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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조회수 | 2,363
작성일 | 07.11.10
사실 생명과 죽음의 쉼 없는 연속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몸은 100조(兆)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세포는 2시간 정도, 피부세포는 14일, 장세포는 3개월 정도의 주기로 생명과 죽음을 거치고, 모든 세포가 한 번씩 다 생명과 죽음의 연속을 거치는 데는 11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서는 60초 동안 30억 개의 세포가 죽고, 다시 30억 개의 세포가 분열을 통해 새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 중에서  정상세포가 암(癌)세포로 바뀌게 되면 세포핵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며 정상적인 생성과 소멸의 분화과정이 정지되고 무한 분열과 증식, 종양형성, 타 조직 침윤과 전이를 일으켜 결국에는 몸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 다. 결국 잘 살기(Well Being) 위해서는 잘 죽어야(Well Dying) 한다는 것을, 생명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우리의 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잘 죽는 길, 가장 잘 사는 길에 대해서 이미 도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 또한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6,3-4).

우리는 모두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 몸의 세포, 교회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전자를 지닌 세포이고,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결된 지체인 것입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세포는 유전자를 잘 복제하고 전달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줄 압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제하고 전달하며 새로운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줄 아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 다. 또한 건강하고 정상적인 세포는 전체 몸과 훌륭하게 조화와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언제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복음과 성령으로 충만되어 생활하는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혈연관계를 맺어 나갑니다. 우리는 영적인 혈연 공동체 안에서 천사들처럼 삶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삶을 죽음에서 되살려 주시고 당신의 영원한 삶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과 생명이 둘이 아닙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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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한영(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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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확고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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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전례는 죽음의 실체와 그 죽음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희망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죽음을 우리의 삶과 멀리 두고, 자신이 그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듯이 살고, 그 죽음에 저항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찾아오면 거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이에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부활의 신비에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루가 20,38).

복음: 루카 20,27-38: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

유다 사상에는 부활에 대해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 즉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였다. 사제계급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루가 20,27; 사도 23,6-7). 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33절).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신다. 즉 그들이 저 세상을 이 세상의 물질적 연장 내지 반복처럼 상상하는 무지한 표현을 거부하신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세상의 현재와의 ‘단절’과 동시에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가문을 잇고 대를 이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설 자격을 얻은 사람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미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생명의 체험의 승화로서 이해될 때, 믿음과 기쁨의 의미가 살아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이렇게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권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2데살 2,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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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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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의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 죽은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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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학년생들은 매일 ‘기도 노트’를 통해, 날마다 복음을 어떻게 연구하고 묵상하고 관상했는가를 지도사제들과 나누며 생활한다. 그런데 그 노트 마지막 부분에는‘의식성찰’이 있다. 양심성찰보다 의식성찰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양심성찰은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난 부족함과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의 삶을 살게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의식성찰은 성찰과 회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폭넓게 성찰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성찰을 통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하시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인식하여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며 거룩한 삶’(지혜 2,22)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신다. 그들은 현실에서는 거의 가능성이 없는 사례, 즉 ‘장남이 죽자 후사를 위해 그의 부인이 나머지 여섯 형제의 부인이 되어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면 모두가 죽은 후 그녀는 누구의 부인이 되는가?’ 하는 황당하고도(?) 비약적인 논리를 통해 부활이 없음을 주장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이 가능함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루카 20,38)이기에 인간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은 후의 세계가 과연 있을지, 있다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죽음의 세계에 대해 증언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문제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에 대한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처럼 자신의 수명이 다하게 되면 이세상을 떠나는 사람들과는 달리, ‘시작이며 마침’이신 분으로서 시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각 개인은 죽음을 통해 인생을 마감하지만,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시간(영생, 부활)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의지를 통해 우리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이다. 다만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2마카 7장)처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따라서 과거의 추억이나 막연한 미래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직시하며, 현재의 순간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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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희철 베드로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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