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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대축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310
작성일 | 22.11.18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곁에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들어 높이시어 오른편에 좌정하게 하심을 기린다. 1925년에 공식적으로 전례력에 들어오게 된 이 축일은 이 세상의 임금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왕의 통치권을 기억하도록 하려는 뜻으로 제정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그 의미가 깊게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시지만 이 땅 위의 임금들과는 다르게 십자가 위에서 죄수들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권세에 단죄를 받은 왕이시고,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구원하시는 왕으로서 ‘역설의 왕’이시라는 것이다.

‘다’해인 올해 전례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한다.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결국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줌에 따라(참조. 루카 23,13-26)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예수님께서는 같은 형을 받은 두 죄수와 함께 에프라임 성문을 지나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유다인들이 고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로 “골고타”라고 부르며 라틴어로 칼바리애 로쿠스Calvariae Locus(“해골” 혹은 “해골 터”)로 번역되는 곳, 전설에 따르면 아담이 묻혔다고도 알려지는 곳에 다다른다. 바로 이곳, 최악의 범죄자라고 여겨지는 이들을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고자 끔찍한 고통을 가해 처형하는 이곳에서 셋은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예수님께서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져”(이사 53,12), “죄수” 가운데 하나로서(참조. 루카 23,39), ‘새 아담’이신 분, 아니 ‘참 아담’이신 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분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잔인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가득한 장면이다.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 불과 며칠 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을 향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환호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외쳤던 백성(참조. 루카 19,38)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루카 23,35) 군중은 야속하게도 더는 예수님 편에 서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며 예수님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참담한 결말에 실망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光景을 바라보고(=똑바로 보고, 어떤 일이 벌어진 형편이나 모양새를 봄, 관조觀照, 정관靜觀, 테오리아, θεωρία, theo̱ría<학설이나 이론을 뜻하는 영어의 theory라는 말의 근원이 됨)’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3,48)고 표현하면서 회심의 여정을 시작한 것처럼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흩어져 도망가고, 환호하던 군중도 침묵하며, 아무도 편들어 주는 이 없이,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서 버림받은 상태에서 그렇게 돌아가신다. 군중은 승리와 권세, 이 세상 그 어떤 왕보다도 힘센 분으로서 승리와 영광의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자신마저 구할 수 없는 그런 분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채로 당신을 못 박은 자들과 바라보는 군중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러한 말씀마저도 군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처절한 고독과 버림 속에서 당신 사명의 시작에 광야에 머무실 때 세 가지 모습으로 닥쳐왔던 유혹(참조. 루카 4,1-12)이 예수님께 다시 세 가지 모습으로 찾아온다. 예수님의 유혹 장면 끝에서 루카는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3)라고 예고한 바 있었는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순간에 악마는 여지없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첫 번째 유혹에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표징을 일으켜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보라고 하던 유혹이 똑같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1.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루카 23,35ㄴ-43)

악마의 첫 번째 도구는 로마의 권력에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달라고 청했던 종교지도자들과 사제들이다. 성경에 정통했던 그들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루카 23,35ㄴ)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이시고, 예루살렘의 진정한 왕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시고 ‘기름 부음 받은 자’라면 다른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을 보여서 죽을 지경에 처한 자신의 처지에서 풀려나 자신을 입증해보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말과 비아냥을 들으시고도 침묵하시며, 당신의 무능을 손가락질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적대적이고도 모욕적인 언행을 무릅쓰시며 십자가 위에 그대로 계신다. 당신의 원수들까지도 자비롭게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논리를 살아내신다. 인간이 “불경한 자들”임에도, “죄인”임에도, “원수”임에도 그들을 계속 사랑하신다.(로마 5,6-10)

2.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루카 23,35ㄴ-43)

