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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조회수 | 2,905
작성일 | 07.11.11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가 20,38).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교회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신비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교리는 우리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오로 사도께서도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3-14)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인하여 우리는 현세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제1독서에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한 가족의 형제들이 보여주는 행위야말로 참된 오늘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 7,14).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요, 생명을 거두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라는 이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과 모든 시련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아니 바로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신 다음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나와 함께 계시며 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여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여유 있고 기쁨 중에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 이 세상의 짧은 삶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영적인 존재를 부정하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가르치며 하느님께서는 항상,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고엘이라는 모세의 법에 의하면 형이 결혼하여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첫 번째의 자식은 형의 아들이 되어 형의 대를 이어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집안에 칠형제가 있었는데 제일 큰 형이 대를 잇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에 따라서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였으나 그도 또한 대를 잇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해서 막내에게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고 하면, 마지막 부활의 날에 칠 형제가 다 부활하면 그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사두가이파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걱정과 질문은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하면서 부활 후의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인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어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은 당신의 손길을 거두어 멀리서 바라만 보시거나 또는 잊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함께 하시며 계시는 분이 신 것입니다. 그분이 영원하시듯이 그분이 창조한 모든 것도 그 분 안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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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가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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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쉬고 계시는 분도 아니며, 또 우리와 무관하게 다른 일로 바빠서 우리들을 잊고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며, 당신의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더욱이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맞이하셨던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부활에 대한 교리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우리들에게 살아계신 하느님을 죽은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자세를 지적하고 계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들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이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은 과연 우리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계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생활과는 별도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들이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죽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이웃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또 혹시라도 우리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제일 먼저 우리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느님이 우리들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우리들은 한 두 번의 하소연이 아니라 죽자 살자 하고 그분에게 매달릴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이 왔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그 소식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변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친구들에게 먼저 말하고 있다면, 과연 주님은 그 친구보다도 우리들을 잘 봐주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들은 매일 매일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으며, 매 주일 성당에 찾아와서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진정 우리들의 생활은 아직도 주님과의 삶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것과 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혹시 하느님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죽은 신처럼 존재하는, 곧, 네임덕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가톨릭의 한 사제가 유대인을 자기네 종교 쪽으로 개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유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개종하기 위해서 할 일은 그저 하루에 세 번씩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그는 사제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사제는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정말 개종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윽고 금요일 사제가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 유대인은 마침 닭을 튀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말하였습니다. “이제 금요일엔 닭고길 먹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아시겠죠.”

그러자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 그럼요. 그러나 전 이놈을 냄비에다 딱 세 번 넣다 뺐다 하면서 말했거든요.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유대인이었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라고 말만함으로서 가톨릭신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닭고기가 물고기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도 성당에 와서 신앙을 고백만 한다고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바뀌지도 않으며,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 또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은 하느님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만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여러분들의 삶에서 실제로 느끼기를 원하십니까?

그러하다면 먼저 여러분들의 신앙의 생활을 살아있는 삶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들의 신앙의 삶이 살아 있을 때, 바로 주님은 우리들 앞에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이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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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451 29.6%
[대전]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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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발자국에 고인 물도 마신다.’는 청정한 가을이다. 계절이 맑아 몸과 마음 모두 숙연해지는 이때에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를 엄숙하고도 차분하게 만든다.

기원 전 2세기에 싹트기 시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선포한 사도시대를 거쳐 확고해진 ‘부활신앙’은 인간적인 소박한 부활관에서 출발하였다. 부활의 세계를 현세 보다 더 많은 복이 내리는 ‘행복한 현세의 연장’으로 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했던 랍비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이를 잘 보여 준다. 90년 경 랍비 가말리엘은 ‘부인들은 매일 해산할 것이다" 했는가 하면 150 년경 랍비 엘리에젤은 “이스라엘 사람 은 각자 아들만 육십만 명씩 둘 것이다"하였다. 다산,특히 이들이 축복의 상징이던 때였으니 이보다 더 행복 하고 충만한 부활이 어디 또 있었겠는가!

오늘의 복음도 그런 맥락이다. “부활 때에 그 여지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율법에 따르면 남편이 아들을 두지 못하고 죽은 경우 과부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 하여 아들을 두어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했다.(신명 25,5-1이 이 ‘수혼법’을 예로 들며 사람들이 부활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자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현세의 그런 ‘행복한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창조되는 온전히 새로운 세계라 말씀하셨다. ‘저 세상에 참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루카 20,35-36)

사실 사도들이 선포하고 교회가 믿는 부활이란 단지 시체가 무덤에서 되살아나는 흔히 말하는 소생이나 환생이 아니다. 부활한 모습은 이승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영적으로 온전히 변형된 모습이다. 바오로 사도가 증언한 바대로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1코린 15,44)

엠마오로 가던 제지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결으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는 복음의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루카 24,13-3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적의 그분과 같은 분이 시면서도 아주 다른 차원의 존재로 체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이는 오감을 가진 우리에게 부활을 감각적으로’ 잘 느끼도록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교회가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할 길도 없다. 또 부활사실을 증명해서 교회가 비그리스도인을 설득한 적도 없다. 전적으로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심어 주신 선물이요 은총이다.

확고한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하느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꺾을 수 없는 영원한 격려와 희망을 주신다. 제1독서가 보여준 일곱 아들의 장엄한 순교 이야기가 이를 증명해 준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 희망하오." 맑고 아름다운 이 계절에 우리 모두의 믿음도 이들과 같이 맑고 굳건하기를... 아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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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명환 요셉 신부
2016년 11월 6일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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