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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조회수 | 2,871
작성일 | 07.11.18
예루살렘과 성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르는 곳이며 유다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야 했습니다(탈출 23,14; 34,23; 신명 16,16).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2,41)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합니다. 예수님은 해마다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시면서 성전이 변질되어 가는 모습과 그 안에서 빚어지는 죄악을 보셨고, 어느 날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격노하시며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루카 19,45-­46).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예수님은 줄곧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성전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참된 예배를 하는 장소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루카 19,41-­44).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합니다만 예수님은 성전 파괴의 이유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19,44)이라 하셨습니다. 곧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대로 첫 번째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나의 것으로 선택하여 제사의 집으로 삼았다.”(2역대 7,12)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너희를 뽑아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려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겠다.”(2역대 7,19-­20) 예루살렘 성전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전이 파괴된 근본 원인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긴 탓이었기에 예수님도 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카르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어디가 맞는지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그리짐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마태 27,51). 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는 말씀을 당신 부활로 성취하셨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요한 4,23)가 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실 집을 인간이 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늘이 당신의 옥좌며 땅이 발판인 그분은 어디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이제는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는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입니다. 이제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그곳은 하느님께 산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 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 종말설을 운운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신흥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온갖 영성 운동에 심취하여 신앙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희귀병의 출현, 전쟁과 테러 위험 등을 생각하면 참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고 이러다 세상의 종말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봄 황사가 심해 한낮인데도 어두워진 것을 보고는 탈출기에 나오는 ‘어둠의 재앙’이 떠올랐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 시대에 교회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써 낙태와 피임을 반대하고,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역류한다고 교회를 비난하거나 반발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박해라면 우리는 교회의 신념에 동참함으로써 피 흘림 없는 순교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형리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조리 있게 변론할 수 있도록 작용하신 성령의 역사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성령께서 지금도 양심을 지키며 제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 안에 작용하심을 믿는다면 좀 더 소신 있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바치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것들로서 이루어집니다.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묵시 21,2) 있는 천상 새 예루살렘 성전을 갈망하며, 항구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야겠습니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주겠다.”(묵시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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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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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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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지도 중에 이따금 좋아하는 성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느님을 기리며 부르는 성가는 모두 좋아한다고 준비된 대답을 하곤 하지만, 내심 특별히 좋아하는 성가가 있긴 합니다.

가톨릭 성가 463번 ‘순례자의 노래’는 언제 불러도, 또 언제 들어도 제게 세상의 어느 연가(戀歌) 못지 않은 애틋한 감흥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예수님은 오늘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지만, 왠지 애틋한 희망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당신 때문에 겪게 될 모든 박해와 고통마저도,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들마저도 하느님의 크신 섭리 안으로 모든 것이 수렴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처럼 여겨지니 말입니다.

아무것도 확언할 수 없는 인생의 순례자로서 신앙인의 삶이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시는 사랑을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삼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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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고난회 서현승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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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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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를 마치고 사용한 그릇들을 주방으로 나를 때였습니다. 평소에도 늘 밝은 얼굴의 주방 자매님이었는데 오늘은 더욱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콧노래까지 부르고 계셔서 궁금해진 제가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적금이라도 타셨나 봐요?"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자매님 대답은 전혀 의외였습니다.

"요즘 우리 신부님, 수사님들 아침마다 피곤하신 것 같고 그래서 식욕들이 없어보여서 늘 안타까웠는데 오늘 아침에는 밥들을 다 잘 드셔서 밥이 하나도 안 남았거든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그럼, 밥이 다 떨어졌으면 자매님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제가 라면이라도 하나 끓일까요?"

행복이 가득 묻어난 얼굴로 극구 사양하며 하시는 말씀. "신부님, 수사님들 잘 드시는 모습 보는 것이 제게 제일 큰 기쁨이지요. 저는 매일 굶어도 돼요."

