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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조회수 | 3,389
작성일 | 07.11.23
2001년 10월 14일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한 분의 수사님이 선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도명이 마리너스인 이 수사님은 한국과 엄청난 인연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1954년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직업이 화물선 선장이었는데, 1950년 12월 비행기 제트연료를 흥남부두에 내려놓기 위해 들어갔다가 중공군에 쫓긴 피난민 14000여 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힘겹게 피신한 경험을 갖고 계셨습니다. 47명 선원의 배에 물도 식량도 없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기뢰와 포격을 피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3일 간의 항해를 마쳤던 레너드 라루 선장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는 마침내 수도원에 입회하고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그 수사님은 그 때의 체험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을 극복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크리스마스날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바다 위에 떠 있는 제 배의 키를 하느님께서 잡고 계셨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트라피스트의 시몬신부님의 아주 짧은 글귀를 인용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입니까! 하느님을 추구하고 만나며 사랑하는 것, 그것은 바로 위대한 로맨스며 모험이고 성취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키를 잡고 내 삶의 바다를 항해해 주시는 그분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순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일 것입니다. 이런 사랑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정열적으로 내 삶을 모두 던져서라도 모험을 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이 주는 유혹으로 좌도가 예수님을 보고 빈정댈 때 내 깊은 영혼의 우도는 주님을 알아보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만 하면 됩니다. 이 한마디만 한다면 그분께서 이렇게 화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분을 오늘 왕으로 모신 이날, 위대한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지난 시간을 모두 내려놓고, 또한 내일의 두려움에 대한 환상도 거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왕이신 그분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합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김덕원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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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초였습니다. 그때에는 제가 성지에 있을 때였지요. 그리고 성지에 순례객이 많은 달로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순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저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편찮으세요?”

저는 아픈 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저는 누구보다도 건강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례객이 제게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상당히 안 좋아 보여요.”

이번에도 저는 자신 있게 말했지요.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요. 하지만 저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또 얼마 뒤, 어떤 분이 제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얼굴도 검어지고 굉장히 안 좋아 보입니다. 어디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혀 아픈 곳이 없었는데 괜히 어디가 아픈 것 같더군요. 그리고 실제로 며칠 뒤에 자전거를 타다가 양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른데 아팠던 곳은 없었지만, ‘아파 보인다. 아픈 것 같다.’등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로 아픈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생각해보니, 이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좌절하게 하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고, 또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즉, 크게 나눈다면 힘이 되어주는 말과 힘을 빼앗는 말로 나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어떤 말인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해서, 오늘 복음은 우리의 왕으로 다가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우리 스스로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를 반성하게끔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자.”

군사들도 조롱의 말을 던집니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까지도 모독의 말을 합니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과연 힘이 나셨을까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져야만 하는 십자가인데, 고마워하기는 커녕 조롱과 모독의 말만 건네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힘이 빠졌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힘을 빼고 있는데, 단 한 명 즉, 예수님의 우측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야 당연히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면서 예수님께 힘이 되는 말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보답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말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나의 말은 내 이웃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인지, 아니면 조롱과 모독이 섞인 힘을 빼는 말인지……. 주님께서는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힘이 되어 주는 말을 합시다.

조명연 신부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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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하모니

요즘 재미있게 보는 예능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중에서 제일 재미있게 보았던 부분이 “하모니”라는 합창을 연습해서 대회에 나가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오디션으로 뽑힌 사람들은 잘하는 사람들도 있고, 준전문가도 있고, 또 실력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보면 지휘자의 역할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소리만 내려고 하면서 불협화음을 이루지만, 점차 옆 사람의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의 음색을 들으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서로 서로 음과 음색을 맞추어 가면서 모자란 부분은 채워지고 넘치는 부분은 알아서 조절해 나가면서 자신의 소리를 전체의 소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서로 자신을 더 드러내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다른이와 서로 맞추기 위해 자신의 것을 얼마나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용기가 필요한데 과연 우리는 그러한 용기가 있을까요? 또한 내 것을 얼마나 포기하고, 내 마음에 무엇을 채울 것인지 그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렇게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모습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합창에서 지휘자의 모습입니다. 지휘자를 기준으로 소리를 맞추어 가면서 모든 이들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기준이 지휘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서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나의잘난 모습과 모자란 모습을 서로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휘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분과 눈을 맞추고 말씀을 들으면서 나를 낮추고 예수님의 눈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만의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고 그렇게 이룬 하모니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왕으로서 우리가 복종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이 되고 우리가 맞추어 가는 하느님으로 봐야 되고, 나의 삶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우리 삶의 지휘자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복종을 해야 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맞추는 기준으로서의 하느님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위해 채워주고 기도하는 모습 안에서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이홍일 신부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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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별다른 일 없는 하루였습니다. 오전에 있었던 ‘신앙의 해’ 폐막 미사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요. 그래서 어제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미뤘던 책도 읽고, 강의를 위한 글도 쓰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의 산책 외에는 계속해서 방에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썼을까요?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책을 꽤 읽었지만 글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편안해서일까요? 오히려 글이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바쁘고 정신없었을 때 글을 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글들이 간절함과 진실성이 더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들도 알아채는 것 같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중에서 많이 팔린 인기 있었던 책들은 여유 있고 한가했을 때 썼던 책이 아닌 어렵고 힘들다면서 버거워하고 있을 때 썼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고 지금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이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면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간들은 선을 이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분명히 견디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그 왕의 모습은 우리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랐습니다. 즉,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하는 왕이 아닌, 오히려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보다도 더 밑바닥까지 내려가셔서 우리의 아픔에 함께 하는 겸손한 왕, 사랑 깊은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그 모습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신명기를 보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21,23)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빈정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 것이지요.

바로 그때 양 옆에 있던 죄수의 반응이 다릅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다른 죄수는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보입니다. 이 둘은 지나가는 행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노상강도로 알려져 있지요. 똑같은 죄를 짓고 똑같은 십자가형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보였던 믿음을 통해 그 똑같은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답게 곧바로 판결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굳은 믿음을 통해 오히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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