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13 46.8%
연중 제17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71
작성일 | 22.07.20
이번 주 복음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1-4절), 끊임없이 간청하는 친구에 관한 비유(5-8절), 그리고 그 비유의 적용(9-13절)이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시고 떠나신 소위 ‘예루살렘 상경’ 동안 예수님의 태도에 관해 루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여정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잠시 길을 멈추시기도 하고 쉬시기도 하셨으며 기도하시기도 하셨다. 예수님과 길을 나선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으며 마음에 와닿는 예수님의 행동들에 관해서 질문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 “아버지”(루카 11,1-13)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아침나절인지 저녁나절인지, 때는 명확하지 않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제1독서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 할 때 이 벌을 면하기 위해 50명으로부터 10명에 이르기까지 에누리를 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다고 하는데,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름 아닌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기도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이처럼 간절히 기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께서 인간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루카 3,21),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치유하신 다음에(루카 4,42), 열두 사도를 부르실 때(루카 6,12-13),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해 물으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루카 9,18),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루카 9,28), 베드로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때(루카 22,32), 수고 수난을 앞두고 마음이 괴로우실 때(루카 22,41),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당신을 못 박는 사람을 용서해주시라고 청할 때(루카 23,34),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루카 23,46)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내가 주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역설적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이 순간도 기도하고 계신다. 오늘 한 번 더 나에게 새로운 날을 열어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또 다른 하루를 허락하시고 나를 한 번 더 믿어주고 계신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이처럼 조물주께서 피조물인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감동해가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서 루카나 마태오가 전해 주는 바에 따라 두 가지 버전이 있는 대로, 간결하지만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루카의 버전은 마태오 버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짧으면서 유다인이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하는 기본 기도인 카디쉬(קדיש, Qaddish, =holy)에 견주어볼 수 있는 두 가지 요청, 즉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ㄴ) 하면서 하느님 이름의 성화聖化와 왕국의 도래라는 내용으로 전반부를 이루고, 이어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3-4) 하면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라는 세 가지 요청을 담는다. 많은 말이 담기지 않고 단순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이다. 유사 이래 그 어떤 스승도, 그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도 이처럼 완벽하게 인생의 명제를 요약한 기도문을 설파한 이가 또 없었다. 그래서 성 테르툴리아노(155~240년경)는 이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 복음의 요약』이라 하였다. 초대 교회 공동체 삶의 요약이며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삶의 요약이기도 하다. 너무도 중요한 기도이고,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강해는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어지는 비유와 그 적용에 치중하여 ‘강해’한다.

2. “줄곧 졸라대면…필요한 만큼 다 줄 것”(루카 11,1-13)

루카만이 전하는 비유다. 루카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요청을 위한 기도가 열렬하고 고집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하느님 앞에서 확실하고도 항구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려 한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렸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1,5-7)라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서 제삼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비유를 시작하신다. 비유는 거침없이 단숨에 읽힌다. 비유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로 끝난다.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려 하다가 “줄곧 졸라 대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순한 비유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줄곧 졸라대는 것은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다소 귀찮고 듣기 싫은 소리이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친구의 요청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도록 친구의 마음을 바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하시면서 비유를 몸소 제자들의 처지에 적용하시면서 설명하신다. 비유에서 ‘기도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는 제자의 요청에 대답의 연장선상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분명하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간 사람처럼 “찾아가고”, “말하고”, “졸라대라” 하신다. 그리고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신다. 그러면 “주시리라”, “얻으리라”, “열리리라” 하신다. 두 개의 비유가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이처럼 3가지 동사動詞들이 거듭 짝을 이루고 있음에 유의하여 읽을 것이다.

“청하여라” 하심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두려워하지 말고 단순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들어주시고야 말 것이니 청하는 것에 절대 지치지 말고 청하라 하신 것이다. “찾으라” 하심은 찾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찾아져야만 하는 가치라는 확신도 확신이지만, 때로는 어렵고 힘들며 때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찾아지고야 말리라는 확신이다. 약속이 있는 곳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깨어있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문을 두드려라” 하심은 안에서 그 문을 열어 나를 맞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희망이다. 그러나 때로는 반복해서 두들겨야만 할 때도 있다.