저희들의 왕성한 식욕 탓에 아침도 거르셨지만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열심히 일하시는 주방 자매님 모습을 바라보며 '일상에 대한 충실'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자세인지, 얼마나 이웃들에게 큰 선물이 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식사 준비처럼 매일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일상의 작은 일들, 매일 귀찮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들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 속에 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 앞에 가장 큰 봉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성전 파괴와 더불어 종말을 예고하십니다. 그 마지막 날 고통이 크겠지만 잘 준비한 사람들, 끝까지 견디고 참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급이 클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하는 삶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매일 매일 정리하는 삶, 매일이 마지막인 듯 단정하게 살아가려는 삶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기적 삶으로부터 이타적 삶으로 옮겨가려는 노력, 육적 삶으로부터 영적 삶으로 전환하려는 노력, 복잡다단한 생활 양식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으로 바꿔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합당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주일을 맞아 '평신도 영성'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평신도 영성'이란 무엇보다도 '일상적 영성'이 아닐까요?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로 여기는 영성, 그 '매일'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 그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아끼고 사랑하는 영성일 것입니다. 비록 오늘 하루가 고달프다 하더라도 아침에 눈을 뜨면 늘어진 어깨에 다시금 힘을 불어넣는 영성, 하루를 기쁘고 신명나게 살아가려는 영성일 것입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기회 닿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매일의 의무를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해야 할 바를 성실히 해 나갑시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시다. 그것이 주방 봉사든, 청소든, 기도생활이든, 고통의 수용이든 뭐든지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일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일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평신도 영성의 본질이며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 복음의 길이자 영성의 길입니다.

특별한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매일의 고통을 잘 견뎌냄으로써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눈물과 기도로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매일 맡은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비우고 매일 떨치며 매일 새출발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을 향한 성덕의 계단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최근 시복시성(諡福諡聖)되고 있는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결점 투성이였던 인물이었음에도 그 부족함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지속적으로 성화(聖化)되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시성시복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는 것'(1데살 4,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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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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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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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형제와 다투었다.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의견을 나누다 보니 사소한 오해가 생겨 다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 말이 과거에 아팠던 기억을 건드리게 되었고 그 아픔이 나를 화나게 한 것이다. 하느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약속하고 이 길을 택했지만 여전히 내 부족함과 과거에 입은 상처가 또다시 아파 와서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놓아야 할 때 내 안의 상처는 더욱 쑤시고 아프다. 마음이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하기에 조건 없이 사랑하기는 더욱 어렵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상처와 부족함을 통해서 어떻게 사랑하여야 할는지, 어떻게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 많이 배우기를 바라시는 모양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평안한 마음으로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완벽한 상황과 조건에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이 사람이, 내일은 저 사람이 나를 힘겹게 하고 아프게 한다. 내게 닥치는 이런저런 상황이 미움과 두려움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사랑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상황이 우리를 더욱 사랑하도록 촉구한다. 사랑을 배워가도록 이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피하고 싶고 미워하게 될 때 사랑을 배우고 증거하라는 오늘의 말씀을 되새긴다. 세상의 그릇된 가치와 사욕의 논리 앞에 직면할 때 그때야말로 아픈 상처를 무릅쓰고 주님의 복음을 증언할 때이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새기면서 사랑의 상처가 주는 두려움과 아픔을 견뎌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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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이정호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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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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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험과 곤경에 처하게 되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우리나라도 국내외 정세가 혼란스럽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면 예외 없이 정감록(鄭鑑錄)같은 역서(易書)들이 들먹여지고 유언비어가 떠돌게 됩니다. 요즈음 일간 신문에 재미삼아 실리는 ‘오늘의 운세’나 대문짝만하게 실리는 역술인의 광고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기원 전 2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 사이에 묵시(默示)문학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는 정치적 혼란 시기에 나오는 일종의 난세(亂世)문학입니다. 시리아 정권의 박해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로 고통을 받아온 유다인들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변하는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께서 통치하는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두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실의에 빠진 백성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종교적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묵시문학도들은 자신만이 그 엄청난 미래를 훤히 안다고 자부하면서, 상징이나 비유, 우화 등을 많이 사용하여 역사나 종말을 서술합니다. 그러니 묵시록적인 표현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혼란이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종말의 시기나 장소(루가 17,20-21),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의 수(루가 13,23)에 대한 호기심을 일축하시고, 오히려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가 복음사가는 작은 묵시록이라고 일컫는 마르코 복음 13장을 옮기면서 자신의 종말관에 따라 수정 또는 가감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서기 70년경)에 쓰인 마르코 복음이 예루살렘 멸망을 종말 직전의 전조로 여긴 반면, 서기 80-90년경 집필된 루가 복음은 예루살렘 멸망을 단순히 역사의 비극으로 보았지 종말의 전조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루가 21, 8), 전쟁과 반란에 대한 풍문(9절), 세계대전(10절), 큰 지진과 전염병, 기근(11절) 등도 종말 직전의 전조는 아니고 다만 전조(진통)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박해(12-16절)도 종말의 전조가 아니므로 종말이 이미 도래했다느니 또는 임박했다느니 하여 현혹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참고 견디라고 권고합니다(19절).

