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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봉사의 삶
조회수 | 2,865
작성일 | 07.11.23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전례력으로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과 똑 같으신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을 가진 힘있고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봉사자로서의 삶을 본받고, 우리들 또한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사한 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신학생 때 봉사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신 신부님이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봉사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기쁘게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봉사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헤아려 주는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십시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말로만 그렇지 보이는 건 전혀 봉사할 분 같지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신학교에서도 여느 신부님들과는 다르게 눈에 띄는 멋쟁이 신부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키도 크시고 얼굴도 잘 생기셨는데 옷도 좋은 옷만 입으시는 분이셨습니다. 한편으로는 멋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신부님이 저렇게 좋은 것을 입어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말로만 그렇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서 같이 산책을 하며 농담 삼아 “신부님, 옷이 너무 좋으신데 혹시 안 입으시는 것 있으시면 하나 주시지요!”라고 했더니 “입는 것 밖에 없어! 그래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데….”라고 하시며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서품을 받고 처음 본당에 부임하셨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읍내에 있는 작은 시골 본당이었는데 지대가 낮아서 비만 오면 성당 마당에 물이 고이고, 재래식 화장실에 물이 차서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 해 여름에도 장마철이 되자 화장실의 물이 넘쳐 마당으로 오물이 넘쳐흘러 악취를 풍기더랍니다. 그래서 손수 화장실을 푸고 있는데 친구들과 함께 성당 앞을 지나가는 한 자매님을 보게 되었답니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인사를 해도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고개를 돌린 채 못들은 척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읍내에서 교우들을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잘 없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의 남루한 옷차림이 창피해서 외인들에게 본당신부님이라고 이야기하기가 부끄러워 아는 척을 안 하더라는 겁니다. 그때부터 교우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작업복과 평상복, 외출복을 구분해 놓고 외출복만큼은 좋은 옷을 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동안 신부님을 오해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보고 그것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부가 화장실을 푸고 있다고 해서 창피할 일이 뭐 있습니까? 옷이 남루하다고 비웃을 일이 뭐 있습니까? 오히려 자랑할 일 아닙니까? 그런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절대로 봉사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잘 차려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만 한다면 어떻게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부끄러워한다면 결국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을 부끄러워한다면 올바른 봉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봉사는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콜로 1,12)”드리며 얼마나 봉사의 삶을 살아왔는지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이 아니라 이제는 그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봉사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새로운 한 해, 대림시기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김원현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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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유다인의 왕'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축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의 추대를 받아 그들의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정하여 주신 다윗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미래를 주님이 세우신 다윗에게 의지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도 임금님께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2사무 5, 2)라고 말하면서, 다윗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심만으로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이익도 생각하면서 다윗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었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윗의 후손 가운데 다시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울 왕이 온다고 하였을 때, 이들이 무엇을 꿈꾸었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민족들의 억압에서 해방 시켜주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 위에 군림하는 이스라엘을 만들어줄 그러한 왕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 왕은 그들이 아무런 희망을 걸 수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 시켜주고,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의 민족이 될 수 있게 해야 하는 왕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힘없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보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이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같이 십자가에 달려있던 죄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이들은 보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민족들 중의 왕으로 오신 분이였습니다. 우리의 짧은 소견으로 왕은 세상을 다 가지고 지배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처럼 당신의 피로서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골로 1, 20).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평화를 주신 분이었습니다. 바로 모든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는 왕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죄수 중에 하나는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왕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생각지도 못하는 왕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우리는 기뻐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유다인의 왕"을 참다운 왕으로 알아볼 때, 우리는 오늘 복음의 그 죄수처럼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연중이 마무리되는 오늘, 우리는 참으로 낮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의 하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는 사람답게, 우리도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시다. 아멘.