비유를 들으면서 우리에게는 금방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반복적인 간청을 도대체 왜 필요로 하시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청을 받고 싶으시며, 우리에게서 찾아지시고 싶으시며,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를 바라시는가? 과연 하느님께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기나 하신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하시지는 않는다. 바로 우리다.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청해야만 되는 존재이며, 찾아져야만 하고 또 찾아야만 하는 존재이고, 우리 밖에서 우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우리는 너무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허겁지겁 부질없는 것을 애써 찾느라 하느님께서 애타게 나를 찾고 계심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나의 귀를 때리고 내 마음의 문을 수도 없이 두들기며 문밖에 서서 ‘들으라’ 하시고 ‘열라’ 하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무디어져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존재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으신 주님을 위해 문을 열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 기도를 새기고, 그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 되게 해야 하며, 우리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간청이다.

3.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3)

앞선 비유의 적용을 이렇게 풀어주신 주님께서는 의문문의 형태로 다른 내용 하나를 덧붙이신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 참조. 마태 7,9 이 내용은 일부 필사본에만 전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이 대목에서 『“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요, “생선”은 신앙을 처음 얻을 때의 그리스도교인의 세례 때 머리에 붓는 물과 연관된 상징이요 또한 초대 교회의 징표이니 믿음이며, “달걀”은 알을 깨고 깨어나는 생명 곧 희망의 상징이니 이 비유 안에 사랑, 믿음, 희망이 모두 담겼다.』라고 설파한다. *실제 살아계신 아버지를 내다 버리고 유기하기까지 하는 패륜적인 오늘날의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부정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말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유의 초점은 그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부분의 예수님 말씀에 관해서는 최근 몇 세기 동안 연구가 깊지 못하여 겉핥기식으로 묵상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너희가 악해도(πονηροὶ, poneroí, =being evil)”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사악하다는 전제 아래 말씀하신다. 우리 안에는 충동이 있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고 우리 자신만 잘났다고 하려는 본능과 필라우티아(φιλαυτία, philautia, =self love, 자기애自己愛), 이기적인 사랑이 있다. 이런 것이 우리 인간의 조건임에도 대부분의 혈연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서로 선을 베풀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루카 18,19) 하는 말씀처럼 유일한 선善이시며 선 자체(아가토스ἀγαθὸς, agathós)이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야” 무엇인가를 청하고 찾으며 구하는 당신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선하시겠느냐 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지상에 있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쁜 아버지로 자주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볼테르Voltaire(1694~1778년)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땅에 계신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은 듯하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한 화답이라도 되듯이 엥겔스Engels(1820~1895년)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자기 친아버지보다 더 나쁘고 엄한 아버지로 여기면 무신론자가 된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안에서 엄하신 심판관이시며 보복적이고 가혹한 하느님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인간이 그러한 하느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도록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더 선하신 하느님,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그 무엇이라도 내주실 좋으신 하느님에 관해 말씀하신다.

이 마지막 대목에 기도에 관한 결정적이면서도 중요한 내용이 더 담겨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가 전해 준 말씀들에서 출발하면서 그 내용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마태오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라고 기록한 부분에서 루카는 마태오의 “좋은 것”을 “성령”으로 대치한다. 루카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 꼭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이교도 철학자 루크레찌오Lucrezio(BC 99~55년)가 말한 것처럼 기도는 『신들을 귀찮게 하는 것(사물의 본성, 4권 1239)』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빈말을 되풀이…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 생각…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6-7) 하셨듯이 기도는 빈말과 많은 말로 하느님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그대로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고, 때로는 무지하고 이기적이면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고 청하기까지 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여주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찾고 두드리며 구할 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임하시는 “성령”을 주신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6) 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성령”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응답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청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이시면서 우리를 늘리시고 우리의 청을 확장하도록 하셔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받도록 하신다.』 한다.

