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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영원히 하나인 하느님 가족
조회수 | 2,400
작성일 | 07.11.10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어김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유행가의 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정말 영원히 잊혀지질 않을 안타까운 연가가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지난 10월 31일 새벽 참으로 사랑하던 후배 주영덕 비오 신부님께서 하느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선종 소식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너무나 믿겨지지 않아 마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잠시 후 동창신부의 확인전화를 받고 나니 그제서야 밀려오는 슬픔에 마음이 무척이나 아팠습니다. 듬직한 덩치만큼 마음 역시 그 누구보다 든든했던 후배였기에 보면 볼수록 배울 것이 참으로 많았던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그 시간 만큼인 3년이라는 “짧지만 참으로 굵은” 열정적인 삶을 살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때마침 위령의 날에 치러진 장례미사에서 주교님을 비롯하여 많은 신부님들, 수녀님들, 교우들은 안타까운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너무도 일찍 하느님께로 떠나버린 신부님을 못내 아쉬워하였습니다. 전에도 몇 차례 신부님들의 장례를 치뤘지만 다들 선배 신부님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은 아팠으나 그런대로 덤덤할 수가 있었는데, 그렇게 후배 신부님을 먼저 보내게 되니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스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공교롭게도 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신을 맞게 되어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하여 미사 내내 눈물을 멈추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일주일 전까지만해도 주일미사에 잘 나오시던 신자 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병자성사를 받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는 그야말로 “징하기 그지없는” 위령의 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으로 안타까움에 안타까움을 더 할 수밖에 없는 각별한 체험으로 시작된 올해 위령성월은 정말이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싶습니다.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 안에서 돌아가신 조상님, 부모님, 일가친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위령성월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이 모든 것이 없어져버리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삶의 완성이요, 새로운 탄생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관문임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듣는 오늘 복음은 그러한 기억을 새롭게 해주고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줍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단절된 두 개의 세상처럼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국 하나의 실재이고 산 이와 죽은 이는 이별의 인사를 나눈 채 영영 헤어져버린 만날 수 없는 남남이 아니라 기도와 전구(轉求)를 통해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하느님 가족입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내 가족과 네 가족, 우리 민족과 너희 민족이라는 경계가 없는 참된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일치하는 하느님 가족은 저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부터 우리 신앙인이 살 수 있는 삶입니다. 부디 돌아가신 분들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그만큼의 열성으로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부터 이웃들과 함께 따사로운 하느님 품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 넘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오 신부님의 장례미사 때에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하느님께서도 못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이들을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이에게 항상 넉넉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면서 이미 하느님 곁으로 가신 이들이 지상에서 못다 했던 자비를 한 형제자매인 우리가 더욱 힘써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잊지 않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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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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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희생과 사랑을 통해 천국의 삶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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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영원한 생명

사제가 되어 아주 가끔은 대학에서 얕은 철학을 교양으로 공부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청년 교우들에게서 하느님 존재와 부활에 대한 신앙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면담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제 자신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이 좀 더 아름답게 변화되기 위하여, 혹은 세상의 자유와 인간 존엄을 위하여 자신의 생을 투신하다 가슴 아프게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또는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죽은 인류의 모든 슬픈 죽음을 생각해 보게.

멀게는 끔찍한 재앙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살육에서, 우리 조국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 4.19, 5.16,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숨진 슬픈 영혼에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부활과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죽음은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 될 걸세.

그분들을 위하여도 하느님은 계셔야 하고 부활과 내세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네. 그리고 만일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고 부활과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대 혼란에 빠지게 될 걸세.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과연 누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투신하겠는가? 그야말로 한번 세상에 태어난 몸, 질펀하게 살다가 가려고 할걸세. 그때에는 인간이 더욱 비참해 지게 된다네”.

하느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은 세 가지 입장을 취해온 듯합니다. 계신다는 입장과 계시지 않는다는 입장,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중도적 입장이 그것입니다.

부정의 입장에는 다분히 인간 세상의 모순적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회의, 예를 들면 무죄한 어린이들의 학살이나 죽음, 악인들의 번성과 선한 이들의 고통을 끄집어냅니다.

또한 종교로 인한 간섭에 염증을 느끼는 경우와 종교인들이 저지르는 만행 때문에 하느님을 거부하는 경향이 큽니다. 무신론자들의 주장 뒤에는 우리 신앙인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진정 우리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에 가슴을 치며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하나 되어 사회 구조적인 악과 모순에 맞서 싸운다면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유들은 거의 없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악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더 나아질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나아가 무신론자들은 이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자신들을 얼마나 희생하며 투신하였는지 묻고 싶습니다. 실천의 희생은 등한히 한 채 사변의 껍데기를 가지고 그것이 전부인양 우월감에 가득 차, 신앙의 이름아래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인류를 위한 사랑에 생을 투신하는 고귀한 이들을 조롱하며 허황된 망상의 이론에 자만한 삶이 아니었는지 진정 묻고 싶습니다.

오늘 온갖 고통과 박해의 죽음 아래 처형되는 일곱 형제를 소개하며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그들의 입을 통하여 용감한 부활 신앙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 7, 9).

산 이들의 하느님

우리는 자주 죽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무얼 잘했다고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진정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그리고 그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이럴 때 우리의 지상 삶의 중요성과 이 지상에서의 희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승에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한 이들이 어찌 저승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살아있는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만들며, 천국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범했던 잘못은 천국과 하느님을 죽은 이들의 전유물인양 전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려 하지 않았고,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멀리 계시는 분, 혹은 계시지 않는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희생하며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 질 수 있고, 내 마음에 가슴 뿌듯함이 남아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며, 그곳에 산 이들을 위한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과 천국을 함께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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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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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여러분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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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11월 위령성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연옥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지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디 열심히 기도하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부활을 하면 어떠한 모습일까요? 단순히 끊겼던 숨이 다시 붙고 심장이 뛰며 피가 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유일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황을 기억해 봅시다. 불과 2,3일 전에도 함께 있었을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죽었을 때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방법은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이것 역시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저의 모습이 딱 좋은데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 잘생긴 사람이 제 기준에는 없거든요.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농담 같은 말이었습니다. 아무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활 때의 우리 모습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간직한 모습이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우셨던 ‘거룩한 변모’때의 모습에 인간 사랑의 절정이었던 ‘십자가’상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순히 외모가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학생이었을 때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첫 직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희끗희끗한 머리로 손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장애가 있는 분들은 그 장애가 사라지고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 어린 아기들은 멋지게 성장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습 등등 부활의 모습은 우리가 겪었던 아직 겪지 못했던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에 게 주신 혹은 주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부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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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일환 바오로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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