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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14
작성일 | 22.07.15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좋은 몫’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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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셋째 주일은 주님의 창조질서 보전에 유익한 몫을 선택하여 더위에 땀 흘리고 있는 농민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농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빼앗기지 않을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2)고 격려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친교로 주님의 뜻을 따라 각자의 소명에 충실할 부름을 받았습니다.

의인 아브라함이 마므레에 살던 시절 한 여름 대낮에 주님께서 그를 방문하십니다.(제1독서) 아브라함이 신비한 세 사람의 그룹 지도자에게 ‘나리’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주님인 줄 몰랐습니다. 두 분은 나중에 시중드는 ‘천사’로 밝혀집니다.(창세 19,1)

천막 입구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이 달려 나가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하고 경외하며 모십니다. 발을 씻으시게 물을 떠오는 겸손한 봉사를 합니다. 가족들은 한 말 가량(3 measures, seahs)의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고, 원기를 돋우도록 우유와 치즈로 요리한 송아지 고기로 상차림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한해 뒤에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축복하십니다. 아브라함은 99세 때 하느님과 할례 계약(창세 17,1 이하)을 맺었습니다. ‘아들의 약속’이 이루어진 후 그는 주님의 흠 없는 증거자가 됩니다. 사라는 이 말을 듣고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내 남편도 나도 늙은 몸인데’ 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듬해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Isaac, 주님의 미소)이라고 짓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직무인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일꾼’이 된 소명을 고난 속에도 기쁘게 수행합니다.(제2독서)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 육신으로 채운다”(콜로 1,24)는 표현은, 십자가의 수난에 역사의 예수님께 부족함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도가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고난에는 위선자들의 소행은 물론 종말에 일어날 환난도 포함됩니다.

바오로 서간에 드러난 특색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구원의 신비를 알리는 일입니다. 구약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그리스도의 신비가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소망합니다. 말씀의 선포는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완전한 사람’(마태 5,48)으로 굳건해지는 성화의 길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 소명에 교회의 성도’들이 모범이 되어주기를 당부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10,38-42)에서 예수님은 자매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리아(동생)는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혼자 손님접대에 부담을 안고 불안해하던 마르타(언니)는 주님께 다가가 동생이 자기를 도와주도록 일러주시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가족 제도와 남녀 성별차이라는 당시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두 여인을 가르치는 일은 놀랍습니다.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요한 11장)와 제자들을 포함한 남자들의 공간에 함께했음이 분명합니다. 남자는 자발적으로 참석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에만 부름을 받게 됩니다.

복음의 메시지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가 주님과 마주하는 천상의 상태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지혜를 갈망하고, 시중드는 일에 바빠서 천상적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내적 잠심(기도)의 의미를 강조합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14; 암브로시오 루카복음서주해, 1720)