인간의 찾음이 필요 없는 분, 인간의 말이 필요 없는 분, 인간에게 사정할 것이 전혀 없으신 그분께, 아쉬운 것은 우리이니 우리가 그분을 찾고, 말씀드리고, 졸라대야 한다. 사람에게 청할 것이 없으신 분,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 없으신 분, 사람에게 두들길 것이 없으신 분이 그분이시니, 우리가 그분께 청해야 하고, 그분을 찾아야 하며, 그분께 사정하면서 그분 계시는 곳을 두들겨야 한다. 그러면 설령 인간적으로 언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 방식일지라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잘” 주실 것이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잘”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제대로 “잘” 열릴 것이다. 아멘!

----------------------------

작성자 : 벤지
2022년 7월 24일
513 46.8%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기도의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 안에 기도는 단순합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로 준비를 하라는 말씀도 없고, 치성(致誠)이나 제물(祭物)을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기도에 요구되는 복장도 없고, 기도하기 위해 가야 하는 장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내용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자로 군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그분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베푸신 생명이면,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병든 이를 고쳐서 미래를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배워서 실천해야 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 6,36 참조)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분을 이용하여 우리의 소원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온 세상이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여 아버지를 받들어 사는 자녀가 될 것을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아버지로 계시는 나라가 이 세상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가 제일 먼저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원하는 것이 자녀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실천 안에 함께 계실 것을 빌고, 기도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우리의 노동으로 얻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입만 벌리고 앉아서 하느님이 먹여 주실 것을 기다리겠다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에 감사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또 이어집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조건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것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그 이웃에게 실천하고 감사드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삶의 공간입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우리 삶의 공간입니다.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38).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한 사람 잘되자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각자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 친구를 졸라대는 사람과 같은 신뢰심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적극성과 신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말씀하는 선언입니다. 선언만으로는 부족해서 예수님은 듣는 사람을 설득하는 말씀도 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득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애써 말씀하십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당신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착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큰 신뢰심으로 다가가야 하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아버지로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우리의 삶에 살아 계시면 우리가 변합니다. 인색하던 사람이 관대하게 됩니다. 명예와 허례허식을 탐하던 사람이 섬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인간이 고상한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패를 무릅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조금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은 실패를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우리 마음의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7.21
513 46.8%
인간은 기도로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 약해지신다.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덕목은 기도일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신앙생활에서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될 좋은 몫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가장 좋은 몫은 활동이나 빵이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는 기도를 할 줄 아는 능력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청원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기도의 내용‘What’과 둘째 기도의 자세‘How’에 관한 것입니다. 즉‘무엇을 어떻게’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기도할 것인가? 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대한 답안으로는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을 What 기도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주님께서 하신 주님의 기도를 자주 묵상하고 바쳐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후딱 해치우는 단순한 염경기도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같은 주문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애주애인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함축적으로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기도와 계명이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하늘에 대한 초월적인 갈망과 땅에 대한 육신적인 욕망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총 7개의 청원기도로 구성되어 있는 다주름체(Multiplicité) 기도입니다. 그 중에 전반부 3개의 꼭지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직접 청원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이름·나라·뜻을 비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 네 개의 ‘우리 간구’가 안쪽으로 주름잡혀 들어 있습니다. 후반부 4개의 꼭지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필요한 육신의 양식과 마음의 평화 혹은 영육 간 건강을 청합니다. 우리 아버지께 바치는 우리 간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우리의 죄·우리의 유혹·우리의 악(惡)을 두고 빕니다. 완벽한 청원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의 일상적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내장(內藏)되어 있습니다. 예를들면, <<우리 천국가게 해 주세요. 우리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우리 잘 먹고 살게 해 주세요. 우리 마음 편하게 살게 해 주세요. 우리 친구들과 서로 용서하며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세요. 등등>> 이 같은 순수한 우리 기도가 모두 모여‘주님의 기도’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아버지의 이름·나라·뜻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나의 나라·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거꾸로 ‘나’를 강조해서, 아버지의 이름 대신에 나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 대신에 나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 대신에 나의 뜻이 이루어지를 청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악마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먼저 아버지, 아빠의 뜻을 구하고 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간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먼저 청한 다음, 서로 용서받고 용서함으로써 아버지와 이웃과 화해하는 삶을 간구해야 합니다. 또한 나 혼자 독식하려는 유혹, 하느님 없이 살려는 유혹, 불복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힘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억장이 무너져 내려 내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절망의 고갱이에서 나도 모르게 더듬더듬 기어 나오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내가 아무리 죄인이기로소니? 하며 숨쉬기조차 힘든 흉흉한 상황에서 도저히 주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심정으로 저절로 나오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휑한 마음에 기가 막히고, 눈이 아프고,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띵한 상태에서 주문처럼 나오는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때 어떻게 혹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항구하게 청하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I 테살 5,16). 이루어질 때 까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가 올 때 까지 기우제를 지내듯이 참된 신앙인은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치지 않고 기도합니다. 하느님께 낯 뜨거울 정도로 끈질기게 청하는 사람의 모범이 오늘 제1독서에 나옵니다. 그는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그의 끈질긴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죄와 악에 기울어져 있던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기가 막힐 정도로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거의 거머리 수준입니다.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먼저 의인의 숫자를 50명에서 출발합니다. 그 다음 의인의 숫자가 45명이라도 괜찮습니까? 계속 에누리 쳐서 5명씩 그리고 10명씩 줄여가더니 마지막으로 의인이 10명이라도 되면 되겠습니까? 하고 청합니다.

