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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천국 왕의 고난과 죽음"
조회수 | 2,979
작성일 | 07.11.23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없는 12지파 부족 연맹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의 탈출을 계기로 약자와 빈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군주제도를 거부하고, 예언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판관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법과 말씀으로 직접 통치되는 신앙공동체를 희망했습니다.

이러한 희망은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독특한 왕정제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왕은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에 종속된 자로서 그 법을 따르고 실천하는 자이며 백성을 섬기는 종으로 규정됩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튼튼히 세우시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기 왕권을 높여 주신 것을 알게 되었다(2사무5,12).”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도 이스라엘 12지파 연맹의 성소(聖所)인 스켐으로 가서 임금으로 승인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백성은 이 자리에서 르하브암에게 자신들의 고역과 멍에를 풀어 주고 선정을 베풀기를 청원합니다. 원로들도 “오늘 임금님께서 저 백성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고자 하시면, 그들에게 좋은 말씀으로 대답해 주십시오. 저 백성이 언제나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1열왕12,7).”라고 충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활을 이스라엘 백성이 애타게 대망하던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일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예수님은 비유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통치와 주권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신비입니다. 전능(全能)하시어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신 신비를 우리는 압니다. 전지(全知)하시어 모든 법의 제정자이신 지혜의 하느님께서 어리석게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신비를 우리는 압니다. 전선(全善)하시어 거룩하시고 무죄하시면서도 죄인 중의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신비를 우리는 압니다. 이러한 구원의 신비에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알렐루야!

무한하시고 무량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의 이 정의로운 심판을 통과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은 저 강도가 보여 준 믿음입니다.

수원교구 2007년 11월 25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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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

오늘은 연중 전례의 주기를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오늘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모아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에 ‘온 천하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시며 결국은 당신의 왕권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복음: 루카 23,35-43: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며 서로 대립적인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인들에게 조롱과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아라”(35.37절). 그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예수가 정말로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35절), 즉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으로 달린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38절)이라는 명패도 사형에 처하게 된 이유보다는 예수님을 극단적으로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즉 사랑하고,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은총으로 구원을 베풀고, 사람들 앞에 절대 자유를 누리며,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강도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40-42절).

이것은 예수께 대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도이다. 구약의 많은 기도들이 이러한 형태이다(시편 104,8; 120,5 참조). 그러기에 그 강도 편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이미 신적인 분이시며, 그분이 맞이하는 죽음은 오직 참되고 유일한 ‘왕국’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종말론적 왕국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즉시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3절). 구원이 바로 그 순간 보장되었다. 바로 그분의 죽음의 ‘오늘’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첫 번째로 회개한 한 살인자가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하늘나라가 오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로 그 ‘선물’이다.

제2독서: 골로 1,12-20: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2독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나게 해주신”(1,13-14)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 여기서 ‘아들의 나라’는 ‘흑암의 권세’(13절) 즉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의 나라로 이해되고 있다. ‘아들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참된 ‘자유’를 얻음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는 그리스도의 찬가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만물이 그분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성부의 완전한 ‘형상’이듯이 세상만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형상’이다. 15-17절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실 뿐만 아니라, 끝이시기도 하다. 즉 그분은 만물을 존속케 하시며 모든 창조물의 마지막 목적지이신 당신께로 향하게 하신다. 즉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16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와’ 또한 그분께로 ‘돌아가야’한다. 그런데 그 피조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맡겨져 다스려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하는 도정에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절대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며 교회라는 공간을 통해 그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은,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실체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력을 뜻한다. 즉 그분의 풍부한 생명력이 교회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절대 통치권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생명의 활동을 통합 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 모두가 임금이신 그분의 ‘통치’에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진정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끔 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생활로써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 온 천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끝없이 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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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 왕

왕의 자리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봉사하는 자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파격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는 이 복음 말씀은 ‘왕은 곧 종’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의 왕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해서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어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왕의 모습이고 현대의 교회도 당신모습처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정말 ‘백성들을 위해서 왕직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반성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본당신부를 하면서 교우들에게 봉사를 받았으면 받았지 봉사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얼굴이 붉어질 일입니다. 종이 되어서 봉사하라고 십자가에까지 매달려서 모범을 보이셨는데 스승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원하는 반대로 살고 있으니 마음이 괴로울 때가 참 많습니다.