그렇습니다. 곤경과 불안, 위기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증거자가 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분쟁과 전쟁,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이 사회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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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씨튼 수도회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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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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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 하루 2시간씩 기도 했습니다. 한 ‘특별한’ 신자분의 생활 나눔을 전해 들으면서 얼마나 큰 감동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늘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다 보니 더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왜 그리도 얄미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 단 한 번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보기만 봐도 속이 상하기에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더 자주 마주치더군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속이 엄청 상해서, 건강도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 하는 생각에 그 사람만을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시간씩 그 사람을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그렇게 몇 달을 기도했더니 글쎄 기적이 일어났지 뭡니까? 그 사람이 변하기보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제가 먼저 변하더군요. 그렇게 미워보이던 사람이 이제 그렇게 측은해보이고, 안 되 보였습니다. 불쌍해보였습니다. 그저 한 번 더 끌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무례함이나 부족함 앞에 세상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대처한 결과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체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고, 끝까지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끝까지 상대를 배려한 그분에게 ‘자기해방’ ‘이웃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주라는 예수님 말씀, 왼뺨을 치거든 오른 뺨마저 내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얼마나 큰 인내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손해 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충실하고자 노력한다면,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 추종하고자 노력한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과의 대립과 충돌입니다. 가장 어려운 과제인 희생이요 자기 죽음입니다.

복음에 충실하려면 세속의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지니는 보편적인 상식과의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극도의 자존심 상함, 손해, 바보취급 당함,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런 분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클 것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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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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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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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성인(聖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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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주일을 맞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평신도들의 신심생활, 영성생활에 큰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입니다.

당시 신심생활이나 영성생활, 성화의 길은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려니 하는 분위기가 다분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성화와 완덕에 이르는 길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크게 외친 것입니다. 성인께서 저술하신 그 유명한 ‘신심생활입문’을 통해 모든 인간은 성화와 완덕의 길로 불렸음을 널리 천명하였습니다.

“신심생활이 군인들의 막사,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이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며 이단 교설입니다. 세상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구원과 성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은 참으로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약 4세기 후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성과 성화 및 영성의 다양성 교의를 미리 밝힌 것입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이 시대 성인(聖人)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대해서 한번 묵상해보았습니다.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시복시성 되고 있는 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지. 문제성이나 결점 투성이였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족함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지속적으로 성화(聖化)되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시성시복되고 있습니다. 시성시복은 우리와 결코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의 그칠 줄 모르는 노력과 이웃들의 도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역시 성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연중 교회력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또 다시 우리가 실천해야할 최우선적인 과제는 성화(聖化)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하게 되는 것’(테살로니카 전서 4장 3절)입니다.

