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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조회수 | 2,844
작성일 | 07.11.10
제1독서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 생명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일곱 명의 아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 그들은 영원한 생명, 부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강한 믿음과 희망으로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 어느 새 삼 백 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천주를 위해 목숨을 내어 바친 순교자들의 증언은 유대인들의 순교 이상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이 아닌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순교 했던 그 자리는 진정으로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영웅적인 신앙인을 마주하면 사뭇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과 궁핍을 체험합니다. 뒤르크하임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자주 궁핍에 대한 체험, 힘이 센 낯선 존재들로부터의 위협, 절망, 불의, 고독 그리고 슬픔에 대한 체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실존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둠, 착오, 곤경, 두려움, 부자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기만 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그 곳에서 우리는 세상이 지닌 신비와 우리 영혼의 세계 안으로 깊이 나아가며, 새로운 지평들과 내면의 세계가 지닌 부유함을 발견합니다. 내적인 길의 목표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는 완전한 사랑의 실현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남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지배되지 않으며, 타인의 기대 또는 상승하려고만 하는 내 안의 초자아의 요구들을 채워나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두가이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 사람들 앞에 좀더 훌륭한 존재로 서는 것, 영적 삶을 통해 윤리적으로 더 잘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유혹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두가이 사람들은 정의롭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동안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약할 때, 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잘 할 수 없을 때, 악으로부터 심각한 유혹을 받을 때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혜에 더욱더 마음의 문을 연다는 신앙의 역설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저는 끊임없이 제 삶으로 달려드는 두려움과 고독에 인사하며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기도합니다. 사랑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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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지성용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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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학생들에게 과자를 한 가득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자의 종류가 다 똑같아요. ‘빼빼로’라고 초콜릿이 발라져 있는 기다란 스틱형의 과자이지요. 글쎄 오늘이 11월 11일. 빼빼로 같이 생긴 숫자 네 개가 나오기에 빼빼로 데이라고 한답니다. 사실 빼빼로 데이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1월 14일은 다이어리데이,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 4월 14일은 블랙데이, 5월 14일은 로즈데이, 6월 14일은 키스데이, 7월 14일은 실버데이, 8월 14일은 그린데이, 9월 14일 포토데이, 10월 4일은 천사데이, 10월 14일은 와인데이, 11월 11일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빼빼로데이, 11월 14일은 무비데이라고 합니다.

상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기념일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날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사실 위에 언급된 날 자체로는 그러한 의미를 담길만한 특별한 날이 아니지요. 단지 사람들이 의미를 붙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동참을 하다 보니 이렇게 특별한 날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루하루를 스스로 이렇게 특별한 날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즉, 매일의 순간에 의미를 붙이고 산다면 내게 있어서는 매일의 삶이 특별한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의미를 붙이는 과정 안에서 우리의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끼게 됨으로 인해, 주님을 더욱 더 알게 되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더욱 더 특별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 특별하지 않은 날이 있을까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날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특별한 날들을 소홀히 할까요?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하고 끊임없는 걱정으로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들. 그럼으로 인해서 내게 다가오는 이 현재라는 시간에 얼마나 충실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말씀은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 시대에는 야곱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악 시대에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며, 야곱 시대에 이사악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이라는 현재에 항상 충실한 분이시기에,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현재에 충실하면서 살았을까요?

상술에 의한 특별한 날만 의미를 붙이지 말도록 합시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귀하고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처럼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로 그 순간, 특별한 날에 특별하게 살아가는 아주 행복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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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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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어떻게든 실천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새벽 묵상 글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이런 말을 종종 하십니다.

“신부님,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쓰시는 것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어떻게 매일 묵상 글을 10년 넘게 쓸 수가 있지요?”

사실 저 역시 1년이 넘어가니 글 쓰는 것이 점점 부담되더군요. 매일 다른 소재를 찾는다는 것도 힘들었고, 형편없는 글 솜씨가 더욱 더 바닥나는 것 같아서 힘들어졌지요. 글 쓴다는 것이 고역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새벽 묵상 글을 멈출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으로 힘들던 어느 날, 식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해서 고역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식사를 해야만 내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왕이면 맛있는 식사를 찾는 것이지요. 반드시 먹을 수밖에 없는 식사라면 그 식사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묵상을 하고 글을 쓰는 것 역시 내 영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역이 아니라 이 자체를 즐겨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즐기면서 글을 쓰다 보니 벌써 13년이 넘었습니다.

운동을 즐기는 선수는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합니다. 공부를 즐기는 사람 역시 평생 공부를 즐거움으로 살게 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만약 단순히 돈벌이로만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금방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는 즐거워도 순간의 즐거움뿐이고, 일시적인 성공만을 거둘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즐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삶은 고생만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닌 행복하라고 주신 것으로 즐기면 즐길수록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함으로써 행복의 길이 아닌 불행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희망이 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에게는 이사악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에게는 야곱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는 어떻게 활동하실까요? 맞습니다. 지금 내게도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지금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과 함께 하면서 지금을 즐겨보세요. 분명히 삶 자체가 달라집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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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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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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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인 11월의 첫 번째 주일인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임을 깨우쳐주며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인가요? 세상 사람들처럼 사라져버리는 것들. 돈, 명예, 권력, 건강인가요? 아니지요. 우리는 사라져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희망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영원한 삶! 곧 부활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마다 고백하는 신앙고백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은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일곱 형제가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내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 7,9)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힘들더라고 그것은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일 뿐,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희망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직선적인 시간관념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직선적인 시간관념으로 사는 사람들은 현세만 중요할 뿐 내세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고, 현세의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후에 누리게 될 부활, 영원한 생명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이때의 시간은 오직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었을 때의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죽고 나서는 오직 하느님 앞에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로서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는 죽음이 없고 모두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희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곧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이들 역시도 하느님 안에서는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교회가 신앙 고백하는 내용대로 성인들의 통공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사도 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모든 성인’이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곧 교회 구성원들 모두를 말합니다. ‘통공’은 서로 공로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수도 있고 서로를 위해 선행을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끊임없이 부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기도와 공로, 내가 누려야 할 은총을 세상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연옥 영혼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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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연정준 요셉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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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우유를 주문해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보다 더 건강해진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이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일까요? 아니면 이 사람의 우유를 몰래 훔쳐 먹었던 그 누구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글쎄 이 사람에게 우유를 배달해 준 배달원이 더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배달하는 노력, 즉 땀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생 때 영성면담 해주시던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너 요즘에 운동을 하지 않는구나.”

뜬금없이 하신 이 말씀에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고민과 운동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운동을 통해 땀을 흘리지 않으니 쓸데없는 잡념이 많고 스트레스도 쌓이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하는데, 그래서 쓸데없는 잡념을 없앨 수 있는 운동을 하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잡념으로 인해서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기도와 묵상, 희생과 봉사 등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잡념들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주님 곁으로 나아가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에 집중하면 되는데, 그 사랑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또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사랑’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일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두가이들의 주장을 다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일반 유대인들은 죽은 이들이 부활한다고 믿기는 했지만 부활 이후의 인간 상태에 대해 매우 조잡하고 육적인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이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는 모습이 부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면서, 현세와 내세를 똑같은 세상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던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맞아들여 후사를 이어주는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렇다면 천사들과 같아지는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시는 이들, 믿음으로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철저하게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져서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할 시간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시간이지요. 이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쓸데없는 생각과 판단으로 혼란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천사들과 같아지는 사람의 모습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천사들과 같아지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 그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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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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