예수님께 다가온 두 번째 유혹은 정치적·군사적 권력의 도구로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이교도 군사들을 통하여 온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목이 갈라지며 타들어 가는) 예수님께 다가가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듯이)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6-37) 한다. 자칭 왕이요 메시아라면서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왕이 될 법한 소리인가, 그렇게 무력한 이가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조롱한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루카 23,38) 한다. 사람들이 조롱과 모욕으로 붙여놓은 “죄명 패”였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또 진정으로 볼 줄 아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진실을 알려주는 “패”였다. 복음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하는 동방 박사들의 질문으로 시작하여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를 달고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님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온 우주의 임금이시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콜로 1,16)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예수님께서는 정말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이시지만, 그분의 왕권은 참으로 놀라운 왕권이다. 이 세상의 왕들이 억압으로 군림하고, 명령으로 칭송을 강요하며, 자신이 공동선을 베푸는 “은인”이라고 부르게 하는(참조. 루카 22,25) 왕권과는 전혀 다른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의 왕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왕권과 그분의 다스림은 세상 것과 달라서 사랑으로 다스리고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는 사랑의 공간에 자리한 참 임금의 나라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요 임금님이시라고 할 때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왕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승리의 임금이요 금빛 찬란한 왕관을 쓰시고 온 천지가 머리를 조아리는 임금의 모습인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임금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비난을 받으며, 심지어는 처형되고 있는 죄수에게서조차 형편없는 대접을 받으며 처참하게 십자가 형틀 위에서 죽어가는 임금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우리의 왕이요 임금이신 분은 그런 분이시다. 우리의 임금께서는 화해의 왕이시고, 용서의 왕이시며, 섬김의 왕이시다. 그분의 영토는 작은 이들의 마음이며, 그분의 깃발은 십자가이고, 그분의 헌장은 산상 설교의 진복팔단이며, 그분의 무기는 오로지 사랑(왼뺨 때리면 오른뺨마저 대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며,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이고, 그분의 왕관은 자신의 피를 쏟는 가시관이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세례로 시민권을 얻는다.

첫 번째 유혹에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시며 침묵으로 응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유혹 역시 침묵으로 대하신다.

3. “메시아가 아니시오?…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카 23,35ㄴ-43)

세 번째 유혹은 고통과 죽음을 함께 맞고 있었던 죄수에게서 온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죽어가면서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루카 23,39)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가던 죄인들 가운데에서(참조. 루카 3,21) 당신의 신비를 시작하셨고, 평생 죄인들 사이에서 지내시다가(참조. 루카 15,1-2;19,7), 이제 죄인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신다. 평생 “죄인들의 친구”(루카 7,34)로 지내신 분이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신다. 그렇지만 이 죄수의 항의와 도전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해하시며 침묵을 지키신다. 이때 “다른 (죄수) 하나는 그(예수님께 대든 다른 죄수)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한다.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요 “쌍날칼”(히브 4,12 묵시 1,16;2,12)인 예수님의 현존은 마지막 순간에 두 죄인마저 갈라놓는다. 회개한 죄수는 전설에 Dismas/Demas/Dumachus 등의 이름으로 알려진다. 우리는 곧잘 두 죄수를 놓고 전자는 ‘나쁜 죄수’였고, 후자를 ‘착한 죄수’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여기 두 죄수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자”들(루카 23,25)보다 더 험악하게 나쁜 죄수들이었다. 둘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중 한 죄수가 죽어가면서도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제가 죽은 다음의 저세상에서라도)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금 죽어가는 그 십자가형에서 구해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고, 다가올 예수님의 나라인 저세상에서나마 구원받기를 바랐다. 아니, 사실 구원을 받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자신에게는 “기억”마저도 가당치 않으나 그저 “기억해 주시라”고, 기억이라도 해주시라고만 청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구해 달라’는 비아냥 투로 말을 내뱉는 괘씸한 첫 번째 죄수의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그 죄수의 구원을 거부하셨을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른다. 그렇지만 오로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만 당신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시는 자비하신 주님께서 당장 그 자리에서 십자가형을 면하고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도록 그를 구해주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다가오는 당신의 나라에서 그 불쌍한 인간도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할 뿐이다.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인을 ① “꾸짖으며”(악의 거부) ②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하느님을 경외함) 하였고, ③ 자신의 처형이 “합당한 벌”(자기 죄의 인정)이라 하였고, ④ 예수님을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신 분”(예수님을 알아모심)이라 하였으며,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간청) 한다. 구원의 5단계인 셈이다.