수도원 전통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은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로 이해합니다. ‘기도와 말씀봉사에만 전념’하겠다는 사도들의 결심(사도 6,4)처럼 매일 성경을 읽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수행을 우선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회칙에서 “기도하고 일하라”고 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바이러스를 이겨낼 항체”(2017.12)라고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앙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으로 자라난다고 가르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서 침묵 중에 말씀을 경청하는 관상기도에 열정을 보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 곁에서 친밀한 우정을 쌓고 침묵 속에 말씀을 경청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몫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도 이러한 만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과주의와 생산성이란 잣대로 업적을 평가하는 오늘날 주님의 말씀 묵상과 충실한 기도의 힘은 참으로 값진 무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너무 많은 일에 매달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활동주의는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말씀의 경청과 사랑의 봉사는 어느 것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흔들림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기도 속에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이 우선이며,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좋은 몫의 선택이요 소명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처럼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충실한 믿음은 바로 기도의 열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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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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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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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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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마르타와 마리아를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잘 알아들으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마르타가 하고 있는 일을 대조해서 보는 관점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초대를 받아들이신 것은,
마르타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신 일이 아니라, 마르타의 집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은 바로 ‘말씀’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물론 마르타의 입장에서는 주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싶어서 한 일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싶어서 한 일입니다.
마르타의 그 순수한 마음을 폄하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곧 주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은총’을 잘 받는 것이 주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아먹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이 말은, ‘말씀’에도 또 ‘성체성사’에도 모두 적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먹는 것이 예수님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기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만 생각하다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먹는 일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고,
마르타가 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고,
마르타가 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말리는 베드로 사도에게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마르타의 경우는 그렇게 혼날 정도로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막으려고 했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물론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막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일을 막은 것과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있어야 ‘말씀’을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요한 6,68), 즉 ‘생명의 양식’입니다.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은 ‘그냥 먹어서 없어질 양식’입니다(요한 6,27).
물론 마르타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음식이지만, 그래도 ‘없어질 양식’입니다.
그러면 마르타는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가?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가?)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먼저 했어야 합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5)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라는 말씀에서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물론 마르타는 자기 자신이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좀 더 잘 대접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마르타 자신이 하는 일’을 걱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하는 일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신앙의(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몸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지만, 영혼을 위해서
말씀을 받아먹는 일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쁜 몫을
선택하였다.”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데,
좋은 몫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뜻은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좋은 몫’은 신앙생활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음식만(일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을 중단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다면,
오히려 그 일을 더욱 쉽고 빠르게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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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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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가 세 번째 복음을 기록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경험을 지닌 교회의 사람으로 자신을 의식하면서 이를 복음의 2부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려 한다. 루카는 당시 교회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예배 방식이나 생활 양식에서 다양한 모습이 있고, 이들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 있음을 기록한다. 예를 들어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식탁 봉사와 말씀 봉사 사이에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말씀 봉사에 전념하고 다른 일곱 봉사자를 선정하여 식탁 봉사 직무를 수행하도록 이를 재조정했음을 증언해 준다.(참조. 사도 6,1-6) 이러한 해결책이 교회에 유일한 모범이라거나 권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하나의 해결책이었을 뿐, 또 다른 방식의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해결책은 존중되어야 할 우선순위, 곧 하느님 말씀이 반드시 전해져야 하고 선포되어야만 하며 이러한 말씀의 우선권이 무시되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루카만이 전해 주는 오늘 전례의 복음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루카 10,38-42)

“그들(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근처의 베타니아라는 곳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라는 남매가 사는 집에 숙식을 위해 초대를 받으신다. 이런 일은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 전前 주간에 자주 발생한다.(참조. 마르 11,11 마태 21,17 요한 12,1-11) 넷째 복음(특별히 요한 11,1-43)은 예수님께서 무척 사랑하신 이 세 남매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의 전후 맥락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으신(참조. 루카 9,51-55)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가정, 다정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휴식도 취하시고 당신의 사명에 대하여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영접으로 그 집에 들어가신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이는” 환대(hospitality)는 자비의 행위이며 동시에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중동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누군가를 손님으로 모셔 들이고 환대하는 것은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이는 광야를 떠도는 유목민들의 처지에서 자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 울타리가 생길 수 있고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다. 롯에게 환대를 받아 롯의 집안에 들었던 두 천사는 소돔의 멸망에서 롯을 구하여 주었고(창세 19,1-29 참조), 기브아의 노인이 맞아들인 길손이 입은 비극으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기브아인들의 만행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판관 19,11-20,1이하 참조), 욥은 “언제나 길손에게 문을 열어놓아 나그네가 밖에서 밤을 새운 일이 없다(욥 31,32)”라며 자랑하였고, 열왕기 하권 4장에 나오는 4가지의 일화들은 하나같이 예언자 엘리사를 통하여 절망적인 상황이 어떻게 희망과 후한 보상으로 갚음을 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의 제1독서(창세 18,1-10)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 분의 손님을 모셔 들여 얼마나 관대하게 대접하였으며 그 결과 사랑스러운 아들 이사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신약에서도 ‘환대’는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님 친히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시며 이를 강조하셨고(마태 25,35이하),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마르 1,29 이하)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을 대접한 경우가 많았고(마르 2,15이하),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실 때 환대라는 주제는 중요한 주제였다.(루카 14,16이하;12,37;13,29 등) 예수님께서는 집이 없으셨고, 자주 많은 이들의 손님이셨다.(루카 7,36이하;9,51이하;10,38이하;14,1이하) 바오로 사도의 3차에 걸친 전도 여행도 시종일관 환대와 거절의 연속 안에서 이루어진다.(사도 14,28;15,33;16,15.34;17,1이하;18,3.27;21,16)

교회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4세기 안티오키아 교회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과부와 병든 이와 나그네를 돌보고 있었다는 기록처럼 환대는 초대교회에서도 중요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군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수많은 보안 장치와 소위 cctv 카메라의 감시망과 두려움 속에서 맞아들인다. 과연 소위 문명화된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너무나도 가진 것이 많고, 행여 잃을 것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코라도 베어갈 듯이 사악한 세대를 두려움 속에 살아간다. 현대인들을 환대의 덕에서 멀어지게 하는 적敵은 바로 ‘이기심과 교만’이다. 머무를 곳이 없어 외로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항구한 손님이시기를 바라고 그분을 우리 집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집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손님이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창세 18,3-5)”라고 청하였고, 이내 아들을 얻는다.