특별한 그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매일의 고통을 잘 견뎌냄을 통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눈물과 기도로 밤을 지새지 않아도 매일 맡겨진 직무에 충실함으로서 우리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비우고 매일 떨치며 매일 새 출발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을 향한 성덕의 계단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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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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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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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버린 신앙이 아니라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길은 신앙의 길과 서로 맞닿아 있으며 서로 일치합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신앙은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내로써 생명의 가치를 더욱 충만케합니다. 신앙은 저마다 자신의 몫에 충실케 합니다.

오늘 함께 하는 평신도 주일은, 우리 모두 신앙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참맛이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곳에서 소중한 맛을 체험하는 은총의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가치가 우리 삶의 존재 가치가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저마다에게 주어진 역할과 몫에 다시금 충실해지는 여정되십시오. 저마다의 위치에서인내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시는 형제, 자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가장 가치로운 신앙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이 우리의 신앙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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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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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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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종말에 관한 말씀이 복음 말씀으로 선택되고 있다.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잘 이해하는 묵시문학적인 표현으로 종말 전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가짜 그리스도들이 나타나고, 민족 간의 대립과 전쟁, 큰 지진, 기근과 전염병이 생겨난다 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들은 항상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일어난 일들이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너무 친근하리만치 경험하고 있는 상황들이 아닌가? 세상의 어수선함을 틈타 늘 사이비 사기꾼들이 등장했고, 어처구니 없는 집단을 만들어왔다.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갖가지 욕망에 사로잡힌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지진이나 태풍만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는 빈곤과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의 병을 극복하면 또 다른 병이 생겨난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타락상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교회는 너무도 많고 긴 박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어디선가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도 종말의 조짐에 관한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어쩌면 인류는 종말의 시간을 끌어당길 수 있는 악을 만들어가면서 역사를 채워왔음을 부인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반면, 악에 굴하지 않고, 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투신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거룩한 희생, 그리고 그저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며 살다간 아름답고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았으면 한다. 분명 인간의 이기심과 타락이 더 할 수 없이 커졌을 때 우리는 세상의 끝을 경험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멸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실 것이다. 지금도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신지도 모른다. 복음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그로 인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어수선하면 어수선 할수록 더욱 힘을 내서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 아름다움으로 누군가가 또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자손들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보다 많은 이들이 이 삶을 제대로 살다가, 제대로 된 세상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만 한다.

그날은 하느님만 아신다고 한다. 어쩌면 이 말씀은 모든 것이 세상 안에 있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말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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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문학(默示文學)이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세말에 대해 표현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학양식이다. 단지 자신의 민족의 존폐를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끝 즉 종말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을 주제로 한 글들의 모음이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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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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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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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입니다. 말세입니다. 흔히 오늘의 세상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전에서 말뜻을 찾아봤습니다. 난세(亂世;정치가 문란하고 질서가 흐트러져 전쟁 따위가 그치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이었고 이 말 풀이대로 라면 난세임이 분명합니다. 말세(末世;정치나 도의 따위가 어지러워지고 쇠퇴하여 가는 세상)이었고 이 말 풀이대로 라면 말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난세 아닌 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난세요 말세였습니다.

제가 89년도 사제서품을 받은 후 24년간 썼던 강론 내용을 봐도 비관적이 현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시는 정말 힘든 난세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말세야, 말세야’를 되뇝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 연중 마지막 전 주일로 계절 역시 으스스한 종말의 분위기인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모두 난세의 종말 분위기를 반영하며 종말의 난세분위기에서 태어난 묵시문학작품들입니다.

말라키 예언서는 기원전 480-460년경에, 2테살로니카서는 기원후 52년경에, 루카복음은 80-90년경에 모두가 고난이 극심했던 난세에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 용기를 주기위해 쓰여 진 성경들입니다.

난세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보합니다. 오늘날 정치현실을 보면 분명 반복되는 역사지만 뚜렷한 진보의 흔적은 사형과 고문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옛날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보면 인권부재의 사회였고, 정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과 잔인한 고문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지금이 난세라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어 일제시대, 6.25동란 등 지금까지 우리의 근, 현대사도 끊임없는 재난, 재해, 재앙 등 난세와 말세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태평성대로 여길 수 있는 이상적 현실은 잠시뿐이었고 대부분의 난세였습니다.