죄 많은 인간의 진실한 청원이 예수님의 마지막 찰나에 희망과 구원을 얻는다.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곳에서 구원은 시작한다.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나라이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30) 하셨다. 우리 임금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우주적인 왕국,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자유와 은총의 왕국,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왕국이다.(오늘의 전례 감사송) 우리는 우리 주님,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분의 나라가 임하시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매일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하고 염원한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은 당장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가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출애굽이요 탈출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결코 의롭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용서요 주님의 용서를 감히 받을 자격이 없으면서도 그 용서를 받으려고만 한다면 주실 것이다. 두 죄수는 모두 하느님의 뜻을 좇았는지 그러지 않았는지가 선과 의로움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생애 동안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다. 우리도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인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간다.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 단순하게나마 “예수님,…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만이라도 마음을 다해 드릴 수 있다면, 자비하시고 또 자비하신 주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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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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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 왕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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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교회력으로 보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서 연중 제일 마지막 주일이며 다해가 끝나는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제 1주일이 되며 새로운 한 해 가해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또한 성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시간에 따르면 아직도 연말이 한 달여나 남아 있지만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한 발 앞서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에 따라서 한 해를 정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소적 배경은 ‘해골산’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곳에 해골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형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정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고 있는 살벌한 사형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예수님을 가운데 중심으로 두고 두 죄수가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 지도자들, 군사들 등이 등장합니다. 이 중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판에 철없는 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그 분의 겉옷을 전리품처럼 나누어가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들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주위에서 한마디씩 던지며 참견합니다.

먼저 구각(舊慤)을 벗지 못하는 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계신 예수님께 빈정거립니다. 이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상급 위험인물인 예수님의 인생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고 여기며 그분을 경멸하는 뜻에서 ‘이 사람’ 이라고 부르면서 조롱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메시아이고 그분의 선택을 받은 이’라면 다른 사람을 구했듯이 자신도 구원해 보라고 모독합니다(지혜 2,17-22참조).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지도자들은‘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들어 모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원수들의 조롱을 받는 의인의 운명 (시편 22,7-8)을 겪으시고 고통 받는 메시아로 구약의 예언을 완수하십니다.