복음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루카 10,39-40ㄱ)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인 마르타는 자기 집에 모신 라삐 친구를 만나 그분께 맞는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는 등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다. 다소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랄 수 있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복음에서 예수님의 방문에 스승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을 선호하는 관조적인 여성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 그분 앞에서 전형적인 제자의 자세를 취한다.(참조. 루카 8,35 사도 22,3 - “발치”, “문하”) 라삐의 전통에서는 『너의 집이 지혜로운 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 발끝의 먼지라도 붙들고 그들이 하는 말씀을 허겁지겁 마셔라.(미쉬나Mishnah, Avot 1,4)』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여성들이 아닌 남성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같은 미쉬나에 『자기 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이는 그녀에게 지저분한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소타Sotah 3,4)』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여성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물의를 일으킬만한 내용이었다. 그런 배경 안에서 마리아의 태도를 본다면 마리아가 상당히 주체 의식이 강하고 자의식이 강한 용감한 몸짓을 진지하게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라는 라삐가 자기를 내치지 않으실 것이며 남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제자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사실 루카는 이미 복음의 앞장에서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의 활동을 도왔다고 하는 사실을 기록하였는데(참조. 루카 8,2-3), 여성 제자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ㄴ)라는 사실을 넘어 오늘 복음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다른 남성 제자들처럼 동등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대상으로서 여성(마리아)를 묘사하는 것이다.

2. “보고만 계십니까?…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38-42)

바로 이 부분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한 마리아를 본 마르타가 어느 정도 화가 난 듯이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면서)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40ㄴ) 우선 마르타가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 Kýrios)”이라 부르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두고 “주님”이라 하는 칭호는 “주님이십니다.”(요한 21,7)에서 보듯이 예수님 앞에서 교회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는 칭호이다. 넷째 복음에서 마르타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보다도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하면서 예수님께 가장 최고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동생 마리아를 두고 예수님께 다가온 마르타는 거의 짜증을 내면서 동생과 자기 사이에 예수님의 개입을 밀어붙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마르타의 열성에는 예수님께 그저 하나라도 더해드리고 잘해드리고만 싶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초조한 근심이 담겨 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나머지 잠시라도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누군가가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 태도와 감정을 보인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개입하신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아무런 꾸지람이나 책망이 없이)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41)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교회 안에서 수 세기 동안 반복되어온 그런 내용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동안 교회는 이 말씀을 마치 ‘관상 생활’을 미화하는 말씀으로, 소위 신新플라토니즘neo-platonism의 독毒에 감염되어 ‘관상 생활’을 ‘활동 생활’보다 우위에 두는 듯한 격언처럼 받아 들여온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에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 사이의 가벼운 긴장과 염려에 대한 우정 어린 부드러움이 담겨 있을 뿐이다. 굳이 지적하자면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예수님과 더욱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라는 목적보다도 여러 다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마르타를 순간적으로 사로잡았을 뿐이다. 상대방을 생각한답시고 흥분하고 걱정을 많이 하면,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떠나 자신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하면서 그것이 상대방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당신 때문에 고발을 당하게 될 때 “너희는…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11-12) 하시고,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22) 하신다. “걱정”이나 “근심”(루카 21,34), ‘걱정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마디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 merimnáo=to be anxious’라는 동사이고, “근심” 역시 그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 mérimna이다. 일상의 동요이다. 여러 가지를 종합할 때 오늘 복음을 기록한 루카는 바오로 사도가 기록한 코린토 1서 7장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거나 시선을 빼앗겨 산만해지거나 헷갈리지 말고(1코린 7,35 아페리스파스토스ἀπερισπάστως, aperispastós = without distraction),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라고 당부한다. 이러한 당부가 우리 각자에게 유효한 것처럼 마르타에게도 유효하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분주하게 일하면서 바쁜 마르타를 꾸짖지 않으신 것만큼은 분명하다. 주님께서는 여럿이 함께 둘러앉은 식탁을 사랑하셨고, 좋은 음식과 좋은 포도주를 남녀 친구들과 즐겁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신 분으로서 마르타에게 당신의 현존과 존재를 잊어버릴 만큼 시중드는 일과 식탁 봉사를 너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걱정하는 것과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다르고, 일을 한다는 것과 흥분한다는 것은 다르며, 누군가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서둘러 일을 해치우는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를 염려하며 차분하게 그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과 태도는 ‘환대’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다.

