다. 이처럼 부르심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 이전의 상태에 머무는 것과 따르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입장”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D. Bonhöffer, Sequela, Brescia 1971, 2a, p. 41)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내적 자유에 대한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말한다. 자유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고 보존될 수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갈라 5,18) 참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만이 주님이 어디에서 부르시든지 그분을 따라갈 수 있다.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말씀의 실천에서 온다.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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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2년 6월 26일
  |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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