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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조회수 | 2,756
작성일 | 07.11.17
교회 전례의 주년은 대림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다교 묵시문학에서 빌려온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묵시문학은 세상 종말에 대한 상상을 기록한 후기 유다교 문서들입니다. 이 문서들은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이 문서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말할 때,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으로 말하는 것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대해 유다인 묵시문학 문서들이 이야기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시와 때”(마르 13,32)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다가 로마를 거슬려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만에, 곧 기원후 70년에 유다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유다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의 반란이 어떤 비극을 자초하는 지를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성전은 오늘까지 재건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다교 당국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 저자들은 묵시문학이 말하는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도 그런 의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을 즐겨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우리는 재물을 저축하고 보험에 가입하여 안정된 미래를 계획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 혹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삶의 운동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당신의 참다운 미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의 실세들과의 갈등으로 당신의 죽음이 다가 올 때도 당신 힘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이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 그분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예수의 부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밑에 밟히고 있습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생결단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만이 우리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면,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우리의 미래만이 우리 앞에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하면서 하늘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 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의 결과가 하느님의 생명과 환희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재의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환경에서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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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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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여정

흔히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사는 본당신부가 사제의 꽃이라고들 한다. 십여 년이 넘는 학교생활을 끝내고 그토록 그리던 본당신부로 돌아온 지 달포가 지났다. 모처럼 본당신부로 나온 심정이 어떠냐고 묻기에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본당을 떠난 지가 오래 되어서 만은 아니다.

신자들과 첫 대면의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 생활하러 왔다. 여러분과 나는 직분이 평신도와 사제로서 서로 다를 뿐, 신앙 생활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라면 저는 ‘사제로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미사에 잘 참석하고 각종 성사를 빠뜨리지 않고 잘 지켜나가는 것 그리고 각종의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라면, 사제의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미사나 전례에 잘 참석하도록 준비를 잘하여 드리는 것이며, 또 여러분들이 불평이나 불편하지 않게 필요에 따라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과 귀를 열어 독선적인 사목을 지양하고 사목의 동반자로서 평신도 여러분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 힘쓰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함께 신앙생활 열심히 해 보자.”라고 하였다. 그러자 본당의 한 원로께서 “본래 신부님들이 부임해 오면 하나같이 다 그런 말을 하시던데 신부님도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런 건 아니겠지요?”라는 말에 정말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항상 마음에 새기던 본당 사제로서의 나의 사목 원칙이 그동안 그렇게 오ㆍ남용(?)이 되어 뒷골목에 나뒹구는 헌신짝처럼 버림받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당신만이라도 정말 그렇게 한번 살아 보라는 그야말로 신자들의 애정 어린 바램인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라고 하셨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테살 후 3,6)라 하여 우리 모두는 그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자신이 사제이든 평신도이든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예언직과 자신이 제물이 되어 세상을 구해야하는 사제직 그리고 세상에 봉사해야 하는 왕직을 다해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함께 가야하는 여정의 동반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용조 신부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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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떨어지는 낙엽의 계절과 더불어 교회의 전례력도 이제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주일과 다음 주일인 그리스도의 왕 대축일을 지내고 나면, 교회의 전례력은 올해에 이별을 고하고 대림절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것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른 교회의 전례력에 발맞추어 평일 미사와 주일 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종말론적이고 묵시(黙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헬레니즘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다운 그리스도이신 인자(人子)의 재림으로 오히려 완성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임재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온갖 미움과 거짓, 박해와 환란, 고문과 죽음 속에서도 믿음과 용기를 잃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렇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사람은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직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박 상대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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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인내로써 생명을……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을 들었습니다. 본래의 이름은 교향곡 5번 C단조였으나 동양에서만 ‘운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어떤 다른 교향곡을 작곡할 때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할애하여 이 교향곡을 썼으며, 공을 많이 들인 만큼 걸작으로 9개의 교향곡 중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는 곡입니다. 더구나 그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잃어가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멋진 곡을 완성했습니다. 1악장 첫머리에 현악기와 클라리넷의 힘찬 1테마의 연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가 어우러져 웅장하며 멋진 곡을 들려주었습니다.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클라리넷, 트럼펫, 팀파니, 심벌즈 등 여러 악기가 어우러져 웅장한 곡을 연주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간 평신도 주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여러 재앙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시작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전쟁, 큰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인내는 가끔 시련을 동반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위한 영적 쇄신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영적 쇄신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악기 하나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몇 년 혹은 그 이상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합니다. 인내의 시간을 견디어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저마다 각기 다른 악기들이고 그 악기들을 연주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양도 크기도 소리도 재질도 다르지만 인고의 시간을 견디어낸 뒤라야 비로소 좋은 악기와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바이올린처럼 높은 소리로 바쁘게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어떤 이는 첼로처럼 낮으면서 중후한 소리를 내는가 하면 심벌즈처럼 아주 가끔 소리를 내지만 확실한 소리로 모두를 집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마다 제가 가진 소리를 성실히 낼 때 모두가 어우러져 교향곡이 되듯 우리 모두의 모습도 각자 자기 역할에 성실할 때 교회 안의 멋진 연주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부단히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신의 소명은 어떤 것인지 다시 새기면서 성실한 연주자가 되도록 다짐하는 날이어야 되겠습니다.

<부산교구 기태 세례자요한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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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늘 깨어 준비하는 삶

이두매아 출신으로 유다의 임금이 되었던 헤로데 대왕은 유다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기원전 20년경 성전을 증축하기 시작합니다. 헤로데는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성전이 있던 산 정상을 덮을 정도로 큰 성전 지대를 건설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죽음을 맞은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예수님 시대를 지나 기원후 64년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보았던 성전도 여전히 증축 중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 말씀처럼 기원후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티토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오늘날 로마를 방문하면 포로 로마노 입구에 티토의 개선문이 있는데, 개선문 안쪽 벽면에 예루살렘 성전 기물을 운반하는 로마 병사들이 잘 부조되어 있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서의 장면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던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담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저술할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파괴된 뒤였기 때문에 루카가 전하는 이야기는 매우 생생하게 들립니다. 실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듯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대립도 커지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도 좀 더 체계적이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복음서 마지막에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복음서의 종말론적 분위기는 오늘 1독서에서 봉독한 말라키 예언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역시 이제 곧 닥칠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합니다. 화덕처럼 불붙는 날, 곧 하느님 심판의 날이 다가올 것인데, 그 심판은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모두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의인들, 곧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치유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지 항상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 때와 시간을 아무도 모르기에 언제나 깨어서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종종 종말을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종말을 잘못 이해해서 불안에 떨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호도하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교리로 넘쳐나는 지금 독서와 복음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종말을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못한 채 앉아있지 말고, 묵묵히 예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우리에게 구원의 시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제 연중 시기도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다음 주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고, 이내 대림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전례의 주제가 종말에 집중됩니다. 이러한 시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종말, 곧 완성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기뻐합시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날이 왔을 때 거만하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로 모두 영광스러워질 수 있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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