그리고 군사들도 또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권하면서 조롱합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뜻의 ‘유다인들의 임금’ 이라면 너 자신을 살려 보라며 빈정거립니다. 이들은 앞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라는 종교적 칭호로 놀린 지도자들과 대조됩니다.‘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호칭은 유다인들이 예수께 적용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사용한 것입니다(루가 23,3) 예수님은 그들의 놀림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시는데 군인들의 조롱은 빌라도의 심문(루가 23,3)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분위기의 맥락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죄명 패에 관해 기록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이 죄수는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들먹이며 희롱합니다.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합세해서 구원의 역사를 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예수님 옆의 다른 죄수 하나가 비웃는 죄수를 꾸짖으며 말합니다.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이 죄수의 이름은 외경인 빌라도의 행전에서 ‘디스마스’라고 나옵니다. 이 둘째 죄수 디스마스는 죽어가면서 회개하고 그분을 모독한 다른 죄수를 질책합니다. 이 죄수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고 결백하신 분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믿음으로 수긍하고 또 예수님의 왕국에 받아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이 죄수는 진정한 뉘우침 속에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 42)”이 죄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렇게 ‘예수’라는 이름을 직접 입으로 발음하고 부르며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은 루가 복음서에서 거의 유일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자비에 대한 신뢰심과 친밀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오실 때’ 라는 말은 종국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주적인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루가22,30;24,26참조). 이 죄수는 자기가 죄인으로 처형되지만, 예수님께서 임금으로서 영광을 띠고 오실 때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는 이 죄수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 43)”하고 미래형 동사로써 약속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것을 “내가 참으로 너에게 말한다.”라는 장엄한 표현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로서 왕권과 주권을 행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세 번에 걸쳐 그분을 조롱한 적대자들에게(루가 23,35,36,39) 자신의 치욕과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모욕과 죽음은 낙원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참된 유다인들의 왕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 죄수는 죽기 전에 그야말로 대도(大盜) 즉 큰 도둑 ‘예수님의 나라, 하늘나라 낙원’까지 훔치는 도둑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면서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편을 든 사람은 죄수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관망하거나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 백성들의 지도자들, 군사들 심지어 같은 십자가형을 받아 옆에 매달려 있던 죄수까지도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 39)’하고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하고 구원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단마저 풍지박산되어 지리멸렬(支離滅裂)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의 처형장에 있다면 어떤 처신을 하겠습니까? 지도자들에 속하겠습니까? 군사들? 좌도? 아니면 예수님의 왕국을 훔친(?) 대도에 해당되겠습니까? 아니면 적군과 우군이 뒤섞여 있는 불특정 다수의 백성들입니까? 처형장에 있었던 많은 백성들은 지도자, 군사, 좌도 등의 조롱이 릴레이로 이어지는 동안 이들은 서서 바라보고만 있다가, 오늘 복음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예수님의 임종을 목격한 다음에야 이들은 가슴을 치며 돌아갑니다. 그들은 예수께 동정적이지도 않았지만 대놓고 적대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전에 이구동성으로 빌라도에게 요구한 예수님의 처형(루가 23,21.23)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다양한 군중들 중, 십자가 형틀 밑에서 아 광경을 세세히 지켜본 예수님의 일부 친지들과 요한을 비롯한 익명의 제자들 그리고 갈릴래아 여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이 세상에서 시작된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알파요 오메가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왕중왕(Le Roi des rois, The King of kings)이신 예수님께 대하여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의 참된 왕, 세상만물의 주인,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도 내재하고 계신 왕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오늘 복음의 본문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말씀으로 택하기에는 뭔가 좀 부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대축일 미사에서, 십자가에서 조롱당하며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 성경 구절들을 읽고 듣는 것은 무엇인가 거북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에서 왕중왕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이런 엉터리 왕은 처음 볼 지경입니다. 보통 왕들의 연관 검색어는 무소불위의 권력,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과 아름다운 궁녀, 황금을 만드는 미다스왕의 손, 잘 훈련된 군인들, 왕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신하들 등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조롱받고 죽어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런 세속적인 왕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분은 속수무책으로 그냥 조롱당하고 무기력하게 죽어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왕의 모습과 본문에 묘사된 십자가의 그리스도왕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와 복음의 그림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기의와 기표를 억지춘향으로 갖다 맞추어 놓은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인 명패만이 예수님이 왕이심을 조롱하고 있을 뿐, 예수님의 왕다운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환호와 박수, 화려한 왕관과 옥좌는 고사하고 조롱과 모욕, 가시관과 십자가만이 오늘의 주인공이요 왕이신 예수님을 묘사하는 도구들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필 교회가 이 조롱의 본문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말씀으로 정해 놓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왜 교회는 왕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다른 모습의 예수님, 왕이기는커녕 죄수로서 조롱당하고 사형당하는 모습의 예수님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복음 말씀으로 선택하였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를 참고해보면,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책봉됩니다. 기름부음 받은 다윗왕은 전쟁영웅이고 민족의 리더이며 조직의 보스로서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을 통합하면서 주변의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하나의 강력한 왕국을 세웁니다. 다윗 왕의 출현은 제정(祭政)이 분리되는 역사의 일반적 발전단계에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강력한 왕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손에 피를 묻힌 임금이며, 그 까닭으로 성전을 건립하는 일은 못하게 되고 아들 솔로몬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창업이나 대업을 이룬 위대한 왕일수록 손에 살육의 피를 많이 묻히고 죄를 많이 범하기 마련입니다. 수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죽이고 왕좌에 오르고 또 그것을 필사적으로 수성(守成)하고자 또 피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왕권은 역설적으로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왕입니다만, 다윗-왕의 이미지와 그리스도-왕의 이미지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죄수조차 예수님께 관해‘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분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상식에 어긋나는 파라상스(Para-sense)의 왕권이며, 이론에도 어긋나는 파라독스(Para-dox)의 왕권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오늘 루카 복음서의 본문은 왕의 보편적인 개념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왕의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밝게 계시되고 교정되고 완성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계시되는 곳입니다. 극소수의 지지자들만 빼고 모든 사람들의 조롱과 희롱을 받으신 ‘유다인들의 왕’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써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접속하고 화해시키고 일치를 이룹니다.