요즘 현대 교회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단 한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서 봉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서 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데 성당은 지어 놓아서 무엇합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성전을 지으시겠다고 선언 하십니다. 바로 살아 있는 성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전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만약 콘크리트 건물, 대리석 성전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다 하더라도 봉사의 의미가 사라진 성전은 허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미를 하지 못하는 성전은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복음을 선포하지 못하는 성전은 사라져야 함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는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당에 오는 많은 교우들을 감동시키고 만족시키고 기절시켜 주어야 교우들은 은총을 느끼면서 성당을 꽉 메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 서비스는 하지 않는 채, 성당을 짓는 다는 이유 하나로 교우들에게 맨날 돈이나 내라고 한다면 교우들은 성당에서 기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일반 기업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상품 잘 만들어서 고객을 만족시키면 우리 기업은 일류 기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하늘나라처럼 기가 막힌 상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교회가 그 하늘나라의 기쁨을 보여 주지 못하고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감동시켜 주지 못하고 기절시켜 주지 못한다면 하늘나라라는 기막힌 상품도 팔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신부님이 마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번 성탄절에 교우들에게 연극을 보여 주겠다며 젊은이들과 함께 연극의 배우 역을 맡아 매일 밤 늦게까지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것이 바로 섬기는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지금보다 더 내려 앉아서 종의 모습을 취하여 우리 교우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교우님들도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면 분명 선교는 저절로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 창연 (베네딕토)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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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선택이 대한민국을 만듭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죠?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의 공식 표어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보내면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면서 지냈는지 생각합니다. 나의 선택은 최선이었는지! 나의 선택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는지! 나의 선택이 나와 내 가족 공동체를 위한 선택이었는지!

이런 지도자를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지도자, 말을 하기보다는 먼저 실천하는 지도자, 모든 공로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릴 줄 아는 지도자,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친구가 되어 주는 지도자. 그런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느 병원 병실에서 한 어머니가 슬피 웁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동전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걱정의 눈물입니다. 그 옆에서 조금 큰 아이가 웁니다. 동생이 자기의 동전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흘리는 눈물은 같아도 눈물의 의미는 다를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이 아닌, 진정 자비와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런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은 너무나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노래 중에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어디 계실까 주님은 어디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은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 계실까 어디 계실까 우리 구원하실 그분 어디 계실까 아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천국은 어디 죽음 저편에 사철 푸른 나무숲 거기 있을까 가리라 죽어 그리로 가리라 고된 삶을 버리고 죽어 그리 가리라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이 노래는 김민기가 어렵고 암울한 시대에 우리들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주님은 화려한 교회의 건물 안에 계시기만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은 지금 아무 걱정 없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계시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은 지금 고난 받는 저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저 사람들, 희망이 없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저 사람들 사이에도 계셔야 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화려한 궁궐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멋진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신하를 거느리지도 않았습니다. 재산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주님은 어떤 사제나 신자를 바라는지 생각해 봅니다.

-.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사제 / 신자

-. 기도하는 사제 / 신자

-. 힘없고 약한 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 정의를 위하 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 신자

-. 검소하며, 물질에 신경을 안 쓰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 신자

-.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 신자

-. 웃어른에게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이나 행동에 예의 차릴 줄 아는 사제 / 신자

