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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조회수 | 2,962
작성일 | 07.11.23
몇년 전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할 때였다. 그 가정에는 할머니 한 분이 홀로 살고 계셨다. 그 할머니께서 동행한 구역장 자매를 가르치며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는 밤중에라도 갑자기 몸이 아프면 우리 구역장님한테 전화를 해요. 그러면 언제든지 저에게 달려와 기꺼이 도와 준답니다. 그리고 아프지 않아도 일주일 몇 번씩 잠깐이라도 들려서 이 노인네랑 말벗이 되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에게 우리 구역장님은 하느님이 보내 주신 수호천사네요”라고 했더니 할머니는 “맞아요, 맞아요. 천사예요”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 때부터 내가 그 구역장을 보면 “천사 구역장”이라고 별명을 붙여 불렀다. 그러면 그 구역장은 손사래를 치면서 수줍어하시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며 그리스도 왕의 명령을 따라 살겠다는 결의를 재다짐하는 날이다. 요즘 세상에 무슨 왕인가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왕의 개념과는 한참 다르다. 특히 고통과 조롱 속에서 죽어 간 그분의 모습은 왕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을 강제로 지배해서는 안 되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왕권의 모습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원리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왕직이란 바로 봉사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왕, 진정한 지도자는 모두 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남을 섬기고 남의 종이 되어 주기는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봉사하면서 교만과 허세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세상을 통치하고 사회를 다스리는 힘은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과 가정을 평화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몸소 알려 주셨다.

“주님, 우리도 주님을 따라 겸손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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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왕은 오직 한분이십니다

"신부님, 십자가 위에 붙어 있는 'I.N.R.I'가 무슨 뜻입니까?"
 
어느 날 예비신자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I.N.R.I'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약자로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말씀일까요? 또 교회는 왜 오늘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시다.
 
복음을 보면 두 사람의 왕이 나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왕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입니다. 두 번째 왕은 조롱의 의미로 유다인의 왕이라 불리운 나자렛 예수입니다. 이 두 왕, 빌라도라는 유다인의 왕과 우리 신앙의 왕 예수님을 비교해 보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의 제5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자기를 가로막는 것은 칼과 창으로 가차 없이 베어버리고 마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다의 가난한 시골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딱 한번 칼을 사용한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이시며 십자가상에서 처형되신 '왕'이 우리가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조롱거리가 되어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어디서나 주님으로 흠숭 받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막강한 무력을 행사했던 빌라도왕은 예수님에 의해서 기억되는 존재일 뿐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곳은 성지가 되어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그 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은 출간된 이래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기록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왕이지요.
 
우리는 이 두 왕을 비교하며 어떤 왕을 섬겨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빌라도와 같은 인생길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의 생활은 빌라도의 권력을 흠모하고 빌라도의 삶을 흉내 내고 있지나 않은 지요?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1997년 9월 5일 87살로 선종할 당시 사랑의 선교회는 전 세계에서 거의 4000 명에 달하는 수녀들이 600여 개의 고아원과 무료급식소, 노숙자들을 위한 거주지, 병원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의 하루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없는 중노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루는 시간에 쫓긴 한 자매가 데레사 수녀를 찾아와 하소연하였습니다.
 
"수녀님, 일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모두가 피곤에 지쳐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기도 시간을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데레사 수녀의 답은 참으로 간단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기도 시간을 두 배로 늘리십시오."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신자답게 살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회생활은 조화를 이뤄야 하며 그 중심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삶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남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결국 그 길이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을 2000년 역사의 그리스도교가 확인시켜 줍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에서 고백한대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분 말씀을 내 삶 안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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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황제냐 십자가의 왕이냐?

프랑스의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일 때 스페인을 점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17세기 초엽, 스페인의 왕인 카를로스 4세와 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왕자 페르난도와의 싸움에 나폴레옹이 개입되어, 스페인을 정복하려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1808년 5월 2일과 3일에 강제로 스페인 왕가를 “바욘”이라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으로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바로 그때 시위대와 프랑스 군대가 부딪쳤는데, 수많은 시위대가 이틀에 걸쳐 색출되어 죽어갔습니다. 이 긴장감 넘치는 작은 충돌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그 유명한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입니다.

이 사태로 나폴레옹은 스페인 정복에 발판을 얻어, 자신의 형을 조제프 1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왕으로 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의 명목은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주의를 스페인에 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봉건주의적 특혜를 폐지하고, 전체 교회의 3분의 1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복은 영국의 개입과 스페인 민중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게 되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5년이 전쟁의 패배로 왕위에서 물러나 성 헬레나 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역사에서 수많은 왕들은 자신의 지배욕과 명목으로 수많은 인명을 사살하면서 이웃 나라를 정복하려다, 실패와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에서 보인 그런 왕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로마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메시아, 구약의 오랜 예언 속에 나타날 “왕”은 결국 십자가의 처절함으로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제국을 지배한 위세 당당한 황제 나폴레옹 같은 위용을 보고 싶어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함께 달린 죄수에게도 모독을 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사람들을 위해 보여주신 모든 기적과 표징이 무의미한 상태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의 말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이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습니다.

