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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회개의 증거는 착한 행실
조회수 | 1,743
작성일 | 07.11.10
몇년 전 꾸르실료 지도를 하고 난 후 수료생들이 한 달 만에 모였다. 그 중에 나이 지긋한 한 자매가 자신의 체험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피정중에 깊이 묵상을 했다고 한다. ‘무엇을 해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피정이 끝나는 날 집으로 돌아가면 같이 살고 있는 며느리를 사랑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자신과 며느리와의 사이는 겉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 자매는 아침에 출근하는 며느리의 구두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며느리는 당황하면서 시어머니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눈이 촉촉이 젖었다. 그 순간 이십여 년 동안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자매는 무척 놀라운 체험을 했다. 며느리가 마치 딸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사랑의 힘이란 놀라운 것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관장 자캐오는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캐오는 죄인들과 세리들도 환영하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고 키가 작아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기어 올라간 자캐오를 예수님께서 먼저 보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는 데 장애물이 너무 많지는 않을까. 재물이나 명예욕, 때로는 이기심이 많은 내 자신이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신다. 사실 자캐오는 겉으로는 모든 것이 풍족한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으로 무척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너무 기뻤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자캐오는 고마움과 감격에 벅차서 이야기한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정말 대단한 변화가 아닌가. 자캐오는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진정한 회개란 마음 속으로만 결심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행위로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고 죄 없는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사람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가 변화할 수 있었다. 자캐오도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처음에 변화되지 않았다. 자캐오가 주님과 사귀면서 변화되었음을 묵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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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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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19, 8)

마트에서 물건을 샀습니다. 사천 원짜리를 사고 오천 원을 냈는데, 직원이 거스름돈으로 천 원이 아니라 오천 원 지폐를 내줬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 돌려주지 않았을 때, 가져간 액수의 4배를 갚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면 어떨까요? 누구나 돌아와서 돌려주지 않을까요?

복음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스스로에게 선언합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옛날 다윗이 나단에게 가난한 이의 아끼는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접대한 부자 이야기를 듣고, 그 양을 네 곱절로 갚게 하겠다며 분개한 장면이 있었지요. 4배로 갚는 것은 도둑질에 대한 징벌이라 합니다. 훔친 것의 3배를 벌금으로 내서 총 4배로 갚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나 이집트에도 이와 비슷한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캐오는 지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쓱싹 해왔던 것이 도둑질이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여태껏 그는 기회가 된다면야 할법한 일이라고, 세리라는 그 자리는 원래 그래 가면서 돈 버는 것이라고 말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앞에서 이제 그렇게 안 하겠다고, 그렇게 하는 것은 도둑질과 똑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캐오를 보시고 예수님도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하고 화답하십니다. 예수님과 밥을 함께 먹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건 예전에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도 처음에 예수님이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실 때는 이런 결심까진 못하고,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두 사람의 내적인 공동 작업은 시작된 것이지요. 마침내 자캐오가 결단하는 그때 예수님도 그가 구원받을 사람임을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자캐오가 결심한 것은 열심히 선행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가치관, 다른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번의 선행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민감한 양심을 갖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사람, 구원의 대열에 든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해야 할 것은 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안 하는 데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히 그리스도인답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남들은 쉽게 저지를 비리나 부정, 책임회피, 거짓말, 눈속임, 말 바꾸기 등, 이런 것들에 대해 민감한 양심을 갖고 작은 악도 큰 악처럼 피하려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을까요? 마트 직원이 잘못 준 거스름돈도 내 돈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수한 것이니 그 직원이 책임지고 물어넣으면 될까요? ‘자캐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자카리야’를 줄인 이름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고 그분과 같은 식탁에서 미사 때마다 함께 먹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고, 어떤 약속을 드리고 있는지요?

▮ 서울대교구 손경락 사도 요한 신부 : 2016년 10월 30일
  |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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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독했던 자캐오, 친구를 되찾다

자캐오는 돈 많은 세관장이었습니다.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던 로마 제국은 세금 징수권을 그 지역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돈 많은 세관장은 민족의 배신자이며, 하느님 백성을 많이 등친 사람입니다. 사랑과 우정을 나눌 친구도, 가족과 친척도, 이웃도 없이 그는 고독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많은 재물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모두 많은 재산을 모으려고 안달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죽을 줄로 알고 덤빕니다. 그리고 주위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 술을 끊었더니 혼자 하는 등산과 영화 관람밖에 할 것이 없더랍니다. 그러니 술을 마시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구가 아닙니다. 모두 고독함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숨 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에는 고독에 대해서 노래를 하면 누구나 공감하기에 인기가 많습니다.

자캐오는 더는 살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언뜻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오늘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보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서야 하겠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자캐오가 나무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갔듯이, 우리도 용감하게 선택을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러 나서야 합니다.

자캐오와 예수님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번뜩였습니다. 깊은 고독과 갈망 속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듯이 살던 그는 예수님의 눈길 안에서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 음성은 인간을 영원에서 찾아오신 사랑과 구원의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그 따스한 눈길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내 과거를 돌아보는 그곳 그때마다 거기에서 너그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그분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같다고 할까요? 아버지의 그것과 같다고 할까요?

자캐오는 이미 기쁨에 가득 차서 순식간에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자기의 과거에서 자기를 억압하고 가두고 있던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던 재산을 모두 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값진 대상을 만났으니까요.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이나 자동차 안에서, 집에서, 혼자 산길을 거닐며, 아니면 기도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에 여념이 없던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대상을 만납니다. 피조물인 인간을 친구가 되어서 만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과 하나가 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이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기쁨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캐오는 가난한 친구들을 되찾았습니다.

오늘 현대인도 고독에서 벗어나고, 특히 새로운 형태의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 기쁨을 누리고, 친구들을 되찾게 되는 것은 오늘 내 차례입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 2016년 10월 30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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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지혜 11,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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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누구나한 해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있듯이 우리네 삶에도 마지막이 있음을 묵상하게 되고, 먼저 가신 가족, 친지, 은인들의 안식을 기도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오늘 11월의 첫 주일에 맞는 연중 31주일 복음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과 자캐오라는 세관장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시점의 사건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붙잡히시고 수난받으실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요 부자라고 루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사실 세관장이라는 직책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의 하수인’ 정도로 여겨져서 배척받는 자리였습니다. 종종 거두어들여야 하는 세금 이상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자캐오가 예수님이 예리코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보고싶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키 작은 세관장이었던 자캐오에게 단지 작은 키만 문제였다면, 이웃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 앞줄에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기다릴 수도 있었을 터이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 모습이 자캐오의 외로운 처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제국의 하수인’이자 부정직한 세리이고 외로운 처지이기에 더더욱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도 외로운 한 존재의 갈망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군중에서 떨어져서 나무 위에 외롭게 올라있는 애타는 눈망울을 보시고 그를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예리코의 한 세관장 이름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미리 아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어~이, 거기, 나무 위의 사람, 한 번 내려와 보시게’ 정도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캐오 같은 죄인이요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를 ‘있는 그대로, 한 인격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서 지혜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와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 …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한 해라고 하는 시간의 선물을 받았지만, 돌아보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고 ‘빈손’을 느끼는 우리 죄인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오만과 외로움의 나무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며, 우리도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바쳐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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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순택주교
2019년 11월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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