이런 관점에서 루마니아의 위대한 종교현상학자 미르케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는 십자나무를 우주의 중심축이며 역사의 배꼽점이라고 합니다. 십자나무가 하늘과 땅 즉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골고타는 우주산 중의 우주산이며 십자나무는 우주목(The tree cosmic) 중의 우주목이며 세계수(世界樹) 중의 세계수입니다. 세계의 배꼽이며 우주중심의 상징인 십자나무는 절대자와 인간과의 생명의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이 만남은 영원과 시간과의 만남이며, 절대와 상대와의 만남이며, 초자연과 자연과의 만남이며, 은총과 본성과의 만남이며, 나와 절대너와의 만남이며, 하늘과 땅과의 만남이며, 수직과 수평과의 만남이며, 결국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을 보여주고 리얼하게 이루어지는 사건의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나무의 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아버지와 다시 확실하게 재결합(re-ligion)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와 용서와 평화를 감각적으로 공감하게 하고 실질적으로 성취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에벤느멍(l’évènement) 즉 사건입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구원사적 예언의 성취이며, 우주론적인 진화의 절정이며, 하느님 자기증여(l’autocommunication de Dieu)의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왕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예수님 왕직의 본질과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상의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참된 왕의 신원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이 바로 예수님 왕직수행의 알갱이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다 사랑하시고 또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야훼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으로서의 왕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할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왕중왕이시라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모두 합법적이고 유효한 방식으로 주님의 왕직에 참여하는 작은 왕들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이 땅에서 재현(再現, Représentation)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직장에서 우리 본당에서 그리고 이 사회 안에서 제2의 그리스도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김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준 모습을 본받아 왕섬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섬김의 작은 왕직을 수행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싫어도 지는 것이며 죽기 싫어도 죽는 일입니다. 조롱과 희롱을 당하더라도, 그 모독을 모독하고 그 멸시를 멸시하는 것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종들의 자세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왕중왕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작은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 외적인 영광이나 권세에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가족인자 이웃을 위해 가난과 수난, 희생과 섬김, 핍박과 쪽박 그리고 조롱과 멸시의 십자가를 각오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에게 왕은 ‘누구(who)가 되어야지 무엇(what)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문(自問)해야 합니다. 진정 지금 나에게 왕은 누구입니까? “돈, 명예, 권력을 왕으로 모시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에게 왕은 누구인가? 손님이 왕인가? 고객이 왕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나의 왕이신가?”그리고 “내가 만들어 온 왕국은 어떤 왕국인가?” “구두쇠 스크루지의 왕국인가?” “견고한 무의식의 왕국인가?” “딱딱한 껍질 안으로 똘똘 말려 닫혀있는 달팽이 왕국인가?”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주님께서 나에게 왕이 되시는 한 주간이 되고, 우리 역시 작은 왕으로서 일상의 십자가를 지고 다른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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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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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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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놓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조롱한 사실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를 살려 보라지!” 이것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린 자들이 그들의 승리감과 안도감을 담아서 내어뱉는 조롱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라”고 조롱합니다. 로마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식민지에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꼴을 당하는지 알라는 조롱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형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분을 메시아로 상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당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15)고 기록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군중은 그분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여 없애버리기로 작정하고 사형 집행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그분을 고발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는 인물입니다. 그 메시아는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강대국을 만들어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하는 왕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해방시켜 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에 부화뇌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초능력으로 대신 해주는 메시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그런 호칭이 당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그분을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메시아는 그 시대에 왕이라는 단어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를 때, 그 뜻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용서하시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고 소외시키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살고, 잘 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 당신도 불쌍히 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 곧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생존을 최대 과제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우리의 세상에,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지평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서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이 살아 움직이는 지평이고 질서입니다.

이 지평에는 지켜야 하는 계명과 바쳐야 하는 제사가 절대적이 아닙니다. 이 지평에는 하느님이 아버지로 보입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인간 생명의 기원, 곧 아버지로 살아 계십니다. 이 질서에는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이고 은혜로움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평의 나라를 새롭게 창시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은혜로운 실천을 하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거나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 우리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고 호소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지평의 나라를 열고 창시하신 분으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몸을 잘 살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가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고 죽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과 피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이 육과 피의 한계를 넘어서 그분을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신앙인,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열어 주신 그 하느님 나라의 지평에서 예수님 안에 읽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도 그분이 열어 놓은 지평에서 그분이 창시한 나라의 실천을 하면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의 이야기도 전해 줍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은 유대인들에게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지평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의인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들으면서 초기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내 하인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18,36). 예수님으로 열리는 나라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이 소중해서 남과 싸우고 빼앗아서 세우는 질서의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은혜로운 하느님 질서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지평에 서 하느님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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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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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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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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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나라’라는 말은, 메시아 왕국을(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라는 말은,
예수님을 그 나라의 임금으로 믿는다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고,
그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일로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죄수의 말은,
자기를 데리고 가시기를 청하는 말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청한 대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그의 믿음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그 죄수를 그날 바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죄수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구원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에서는
‘최단시간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믿음 없는, 또는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형수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자들은 “네가 메시아라면(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라고 빈정거렸습니다(루카 23,35-39).

