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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리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
조회수 | 12,016
작성일 | 07.11.10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세관장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다, 평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군중에 가려 그분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캐오는 사람들을 앞질러 달려가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예수님은 자캐오를 보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자캐오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뜻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 만남의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은 반드시 바깥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성을 열고 바깥으로 걸어 나오지 않는 한 진정한 만남은 결코 이루어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갇혀있는 성벽을 뛰어 넘어야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남의 장은 항상 바깥이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자기를 열고, 자기라는 벽을 허물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 같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세관장이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자존심이나 체면을 버렸습니다. 오히려 어린이처럼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림으로 해서 자기라는 벽이 깨어지게 되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룸으로써 그의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은, 그의 삶이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하는 말씀을 들려주시게 되십니다.

오늘 우리도 모두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만남은 반드시 그 장소가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자기라는 벽을 깨고 자기가 허물어진 다음에야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진정한 만남은 자신의 삶이 방향을 바꾸어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오늘은 자캐오처럼 꼭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산교구 최득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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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만큼이나 유행했던“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하는 이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오늘의 우리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실용이나 유용 등의 그 효용가치만을 쫓다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은 채 정신없이 헤매며 사는 것 같다.

과학과 물질만능이 우선시 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지식이나 진실을 그 자체로써 다루지 않고 생활상의 수단으로 보는 실용주의가 정말 무엇이 중한지를 혼돈케 한다. 목적보다 수단들이 실생활에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아 유용할 때 그것을‘참’이라고 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므로 객관적인 진리를 찾는다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장자는‘無用之用(무용지용-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말하였는데, 이는 곧 사람들은 누구나 다 쓸모있는 것의 쓰임새를 알고 있지만,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무릇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쓸모가 있는데, 단지 그 쓸모가 잘 드러나는 것과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 겉만 보고 섣불리 대상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당시 사람들의 잣대로 보면 매력적이거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효용가치로는 오히려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는 군중 속의 고독한 사람 곧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곧 무용의 용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더 이상 주위 시선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자캐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아니 되찾아야 할 우리 신앙인들의 참 모습이 아닐까?

점점 더 본질을 도외시하며, 그저 눈에 보이는 실용적 가치를‘우상화’하는 현실을 보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오히려 쓸모없음에도 숨겨진 유용이 있다. 숨겨져 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유용만 쫓다 보면 무용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2독서의 말씀처럼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하느님은‘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지혜 11, 23)라는 제1독서 말씀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죄까지도 무용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 부산교구 박용조 신부 : 2016년 10월 30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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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는 종종 힘겹거나 어려울 때 하느님께서 나를 싫어하시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우울함이 찾아올 때면 가끔 하느님이 나를 만드신 이유를 모르겠다며 절망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따지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지혜서는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계시고,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신다고 이야기합니다(지혜 11,24).

지혜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없이 자비로우십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죄인마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이시며, 그렇게 돌아오는 죄인의 죄를 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소중히 여기시는데, 만물 안에는 당신의 불멸의 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며 죄를 지어 탈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다시금 당신에게 충실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어서 훈계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자캐오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러자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행여 자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관리들은 세리들이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야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세리들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를 죄인들이나 창녀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습니다. 자캐오는 이런 삶에서 되돌아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이런 자캐오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가 진정 구원을 얻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과 달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묵는 것을 보고 투덜거립니다. 자캐오 같은 세리에게마저 하느님의 자비가 주어진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죄인들을 당연히 미워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된 이들입니다. 곧,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죄인이나 원수마저도 우리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 선의로 모든 이를 위해 자비를 간청하며, 세상 모든 이들을 하느님 사랑 안에 불러 모으는 도구가 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워지며, 그분 자비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테살 1,11-12).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0월 30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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