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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조회수 | 2,288
작성일 | 07.11.10
우리는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한다. 현대의 많은 이들은 영혼의 불사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도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나는 어떤가?


1. 여보! 저 세상이 정말 있을까요?

하루는 잘 아는 신자 아주머니가 맥없는 모습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반쯤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너무나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 사람과 제 남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기에 결혼 후에도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셔서 어제 그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지난밤에는 우리가 이렇게 살다 그냥 죽으면 그만인가 생각하니 너무나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가 죽으면 정말 저 세상이 있을까요?” 남편은 한 참 말이 없더니 “말이 그렇지, 천당 지옥이 뭐 있을 라고!”하였다. 그 부인은 자기는 후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지만,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남편은 굳은 믿음이 있을 것으로 믿고, 그 믿음에 기대고 싶었는데 남편의 대답이 그렇게 나오자 너무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 중에 “천당(후세)이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절대로 믿는다.”는 대답은 55.5%(남-46.8%, 여-60.7%)이고, “어느 정도 믿는다.”는 대답은 29.1%(남-35.8%, 여-25.1%)로 나타난다. 이 둘을 합쳐 천국의 존재를 믿는 신자는 84.6%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신자가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현대의 사상적 패러다임(모델?)

오늘 복음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대(代)를 이어줘야 한다.”는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들면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은 단호히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은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는 그 조상들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하느님 앞에 살아 있으며 하느님은 그들과의 계약을 항상 기억하시며 지키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패러다임(특징적 모델?)은 ‘신앙에 대한 이성(과학)의 우위, 신학에 대한 철학의 우위, 은총에 대한 자연의 우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우위’로 요약된다고 하겠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神), 부활, 은총, 천국(후세) 등에 대해서는 신뢰나 관심이 없고, 오직 현세적 발전, 인간의 이성과 과학, 자유, 쾌락 등에 관심과 신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 중에도 부활이나 은총 후세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 이나, ‘내면의 평정’ 을 찾기 위한 수양(修養)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신앙인이라기보다 인간다운 삶에는 관심이 있지만,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는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이들이 의외로 교회 안에 많다.

3. 이성과 신앙은 진리에 다가가는 두 날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98년 10월 15일 교황 즉위 20주년을 앞두고 당신의 13번째 회칙인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을 반포하셨다. 이 회칙은 사상가들과 철학. 신학자들을 위한 회칙이라고 할 수 있다. 복제 인간의 출현을 우려하는 현 시점에서  교황님은 윤리적인 불확실성과 반 신앙적인 이 시대의 흐름을 우려하셨다. 이 회칙은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두 날개’ 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존재도, 후세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믿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진정한 신앙적인 용기나 결단, 투신을 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기도는 항상 “이런 저런 복을 주십시오”하는 기도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봉착하는 갖가지 한계상황에서 자칫하면 자살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영원한 삶을 믿고 바라는 참 신앙이 있는가? 나는 ‘세례 받은 미신자(未信者)’,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는 아닌가? 이 미사 중에 겸손되이 참된 믿음의 은사를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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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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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변함없는 하느님과의 관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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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사두가이들의 생각을 새로이 하십니다.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고 언제나 암송하던 모세오경으로 그들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 탈출기 3장의 한 구절로,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말한 부활 문제에 대해 답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부활 역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 말씀 안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성조들과 친숙하게 지내셨듯이, 그들의 생전만이 아니라 사후에도 영원히 그러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생전에 온갖 핍박과 모욕을 당하는 비참함을 사셨더라도 누구보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였기에 죽음 이후에 그 아버지와 함께 살아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 없기에 그 부활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를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부활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죽음을 관통해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의 모습은 부활 이전과는 무엇인가 다른가 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혼만이 부활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를 제자들 앞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모습들을 정리해볼 때, 오히려 물음표만 더해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라 표현하나 봅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그 이상의 새로운 삶이 부활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삶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삶에서 보이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입니다. 성조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우리는 지금 현세의 삶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할 때에, 우리의 죽음 이후의 삶도 그분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는 자기 생각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생각을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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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강현 베드로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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