사실 당시의 절망의 현실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민주주의 덕분입니다. 이런 절망의 난세를 살아내어 오늘과 같은 기적의 현실을 이뤄 낸 우리 민족의 저력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분명 오늘날의 현실 역시 난세는 난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그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희망입니다.

희망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처방입니다. 난세에 하느님이 주셨던 묵시문학의 주제도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극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인간성의 황폐로 악마가 되지 않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두를 잃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빛과 어둠을 함께 보며 균형을 잡습니다. 빛의 긍정으로만, 또는 어둠의 부정으로만 향하는 양 극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희망의 빛 안에서 빛과 어둠의 현실을 다 아우릅니다.

종말은 심판의 때임과 동시에 구원의 때입니다. 구원의 희망이 난세의 절망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오늘 말라키 예언서는 이런 어둠과 빛의 대조가 선명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어둠의 심판이요, 이런 종말의 충격적 표현들이 바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했던 이들에게 종말은 구원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바로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어둠을 뚫고 동터오는 아침 태양처럼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난세의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희망의 태양, 하느님입니다. 이런 희망의 태양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난세를 이기는 사람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처방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삶에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주어진 현실을 사랑하며 자존감 높은 삶을 삽니다. 주어진 정주의 제자리에 항구히 충실합니다. 난세라 하여 종말이 왔다하여 쉽게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감언이설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복음 말씀처럼 누가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해도 현혹되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처럼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합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의 삶입니다. 무질서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사랑에서 질서와 균형의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바오로 사도의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이 환히 들어납니다. 바로 이게 지금 여기, 난세를 살아가는 구체적 사랑의 삶입니다. 이런 삶보다 더 좋은 사랑의 본보기도 없습니다. 어느 교육자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좋은 삶의 본’이다. 나는 내 자식에게 좋은 삶의 본을 보여주지 못함을 두려워할 뿐, 자식교육에 무심한 것을 자책하지는 않는다.”

사랑도, 희망도,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좋은 삶의 본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런 사랑의 좋은 삶의 본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셋째, 믿음입니다.

믿음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세 번째 처방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큰 지진과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겨도,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주신 믿음의 위력입니다.

박해 중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언변과 지혜로 주님을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은 난세에 처한 이들에게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증언합니다. 마지막 주님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주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믿음의 사람들은 난세의 온갖 시련과 고난 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에 인생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안팎으로 무너지고 망가지겠지만 주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지은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은 요지부동입니다. 마지막 주님 말씀이 중요합니다.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인내’보다 ‘참고 견딤으로’ 표현함이 적절합니다. 루카 8.15절에서 역시 '인내로서 열매를 맺어라.' 말하지만 '인내' 역시 ‘참고 견뎌’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

참고 견디다.’는 영어는 ‘펄써비어런스(perseverance)’입니다. 그냥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끝까지 버텨내는 불굴의 노력을 뜻하는 적극적 인내를 뜻합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을 뜻합니다. 잡초를 연상하면 됩니다. 아무리 짓밟혀도 곧장 다시 일어서는 잡초 같은 믿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참고 견디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우리들입니다.

항구히 참고 견디는 믿음의 열매가 구원의 생명입니다. 결코 값싼 생명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백절불굴의 참고 견뎌내는 하느님 주시는 믿음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세 번째 처방입니다.

과연 난세입니다. 며칠 전 강남 쪽에서 피정 온 분들에게 면담 식 고해성사를 주면서도 새삼 깨달은 점입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는 것 같은 데 내적으로는 위태해 보였습니다. 대부분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했습니다. 보속의 처방 말씀도 저절로 다음 말씀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14,27).

하여 수도원 십자가로 예수 부활 상 돌 판에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에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두렵고 불안한 난세를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처방을 주셨습니다. 희망과 사랑과 믿음의 향주삼덕입니다.