3.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좋은 몫”(루카 10,38-42)

복음의 끝 절에서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하신다. 진정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제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 바로 그 “한 가지뿐”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는 당신을 “배었던 모태와…젖을 먹인 가슴”조차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 행복하다.”(루카 11,27-28) 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태胎가 행복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특별한 음식을 대접한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 드리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만이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곧잘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봉사가 쌓여있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핑계나 구실을 발명해내기까지 하므로 ‘말씀의 경청’이라는 이 우선권을 지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 내면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스르려는 저항이 있고, 말씀을 듣게 되면 지켜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아예 듣지 않으려는 유혹도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어 하며, 듣고 순명하려 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유혹을 산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마리아보다는 마르타 쪽에 가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면서 부끄러움에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것이 “제가 받을 몫이며 제가 받을 잔이신 주님”(시편 16,5) 이라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결코 “빼앗기지 않을 좋은 몫”이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여성들도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남성 제자들처럼 사목과 디아코니아diakonía,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청’으로 부름을 받았다. 어찌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나 대립처럼 여겨지는 부분은 활동과 관상의 대립이나 긴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의 대립과 긴장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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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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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 두 자매의 집에 가셔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손님 시중들기에 분주했습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와서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예루살렘 근방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복음서들은 그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교회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게 된 바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던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마르타와 마리아도 순전히 오늘의 이야기를 위해 등장한 인물로 보아야 합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주인공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두 자매간에 발생한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손님 시중드는데 협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만 앉아 있는 동생을 언니가 손님인 예수님에게 와서 비난했다면 자매간의 갈등은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갈등을 해소하고 두 자매를 화해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르타가 많은 일 때문에 부산을 떨고 있고, 마리아는 필요한 한 가지, 좋은 몫을 택했다고 말씀하셔서 자매간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예수님이 소중한 것은 그분이 우리 인생살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층과의 갈등으로 당신 생명을 바치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르타와 같이 여러 가지 세상일에 부산을 떨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두 개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입니다.

복음서는 우리가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문서입니다. 인간이 하는 말은 언제나 그 시대적 여건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오늘의 복음은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생활보다는 수도원 안에서 관상(觀想)하는 수도생활이 더 우위에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마르타는 사도직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관상 수도자의 모습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보이는 이웃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더 중요했고, 보이는 노동보다 보이지 않는 생각 혹은 관상이 더 소중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을 위해 사도직 활동을 하는 수도자들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한다는 수도자들이 더 돋보였습니다.

옛날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했습니다. 황제와 영주는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고, 세금을 결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는 통신매체를 통해서 중요한 일의 결정 과정을 봅니다.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집안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에 분주합니다. 보이는 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보이는 이웃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들이는 노력을 하는(마태 25,31-46)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비인간적이었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수도자들은 세상과 스스로를 격리하여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합니다. 관상이 활동보다 우월하고, 선비가 농사짓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세상과 격리되면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세상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람답게 삽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격리되어 하느님만 생각하고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옛날에 입던 옷이니까 입고, 옛날에 하던 짓이니까 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 사회의 사고방식, 차별, 우월감 등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자기가 사는 시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만들어 놓은 차별과 우월감을 전면 거부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고 우리를 살리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나라와는 다릅니다. 우월함과 차별을 찾고 만드는 우리의 나라입니다.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관상하는 사람과 활동하는 사람, 우리는 이런 차별을 끊임없이 만들면서 우리의 나라 안에 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삶으로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차별을 그 은혜로우심과 사랑의 실천으로 극복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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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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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수원]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4]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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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2] 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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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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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부산] 풍요로움의 진정한 가치는?  [5] 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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