우리도 무엇을 청했다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반(半)만이라도 들어주십시오.’라고 청해봐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밑져봐야 본전입니다. 그분께 딱 붙어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꾸준하게 청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면서 며칠 혹은 몇 달 못 가 포기하고서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항변하면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루카 11,9-10). 청함, 찾음, 그리고 두드림으로 점차 강렬해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끈질긴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다음에 ‘염치없이 집요하게 간청하는 이의 비유(11, 5-8)’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가 염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친구 때문에 한 밤중에 빵을 빌려달라고 하고, 그 이웃 사람은 도와주지 못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서툴게 설명합니다.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그러나 마침내 그 이웃은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졸라댐에 못 이겨 빵을 건네줍니다. 가서 간청하지 않으면 빵을 구경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문도 두드려야 열립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중국에서 내려오는 공짜를 좋아하는 왕의 전설이 있습니다. 왕이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세상 불변의 원리를 책에 담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학자들이 지식을 모아서 담아내니 책으로 수십 권이 되었습니다. 왕은 “책이 너무 많아 다 읽을 수 없으니 줄려 1권으로 말들라”고 명했습니다. 학자들은 줄이고 줄여 1권을 만들었지만 왕은 그것도 읽기 싫었습니다. 공짜 좋아하는 왕은 다시 한 줄로 줄이라”고 했습니다. 고민 끝에 학자들은 한 줄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습니다. 공짜로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을 수 없다고 공짜 좋아하는 왕을 풍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신차려라는 이야기입니다. 유위유득 무위무득((有爲有得 無爲無得)입니다. 이것은 만고 불변의 원리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완고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일지라도 그가 지속적으로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컨데 하느님을 성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다 염치를 무릅쓰고라도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아버지께서 끈질긴 간청을 확실히 들어 주는 분이시라는 것을 ‘의롭지 못한 재판관과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루카 18,1-8)에서 다시 가르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라 해도 밤낮 줄곧 조르면 귀찮아서라도 올바른 판관을 내려 주는데 하느님께서는 오죽 잘 들어주실 것인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왜 하느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청할 때 잘못된 청원을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라고 했는데 자신이 평생 먹고 살 양식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까지 자자손손 먹고 살 양식을 청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탐욕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하느님은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램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치는 기도는 하등(下等)기도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바치는 중보기도는 상등(上等)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상등기도이든 하등기도이든 자주 자주 기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고 또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완벽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늘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하면서 자주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비록 내 자신의 이기적인 것을 청한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비록 기도하지만 그것을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잘못된 기도를 할지라도 그것을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그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면 정화(淨化)해서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들어줄만 하면 들어 주시고 그렇지 않으며 고쳐서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주 자주 친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왜 우리의 기도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유한한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수 천 혹은 수만 겁의 또 다른 섭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수 억겁의 인연과 구원경륜 속에서 항상 ‘순수현실(Actus Purus)이시고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아시시기에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청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믿어야 합니다. 