하느님 희망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요, 하느님 희망에서 참고 견뎌낼 수 있는 믿음도 생겨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풍성한 희망과 사랑과 믿음을 선사하시어 난세 중에도 아름다운 품격(品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시편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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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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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를 알아듣게 이끌어주시고 제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끝 날에 대한 이야기다. 끝 날이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그날에 일어날 표징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 이야기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도 끝 날에 대해 이야기한다.(마태 24장; 마르 13장 참조) 복음서에서 말하는 끝 날은 물리적 시간 개념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여러 사건과 상황이 끝 날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되었다, 끝 날이 왔다고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이다.(8절 참조)

그 사건과 상황은 하나의 현상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벌어질 수 있는 이 세상의 현상이다. 먼저 대두되는 현상은 잘못된 가르침에 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8절에 사용된 동사 ‘플라나오(πλανάω, 속다)’는 길을 잃어버려 헤매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이단을 가리킬 때 사용한 동사다.(2요한 7절; 묵시 2,20 참조) 예수는 그 뒤를 따라가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8절) 잘못된 길에는 그리스도로 자처하는 이와 세상 끝 날이 왔다고 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명확하다. 누가 그리스도인지, 언제가 끝 날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끝 날의 표지는 끝 날임을 확증하는 이들의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끝 날이 언제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오늘 복음은 답하지 않고 있다. 답답할 정도로 끝 날에 벌어질 표징적 사건과 상황만 나열한다. 전쟁과 반란 그리고 자연적 재앙, 더 나아가 박해와 대립이 나타난다. 모두가 예수 시대에 팽배했던 묵시주의적 사상에 기반한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이사 13,10; 에제 14,21;32,7-8; 아모 8,9) 이러한 상황들은 어찌 보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일들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무서움을 안겨줄 일들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오히려 당당히 맞서 증언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고하신다.(13절)

끝 날은 새로운 시작의 때다. 떳떳이 나서서 미움과 박해를 꿋꿋이 이겨내는 증언의 시작이다. 언변과 지혜는 예수께서 주시니(15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의 시간’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19절) 끝 날은 인내를 살아가는 시간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는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세상의 논리에도 굴하지 않으며, 그로 인한 폭력과 저항 그리고 미움에 당당히 맞서는 시간이 끝 날의 시간이다. 어찌 보면 끝 날은 저 미래에 펼쳐질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네 일상 안에 비일비재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이리라. 거짓에 굴하여 끌려가지 않는 시간, 그래서 내 자리를 어쨌든 지켜내는 노력, 그 때문에 끝 날의 시간은 묵시주의적 현상들보다 더 어려운 시간일 수 있다.

묵상(Meditatio)

경쟁하고 노력해야 살아남는 세상에서 ‘인내하라’는 메시지는 패배자의 자위적 명제가 되고 만다. 어떻게든 개척해서 자기 삶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제일인 양 떠드는 세상에서 인내라는 덕목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의 답답한 소리 정도로 치부되고 만다. 세상의 주류가 외치는 소리의 대부분이 이렇다. ‘이렇게 살아야 잘된다’, ‘저렇게 살아야 맞는 삶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삶의 규칙을 따를 필요가 있다’ 등. 이는 소위,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말들이다. 제 삶을 개척하기보다는 남이 제시한 삶에 순응하고 살아가라는 말들이다. 어찌 보면 엄청나게 현실적인 말들 같아도 되돌아보면 제대로 된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드는 아둔한 말들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고, 저기에 세상 끝 날이 있으니, 너는 나를 따라라’ 하는 식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따라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수동적 삶은 세상의 논리에 거슬러 꿋꿋이 증언하는, 그래서 그 증언 때문에 주어지는 숱한 박해를 인내할 수 있는 삶과는 참으로 동떨어진 듯하다. 이 나라에 불법과 부정이 흔히 발생하는 것은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세상에 대적할 만한 ‘끝 날의 인내로운 증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Oratio)

그분께서 오신다.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께서 오신다.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 (시편 9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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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박병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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