(그자들이 말한 구원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빌라도 총독의 경우에는 빈정거리지 않고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라고 ‘진지하게’ 물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8,33).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의 진리’에 관해서 말씀하셨을 때(요한 18,37)
빈정거리는 말투로 “진리가 무엇이오?” 라고 반문했습니다(요한 18,38).

(“진리 따위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분’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을 비웃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오 10,28).”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을 아들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1-22).”

그래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기도 하고,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일은 곧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무서워하다.’가 아니라 ‘경외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
즉 신앙인답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말을 언론에서 자주 봅니다.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전임자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정권을 차지한 사람이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사람들은 ‘살아 있는 권력’에 빌붙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그 권력이 정말로 ‘살아 있는’ 권력일까?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힘” 외에는
‘살아 있는 권력’이란 없습니다.

세속 권력이 임기 동안에는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임기라는 것도 잠깐일 뿐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나쁜 권력이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권력’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4-2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5.17-18ㄱ).”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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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1월 20일
  | 11.19
521 76.4%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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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전례의 주기를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모아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에 ‘온 천하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시며 결국은 당신의 왕권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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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 23,35-43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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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며 서로 대립적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인들에게 조롱과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아라”(35.37절).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예수가 정말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35절),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으로 달린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38절)이라는 명패도 사형에 처하게 된 이유보다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즉 사랑하고,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은총으로 구원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 절대 자유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강도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40-42절).

이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도이다. 구약의 많은 기도들이 이러한 형태이다(시편 104,8; 120,5 참조). 그러기에 그 강도 편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이미 신적인 분이시며, 그분이 맞이하는 죽음은 오직 참되고 유일한 ‘왕국’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종말론적 왕국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즉시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3절). 구원이 바로 그 순간 보장되었다. 바로 그분의 죽음의 ‘오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첫 번째로 회개한 한 살인자가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하늘나라가 오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로 그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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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골로 1,12-20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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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해주신”(1,13-14)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아들의 나라’는 ‘흑암의 권세’(13절) 즉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다. ‘아들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음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찬가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만물이 그분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듯이 세상만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형상’이다. 15-17절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실 뿐만 아니라, 끝이시기도 하다. 즉 그분은 만물을 존속케 하시며 모든 창조물의 마지막 목적지이신 당신께로 향하게 하신다. 즉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16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또한 그분께로 ‘돌아가야’한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맡겨져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도정에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절대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며 교회라는 공간을 통해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력을 뜻한다. 즉 그분의 풍부한 생명력이 교회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절대 통치권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생명의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 모두가 임금이신 그분의 ‘통치’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끔 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생활로써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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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20
521 76.4%
제1독서(2사무 5,1-3)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 왕위계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사울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다는 명분으로 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온갖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1사무 13,1-16). 그러자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습니다.”(1사무 16,14) 급기야 아들인 요나탄까지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음을 알게 됩니다(1사무 10,10-31).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도 사울에게서 떠나 다윗으로 옮아갑니다.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2사무 3,6) 백성은 하느님께서 사울 집안에서 왕권을 거두어 다윗에게 주시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세워주실 것(2사무 3,10)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추대되는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어야 한다는 율법(신명 17,15)에 따라 원로들은 자신들의 두 번째 임금이 될 다윗을 찾아가 자기들이 “임금님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첫 임금이었던 사울은 다윗에게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좋아했습니다(1사무 18,15-16).

그래서 원로들은 헤브론에 있던(2사무 3,2-5) 다윗을 찾아가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줄 것을 청하고, 다윗은 그 청원에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원로들에 의해 기름이 부어져 이스라엘의 임금이 됩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원로들과 계약을 맺었다면서 왕권은 백성에게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는 중요한 숫자를 제시합니다. 다윗이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사십 년 동안 다스렸는데, 칠 년 반 동안 유다를,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4-5)고 합니다. 다윗의 통치 기간은 서른 살에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셨고, 서른세 살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임금으로서의 삶을 미리 보여줍니다.