이희복 미카엘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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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왕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 입니다. 교회 달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 입니다. 교회는 한 해를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 그 모두를 주관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왕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이승의 하늘 아래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행사 안에 있으며, 죽음 이후의 우리의 영원한 생명 역시 그분의 손길 안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이승과 저승, 우리의 삶과 죽음 그 모두를 관장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며, 우리의 구원자 이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라는 이 신학적 진실은 흔히 오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배자, 심판자로서의 왕이라는 이미지는 자칫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행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교회 역사 안에서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잘못 이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속의 군주의 모습으로 곡해한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화려한 대관식의 왕이 아니라 상처받고 모욕당하며 죽어가는 십자가의 왕이십니다. 세상 끝나는 날 다시 오실 영원한 주권자로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분명 현실의 세계 안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초라한 종으로서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나라,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의로운 심판자,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시는 지배자이시지만, 이 지상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 심판받고 처형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하고 지배하는 권력자를 대표하기 보다는 심판받고 지배당하는 힘없는 이들을 대표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언뜻 보아, 세속의 권력 앞에 참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화려한 대관식의 왕이 아니라 초라한 십자가의 왕이셨다는 이 신앙적 진실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이 지상에서 예수님은 초라하고 슬픈 모습으로 계심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칭찬과 찬사가 있는 곳이 아닌 조롱과 멸시가 있는 곳, 화려한 승리가 있는 곳이 아닌 처절한 좌절과 실패가 있는 곳,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곳이 아닌 슬픔의 노래가 불리어지는 곳,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압니다. 왜 우리의 생에서 기쁨 보다는 슬픔이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는지를, 왜 승리자의 환한 모습보다는 패배자의 눈물이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내는 지를 말입니다. 허황된 기쁨보다는 진실된 슬픔이, 거짓 승리 보다는 정직한 패배가 왜 더 알싸한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오래 살아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가슴 아린 슬픔과 눈물겨운 패배가 왜 참된 희망의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지상의 권력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며 심판받는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 비참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달려계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은 그저 물질적 축복을 내려주시는 돈 많은 임금님도 아니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의 이기적 욕심을 다 채워 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임금님도 아니십니다. 제 동족에게 배반당하고 고발되어 권력자의 법정으로 끌려나와 심판받는 무기력한 죄수의 모습으로 있는 분이십니다. 잘난 승리자의 예수님이 아닌,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계신 예수님, 바로 그분을 우리는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이 시대의 십자가 현장에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화려한 승리자가 아닌 정직한 패배자인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정직한 패배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을 뜻하며, 생의 초라함과 운명의 비참함마저도 담담하고 의연하게 견뎌낸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 주변의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 대해 미안해 할 줄 아는 마음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따뜻하고 섬세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희완 신부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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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님께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실 뿐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며 그분께 충성과 효성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9년 12월 20일에 이 대축일을 제정하셨습니다. 교회의 축일들이 대개 제정 당시의 상황과 연관이 있는데, 이 대축일도 그 당시 거세게 일어난 무신론과 세속주의를 경계하고 신앙과 교회의 삶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제정된 것입니다.

근대 이후 유럽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불란서 혁명 이후 교회는 여러 면에서 타격을 입었고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주의와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사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신앙을 떠나거나 배교하고 세속주의에 빠져 방황하기도 하고 신앙적으로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교리와 세례성사를 통하여 받은 그리스도인의 직분(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상기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면서 그분께 충성과 효성을 바치며 그분의 통치하심이 온 세상에 두루 미치도록 기원하고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왕이실 뿐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십니다. 모든 악과 사기와 기만을 물리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분은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좌정하시고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영광의 왕이십니다.

왕은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입니다. 이 세상에는 왕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왕이 없는 나라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통치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통치자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임기를 마친 통치자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대왕이나 세종대왕 같은 훌륭한 왕들이 있었는가 하면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악한 통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역사의 인물이 되었지만 오늘 우리가 특별히 대축일로 지내면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영원히 통치하시며 온 세상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좋은 것만을 베푸시는, 참으로 좋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전례의 본기도에서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어둠의 권세에서 저희를 구해 내시어 정의와 사랑으로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하시니, 저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라, 저희도 형제들을 위하여 저희 삶을 내어 놓고, 하늘 나라에서 아드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가 드린 이 기도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는 시민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나라는 달라도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왕으로 모시는 영적 시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참 왕이신 그리스도님께 우리의 충성과 효성을 바치며 그분을 모르고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 왕이신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받은 왕직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왕직은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오시어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바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직분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아 이웃과 사회와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 때에 오늘의 대축일을 지내는 참 의미가 우리 모두 안에서 새롭게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안동교구 전달수 안토니오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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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때에 지도자들은 빈정거렸다.”
“그때에 군사들도 조롱하였다.”
“그때에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모독하였다.”

주님의 때가 다가오자 위기를 느낀 악의 세력은 주님을 끊임없이 비웃음거리로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결국 주님을 십자가 위에 매달았지요. 그 순간까지만 해도 마귀는 제가 이긴 줄 알았을 것입니다. 교만한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자신의 권력이 다른 존재를 ‘빈정거리고’, ‘조롱하고’, ‘모독하며’ 깎아내리는 데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느님께 받은 권력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가 못 박아 세운 저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은 더욱 찬란히, 더욱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은 남을 낮추지 않아도 본래 홀로 높으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권능은 ‘너’를 낮추고 깎아내리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존재하라고 불러내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북돋워 주시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꾸짖고, 호통도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를 깎아내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자꾸만 자신을 지상에 붙들어놓고 깎아내리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처음에 하느님께 받았던 하늘나라의 품위를 다시 회복하라는 꾸지람이셨습니다! 이것이 저 하늘의 왕좌에서 나오는 주님의 권위요 권력,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내 눈에 아무리 부족하고 못나 보이는 이웃이라도 그 사람 역시 하느님께서 부르신 고귀한 생명임을 잊지 맙시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은 나 자신 안에도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함께 깎아내리는 일입니다. 내 이웃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나의 존재 역시 하느님 대전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렸던 이 겸손한 죄수처럼 말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루카 23,40)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이웃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을 바라봅시다. 어둠의 길을 가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를 모욕하고 비웃거나 내쫓으려 들지 말고 어둠의 길에서 끄집어내주고 함께 살려고 노력합시다. 악의 세력과 훌륭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며 거들어줍시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 참된 권력은 남을 낮추는 데에 있지 않고 생명을 북돋아주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 삶. 어떤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의 마지막 때에 주님은 분명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 안동교구 박효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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