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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조회수 | 2,519
작성일 | 07.11.17
세상 최후의 심판 날에 맞춰진 시계를 ‘지구 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라고 합니다. 이것은 1947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핵전쟁에 의한 인류의 멸망을 경고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정 7분 전이었고, 지금까지 모두 17번 조정되었습니다. 2007년에도 시계는 다시 등장했는데, 1월 17일자로 핵과학자협회는 23시 53분에서 23시 55분으로 2분 앞당겼습니다. ‘지구 멸망 5분 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협회는 시간조정 이유에 북한과 이란 등 일부 국가의 핵개발 움직임과 함께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와 환경재앙을 추가했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우주만물(宇宙萬物)이 시간과 더불어 창조됐고, 마침내 시간과 함께 종말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인간은 우주의 시작이 137억 년 전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아냈지만 우주 종말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주 종말의 시각 역시 분명하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종말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종말의 때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어 각 사람이 은총 안에서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되고 모든 행위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들도 완전히 밝혀지게 되어 공심판이 이루어지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때는 역사 안에 잊혀진 진실과 정의와 사랑이 승리하게 되고 이 승리가 거짓과 불의와 증오를 삼켜 버릴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이사25,8; 호세13,14; 1코린15,54-55)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죽음에 대한 승리가 이미 역사의 한가운데서 일어났음을 믿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이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의 거짓 종말론과 거짓 그리스도에 속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수고하며 모욕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특권과 영광으로 여깁니다. 복음을 위한 인내를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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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한영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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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 종말 = 행복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위령 성월을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삶을 더 진지하게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1월에 듣는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종말이라는 단어는 참 생소한 단어라는 것 입니다.

공자님 시대의 평균 연령은 38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년 전만 하더라도 평균 연령이 46세 였다고 합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삶이 어느 순간에 마감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말이었습니다.그런데 2002년 평균 수명이 여성을 기준으로 보면 80세가 넘었습니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면서 국가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온갖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고령화 문제는 비단 사회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종말신앙도, 죽음을 준비하는 신앙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경향이 짙습니다. 90세까지 살다보면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이라는 신앙이 강조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각 성당에 노인대학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노인에 대한 교회의 시각이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현대인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복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으로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시대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왕 하나만 주인이고 모두가 종인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휘둘러도 노동자들은 숨도 쉬지 못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는 세상의 반이 하느님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자와 장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대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겸손되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황 창연 (베네딕토)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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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어둠의 순간, 주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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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원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고통이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씩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도 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던 것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죽음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음을,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가 바로 당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죽음의 순간, 절망의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고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끝이 곧 시작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순간이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때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절망적인 박해 상황에서도 그때 주님을 더 깊게 만났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끝이 없으신 그분의 사랑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박해 시기에도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했습니다. 이분들은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자신이 베푸는 사랑보다 더 크고 탁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선조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느님께 벌을 받으러 가는 관문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상을 받으러 가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여기서 ‘얻다.’는 운동경기에서 승리하여 상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을 통해 상을 받으러 가는 것이기에, 그들은 박해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의 순간, 절망의 순간, 어둠의 순간, 그 순간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진정 바라보고, 부르고, 찾아오기를 말입니다. 그럼 당신을 알려주시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변화시켜주십니다. 따뜻한 ‘온’(溫) 자는 ‘죄수(囚)에게 그릇(皿)에 음식을 담아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의 순간 우리가 온유하신 주님을 만나면, 그때 우리는 온유(溫柔)한 마음으로 이웃을 품어주는 보살핌의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평화 넘치는 하느님 계신 곳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며 살리라(가톨릭성가 6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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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지철현 대건 안드레아 신부
2019년 11월 17일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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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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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는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 :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 혹은 ‘때가 왔다!’하고 떠들더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공부 중요!

그러나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때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때 어떻게 항변할까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라. 너희의 적수들이 아무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주겠다...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13-19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제2독서 : 2데살 3,7-12 :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10절)고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들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보다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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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16
451 29.6%
[수원] 노년 = 종말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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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위령 성월을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삶을 더 진지하게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1월에 듣는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종말이라는 단어는 참 생소한 단어라는 것 입니다.

공자님 시대의 평균 연령은 38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년 전만 하더라도 평균 연령이 46세 였다고 합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삶이 어느 순간에 마감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말이었습니다.그런데 2002년 평균 수명이 여성을 기준으로 보면 80세가 넘었습니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면서 국가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온갖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고령화 문제는 비단 사회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종말신앙도, 죽음을 준비하는 신앙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경향이 짙습니다. 90세까지 살다보면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이라는 신앙이 강조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각 성당에 노인대학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노인에 대한 교회의 시각이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현대인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복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으로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시대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왕 하나만 주인이고 모두가 종인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휘둘러도 노동자들은 숨도 쉬지 못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는 세상의 반이 하느님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자와 장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대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겸손되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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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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