군중들은 그들이 믿었던 왕,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라고 빈정거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내세우면서, 지배자의 위풍당당한 나폴레옹 같은 왕, 아니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어 가시는 왕, 어느 왕을 바라며 살아갑니까? 세상 왕의 종말은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아니 그 왕들은 단지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넘어, 백성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활의 영광 속에, 이 세상을 초월해서 영원히 신앙인들과 함께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베풀어 주신 모든 표징이 그 의미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메시아시라는, 진정한 이 세상의 왕이라는 사건,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는 한낱 영웅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를 사랑의 법칙으로 다스릴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왕께 경배하도록 초대하고, 그들을 진정한 왕의 나라로 인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 왕께 경배드리세! 아멘.

양해룡 신부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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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은 봉사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왕

오래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20대 청년들이 범죄 집단을 결성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경찰에 체포될 때 “더 많은 사람을 해치지 못한 것이 한(恨)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악마의 탈을 쓴 인간이라며 비난했습니다. 당시 법에 따라 그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몇 명은 수감 중이던 구치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생 동안 참회의 생활을 했고 마지막엔 장기기증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한 기자가 사형 집행에 입회했던 선교사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참회했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 땅에서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자신의 죄를 달게 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지요.” 하느님의 도우심, 즉 은총 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죽을 때 까지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죄수의 이야기입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삶의 불만을 무고한 예수님께 퍼붓습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드라마틱한 장면에서 많은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 오직 당신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삶 안에서 주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왕직은 권력을 부리고 힘을 쓰는 세속적인 왕이 아니라 사랑의 왕, 봉사의 왕, 진리의 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누구나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어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왕입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 권력, 명예, 욕심… 이러한 것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통치자이며 인도자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왕으로서 섬긴다면, 우리는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봉사와 사랑을 평생 동안 실천해야 합니다. 다음의 기도가 우리의 마지막 소원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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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왕과 나

예전에는 지하철에서 책이나 신문을 읽는 사람, 약간은 멍하니 생각을 하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사람,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 등을 자주 보았습니다. 요즘의 지하철 풍경은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정도로 한 가지 모습입니다. 열 명 중에 여덟이나 아홉은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철 안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도 스마트폰‘삼매경’에 빠져 걷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스마트폰에 단단히 매여 사는 것이 아닐까, 자발적으로 스마트폰의노예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에 열중하듯이 성경과 신심서적, 기도에도 열중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도 가져봤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께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커야겠지요. 관심과 마음이 가는 곳에 눈이 가게 마련이니까요.

노예가 되려면 스마트폰이 아니라 주님의 ‘노예’가 되면 좋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과 마음을 집중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는 충직한 주님의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의미가 아닐까요? 누군가를 진정 왕으로 고백한다면 그분께 온 마음을 다해 충성을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자신이 섬기는 왕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압니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으로서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뭅니다.(제2독서) 최고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으면 유유자적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무관심하기 쉽지만,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도자요 목자로서 성실하게 백성을 보살폈듯이(제1독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신 끝에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입니다.(제2독서) 십자가상에서는 유다인 지도자들의 빈정거림과 군사들의 조롱을 묵묵히 참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복음)

우리의왕이신 그리스도는 세속의 권력자들처럼 완력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며 세도를 부리는 분이 아닙니다. 충만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큰 인내로 우리의 거칠음을 견뎌주시며, 한없는 자비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축일이 흔쾌히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님! 당신을 닮아 사랑과 인내, 자비로 이웃과 세상을 대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보좌주교 : 2016년 11월 20일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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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참된 희망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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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망을 찾는 불안한 인간

어느 날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살아가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태아로서 살해되기도 합니다. 갓 태어나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어떤 때는 생명이 위태롭기도 합니다. 지구라는 별에서 각종 조건에 적응하면서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랍 세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각종 군사적 폭력 때문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태어나면 잘못하면 꽃제비가 되고 맙니다. 여러 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어려서부터 참다운 인간 교육은 외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 엄청난 경쟁에 내몰리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부터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둥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감당해야 하는 커져가는 책임감, 사회적 안전장치의 미흡함은 사람들을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인간 내면의 불안함, 자연과 인간의 충돌로 말미암은 비참함, 가정 안에서부터 인간관계의 불확실함과 사회의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는 긴장들은 오늘 현대인을 참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문제는 대책 없이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수무강한 고령자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세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은 희망을 찾게 됩니다. 헛된 희망을 추구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외면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은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특히 오늘 한국의 비참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민은 어디서 근본적인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신 진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를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존재하십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을 그리워합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발휘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서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 모양을 하고 있지만, 결코 동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 인간의 특징은 바로 자유입니다. 오늘 인간이 겪는 그 모든 고통과 모순의 원인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자유를 행사해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창세 3,5 참고). 그렇게 하느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은 비참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기에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살아 계시고 영원한 생명을 일궈내심을 보여 주십니다.

3. 하느님께서는 시작한 일을 완성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시작하신 창조 사업을 완수하십니다. 특히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셨는데, 인간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창조 사업을 중간에 팽개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자비하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폭력의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승리, 완성을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인간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4. 그 완성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오늘도 하느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파스카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사 성제를 올리면서 성체성사 안에서 그 파스카를 기억하고, 오늘 죽음에서 참 생명으로 넘어가고,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감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지금 닥치는 고난과 모순을 받아들이며 희망 속에서 용기를 갖고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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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2016년 11월 20일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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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536
749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84
748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33
747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311
746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39
745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66
744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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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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