-. 신도들에게 알맞은 강론을 성실히 하는 사제 / 강론을 잘 듣는 신자

-. 고해성사나 성사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 참여하는 신자

-. 고해성사를 성심껏 주는 사제 / 성심껏 준비하는 신자

-.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 신앙에 충실한 신자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 왕의 뒤를 따라 겸손과 사랑과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우리들 또한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에 빛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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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기 한 임금님이 계십니다. 이 임금은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백성들의 아픔을 듣기 위해서 직접 백성들을 찾아왔습니다. 올 때도 위엄있게 온 것이 아니라 한낱 힘없는 아기로 오셨지요. 통치방식은 또 어떻습니까? 임금의 권위를 차리려고 하지 않고, 당신이 먼저 실천하고 희생하고, 심지어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에 매달려 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임금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그리스도 왕,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권위를 이용하여 자기의 세력을 넓히려는 그런 임금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봉사로써 백성을 다스리신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가가기 어려운 그런 거리감 있는 왕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다가오시는 그런 왕. 손을 잡기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먼저 손잡아주시고 안아주시는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신 왕. 자기한테 잘하는 이들에게만 잘해주는 그런 왕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고 소외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왕. 우리는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행복과 기쁨을 꿈꾸고 있고, 실제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워 보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은 마치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한 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큰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이 모습에 우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들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당신 나라로 불러주십니다. 이 부르심으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기억해야 할 차례입니다. 주님께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청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삶 안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왕직은 봉사직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이제는 우리가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힘겨워하는 이웃을 위해서 내가 먼저 봉사하고,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주님을 더 돋보이게 할 때, 우리들 안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향기가 뿜어져 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연중 시기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면서, 세상 마지막에 오실 우리의 왕을 모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무엇보다 기도와 희생과 봉사로써 임금님께서 오실 자리를 잘 정돈하고 깨어 지내는 모습으로 임금님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우도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형묵(요셉) 신부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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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요, 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세속의 왕(임금)은 백성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섬기는 왕(임금)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인 우리가 갖춰야 할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왕(임금)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누릴 잠시의 행복을 주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구원)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왕(임금)이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 밖에 없기”(사도 4,12)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자 왕이요,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즉 우리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신명 6,4-5 참조).

우리의 신앙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현세에서의 삶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바라며 살고자 한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왕이요, 임금이신 구세주 그리스도께 내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왕이요, 임금이시지만 스스로를 낮추시며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라는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때 왕이요,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이석재 안드레아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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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을 앞둔 미카엘 형제님은 요즘 자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갖곤 합니다. 형제님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취직을 했고 결혼을 해서 가정도 꾸렸지만, 정작 자신과 가족의 행복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하느라 자신의 삶을 허비한 것 같은 후회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식들이 출가하고, 지금은 아내와 단둘이 있지만 거의 대화도 없습니다. 그러니 집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고 기쁨도 없는 쓸쓸한 삶의 연속임을 느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가족과 함께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일만 하며 살았던가!’, ‘왜! 사랑하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던가!’ 형제님은 이런 후회와 성찰을 통해,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갖고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자기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 같습니다. 또한 학교를 졸업할 때나, 오랫동안 일하던 직장에서 퇴임할 때 등, 자신이 몸담아 살아온 곳을 떠날 때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만족보다는 후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마지막 주간의 시작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을 보내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의 시작인 대림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다해’인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올 한해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았던 모습들을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후회의 모습보다는 ‘그래도 열심히 잘 살았어!’라는 나름 만족스러운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한 강도의 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구원의 왕으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루카 23,42 참조).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참다운 왕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은 아름다운 궁궐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화려한 왕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오명 아래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속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힘없는 모습입니다(루카 23,35-39 참조). 그러나 그 초라한 왕은 죄인까지도 회개하면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사랑이 넘치시고 자비하신 겸손의 왕이었습니다(루카 23,40-43 참조). 그리고 이 왕을 우리는 바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를 통해 우리에게, 이 겸손하신 왕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통해 이 세상에 평화가 왔으며,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상속을 받게 된 것에 감사드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사 중에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 제대 위에서, 티 없는 평화의 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시어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고, 만물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어, 그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를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 바치셨다(감사송).”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특별히 초대하시는 은혜로운 ‘자비의 특별 희년’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했던 한 해였기를 기도드립니다. 다시 한 번 참다운 왕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 후회 없는 신앙인의모습으로 하느님 나라에 함께 나아가도록 노력합시다.

▮ 수원교구 이재현 요한 신부 :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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