악한 인간들도 제 자식의 청을 들어준다면, 선하신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의 청을 더 잘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삼각형이면서 동그라미인 것을 청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허구이고 모순이기에 하느님이 줘도 인간이 가지지 못합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냉커피는 없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론적 한계와 죄의 물듦으로 청원 자체가 모순인 것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가 모르는 권능으로 동그라미이면서 삼각형을 만들어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자신의 형이상학적인 한계로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더라도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 밖에 못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배열과 배치를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지점에서, 인간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오인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셋째, 인간의 간청이 하느님께는 그대로 들어줘서는 안 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면으로 보면 한낱 철부지입니다. 이가 좋지 않는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절대 그대로 들어주셔서는 안 될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기도를 바라는 대로 들어 주시면 미래의 우리 삶이 더욱 큰 불행과 죄악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 뒤에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 주님께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심을 믿고 그분께 향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 32~33)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우리 모두 나름대로 기도 제목이 많을 터인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아브라함을 본받아 항구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바치고,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기계적으로 줄줄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주님과 함께’ 정성을 다해 바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은 불황에 주님의 기도 7가지 청원 중에 특별히 ‘일용할 양식’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내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7월 24일
  | 07.22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32   연중 제27주일 성경 말씀 해설  [5] 71
831   [수도회] 겨자씨  [11] 2972
830   [수원]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4] 2389
829   [인천] “하느님의 일, 당연지사(當然之事)”  [8] 2569
828   [서울]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7] 3013
827   [광주] 수고는 오로지 믿음의 몫  2482
826   [청주] 예수님의‘情’  [1] 53
825   [대전]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가 17,5)  414
824   [안동]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과 종의 모습  [3] 3229
823   [대구] 내 믿음의 정도는  [3] 2550
822   [마산]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  [2] 2509
821   [부산]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3] 2601
820   [의정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69
819   [춘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3] 2966
818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5] 2247
817   연중 제26주일 성경 말씀 해설  [5] 123
816   [수도회] 부자와 라자로  [14] 4062
815   [수원] 대문 앞의 라자로  [8] 2775
814   [인천] 사랑이라는 계명  [11] 2519
813   [서울] 신앙고백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삶  [10] 2578
812   [마산] “나잇살”, “낫살”  [4] 2796
811   [부산] 풍요로움의 진정한 가치는?  [5] 2717
810   [안동] 무관심과 겸손  [3] 2262
809   [대구] 내가 가진 라자로의 몫  [6] 2573
808   [전주] 선을 소홀히 한 죄  [2] 282
807   [광주] 인정받길 원합니다  [3] 2487
806   [청주]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는 교회의 신앙인  [2] 705
805   [대전] 부자와 라자로... 당신은?  [2] 341
804   [군종]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  [3] 250
803   [의정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유  [5] 2703
802   [원주] 나눔의 실천  [3] 2272
801   [춘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3] 352
800   (녹) 연중 제26주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 예화)  [6] 2308
799   연중 제25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66
798   [수도회] 돈보스코의 의미  1978
797   [인천]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1945
796   [수원] 하느님의 뜻에 맞는 재물 사용  [2] 2299
795   [서울] 재물은 천국을 가는 데 장애물로 나타나지만, 잘 사용할 때  [2] 2384
794   [부산] ‘영리한 집사(執事)’의 비유  [3] 2311
793   [대구] 약삭빠른 청지기  2000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2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