복음(루카 23,35ㄴ-43)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렸고, 예수님을 골고타로 끌고 와 십자가에 못을 박은 군인들은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조롱하는 명패를 붙여놓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 가운데 하나도 예수님을 모독했습니다. 그런데 구경꾼이었던 백성은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호기심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23,35ㄱ).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빈정대고 조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만 생각했는데 자기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궤 앞에서 여호수아가 축복과 저주에 관한 율법을 읽어주던 때처럼(여호 8,33-34)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엇갈린 운명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은 다른 죄인은 바오로 사도처럼 이성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이성의 법을(로마 7,23),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필리 1,23).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유다 지도자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는 그 옛날 이스라엘 원로들이 사울 왕에게 기대했다가 다윗을 찾아갔듯이, 예수님에게서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정치적인 왕의 역할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주지 않았음에 “이 자”라고 부르면서 빈정대고 조롱하고 모독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펼쳐놓은 놀이판에서 예수님께서 춤추기를 기대했으나, 무기력하게 죽어 가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춤추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원로들이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찾아간 것처럼 구경꾼이었던 백성도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빠를 선택했습니다(23,18-19). 그러나 다윗이 그랬듯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임금이십니다. 정치적인 임금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을지라도 하느님 나라의 임금은 하느님께서 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은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옹호하면서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옹호하는 죄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죽은 라자로가 아브라함 곁에 있었다고(16,22) 하는 “낙원”(2코린 12,4; 묵시 2,7)이라는 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뒤에 자리하게 될 죄인과 의로운 이들 사이의 거리를 말씀하시면서 생명나무가 있는(창세 2,9) 기쁨과 즐거움의 동산(창세 2,15)으로 당신을 지지한 죄수를 초대하십니다. 이 말은 죽음 너머에 있는 행복한 삶을 연상케 하며, 비록 이 세상에서는 초라한 임금으로 죽지만, 낙원을 지배하는 분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나드는 행복의 나라에 대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그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서는 행복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원의 조건은 “죽음의 행실에서 돌아서는 회개”(히브 6,1)와 예수님을 의로우신 임금(23,47)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콜로 1,12-20)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었음에 드리는 감사기도와 찬미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었음에 드리는 감사기도(12-14)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빼내시고, 구해내서, 거룩한 처소로 이끄셨다(탈출 6,6; 15,13)는 탈출기의 형식에 맞춰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 구원을 위한 몸값을 지불하시면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어둠의 권세(죽음)에서 구해내셔서 빛(생명: 요한 8,12; 11,9)의 나라에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기에(콜로 1,12) 감사를 드립니다. 두 번째 부분(15-17; 18-20)은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특성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모든 권력을 가지고 계신 임금이시고, 온갖 충만함을 지니고 계신 구세주이십니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첫 사람이시고,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신 분이시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졌던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왕권을 훨씬 초월하여 우주와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3년 동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예루살렘에서 모든 이들의 임금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우주를 다스릴 힘을 가지고 계셨으나 권력과 권세로써가 아니라 인간들의 장난에 의해 드러나는 무기력함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왕권을 드러내시고, 하느님과 계약을 위반한 인간을 용서하시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는 몇몇 인간들이 저지른 모략으로 피를 흘리셨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으로(요한 1,14)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어둠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해주신 것입니다(요한 15,11; 16,24; 17,13).

이런 사실을 일찍 깨달은 초기 교회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고난을 겪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빈정거림과 조롱과 모독을 다 견뎌내시면서 인간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으신 구세주,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시면서 인간을 초월하여 모든 권한을 가지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원한 구원의 임금이십니다. 이런 분을 우리의 임금으로 모신다면 그분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그분의 뜻대로 어떻게 하시도록 나를 그분께 내드려야 하는데 거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곳인 빛의 나라로 옮겨 갈 수 있으려면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과 같은 생각, 주님과 같은 행동, 그리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대립과 분열이 아니라 일치와 화해를 이루셨으며, 고통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거짓의 길이 아니라 비록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지라도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요한 14,6)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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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11월 20일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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