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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왕이신 그리스도
조회수 | 3,099
작성일 | 07.11.23
교회 달력으로 한 해가 끝나는 주일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다. 왕은 최고 권력자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포악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선행보다 악행을 많이 남겼고 희망보다 억압을 더 많이 주었다. 예수님을 그런 왕으로 고백하자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하느님이 택한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를 살려보라지.’ 반대자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는다. 처음부터 그들은 예수님이 버거웠다. 그가 지닌 기적의 능력이 두려웠고 민중들의 추종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저항 없이 비참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반대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능력을 가진 이가 그런 죽음을 받아들이다니, 속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분의 침묵을 그들은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적의 자리에 함께 했던 그들인데도 결정적 순간에 스승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도피는 반대자의 비웃음보다 예수님을 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마침내 여인들 몇몇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게 된다. 왕의 죽음으로선 초라한 죽음이다. 세속적 의미의 왕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왕은 누구인가? 사람을 살리는 존재다. 왕이라고 해서 다 왕은 아닌 것이다. 자격을 갖추어야 참된 의미의 왕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다.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셨기에 왕으로 고백한다. 반대자들을 살리고 자신을 떠난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셨기에 왕으로 고백한다. 고백뿐 아니라 그분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누구를 살릴 것인가? 왕이신 주님 앞에서 묵상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축일의 가르침이다.

오늘의 사회는 갈수록 사람들의 기를 꺾고 있다. 가족 간의 애정을 단절시키고 이웃사랑을 메마르게 한다. 남을 죽여야 자신이 산다고 가르치니까 그렇다. 남은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고 하니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그분의 뜻을 따르며 살아야 은총이 주어진다. 이 어려운 시기에 주님의 은총만큼 강한 에너지가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십자가의 죄수는 이렇게 청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에 그는 어떤 느낌이었겠는가? 아무 것도 부럽지 않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으려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받은 것이다. 누구도 이런 능력을 줄 수 없다. 왕이신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

계절은 바뀌고 있다. 예수님은 지나가는 시간의 왕이기도 하다. 그런 뜻에서 한 해가 마무리되는 주일을 그리스도 왕 축일로 지내고 있다. 지난 시간 동안 은총 주신 것에 감사 드리자. 그리고 새 마음으로 다가오는 계절을 맞이하자.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얼마나 애틋한 기도인가? 성체를 모시면서 오늘은 이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낙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살리는 길이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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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묵상 길잡이
‘왕’이라는 말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즘, 귀에 거슬리는 단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을 이기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왕인가?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민주화를 부르짖는 요즘, ‘왕’이란 단어는 전제군주적인 성격이 있어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왕’이란 요즘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뽑아서 일꾼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전에 ‘왕’은 나라의 주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도, 땅도, 산천도 심지어 들짐승과 산짐승까지도 나라님의 것이었다. ‘왕’이란 바로 ‘주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왕’,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왕권을 확립하셨는가?

2. 예수님은 악(惡)과 죽음을 이기신 왕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명(罪名)은 ‘유다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력에 뜻을 둔 적이 결코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범으로 몰려 돌아가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시키는 죄와, 인간을 짓누르는 제일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신 진정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뛰어넘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하실 수 있었는가?

그분의 생애를 보자.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 성모님께서 애태우다가 겨우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 아들은 모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열두 살 때부터 예수님은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때부터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소명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시고자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셔야 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27). 수난이 코앞에 닥쳤을 때 게쎄마니 동산에서도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루가 22,42) 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그 길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기에 인간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의 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항상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그 길을 묵묵히 가신 것이다.

끝내 예수님께서는 큰 쇠못에 손발이 뚫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루가 23,35),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아라.”(루가 23,37) 하며 야유를 퍼붓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꼼짝도 못하고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이 순간은, 완전한 패배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일생 동안 따라다니던 끈질긴 유혹을 끝내 물리치고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도망갈 수 없게 됨으로써, 자신을 이기고 죄인들을 위한 숭고한 제물로 자신을 바쳐 죽음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제물이 되어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의 이기심과 아담의 불순종이 엮어낸 모든 죄업(罪業)을 말끔히 씻으셨다. 이렇게 해서 인간성과 인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골로 1,14) 하고 고백한다. 드디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이다.

3. 예수님은 내 안에서 ‘왕 노릇’을 하시는가?

나는 나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를 얼마나 이겼는가? 인간에게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자신을 얼마나 이겼는지에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게 된 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참된 해방,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에 있음을 깨닫자. 이 깨달음 없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모든 삶이 예수님 중심의 삶이 되어 예수님께서 나에게 왕 노릇 할 때, 그때 나에게 주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마산교구 유 영봉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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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왕이 된 사람

오늘은 연중 제34 주일이자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달력-전례력(典禮曆)이라고도 합니다만-에 의하면, 오늘 이 주일이 일 년 중의 마지막 주일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달력으로 일 년 중의 마지막 주일이 되는 오늘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음 주일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력은 3년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가해, 나해, 다해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올해는 다해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는 새해는 가해가 되는 셈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가 다하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려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성실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 왔는지를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왕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그분이 태어날 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분의 탄생을 알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새로운 큰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 별을 보고 동방의 세 박사가 왕을 조배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왕은 분명히 왕인데, 그 왕에게는 왕궁도 없었고, 그를 호위하는 군사도 없었습니다. 왕은 늘 백성들 가운데서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았습니다. 그 왕은 왕이면서도 전혀 왕처럼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그 왕의 주변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고아와 과부들, 나병 환자들과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대신들과 군사들이 그 왕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 버림받은 죄인들이 그 왕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들의 상처받은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한 식탁에 앉아서 음식 나누기를 즐겨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그 왕을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는 껄렁패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백성들을 그분이 왕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왕은 또 다른 왕에게 고발당하고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죄목이라는 것이 참으로 회한했습니다. 도대체가 인간답지도 않은 죄인들과 창녀들과 세리들,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 그분이 고발당한 죄목이었습니다.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사회 기강을 문란하게 한다는 것이 그 왕이 고발당한 이유였습니다.

왕은 그가 평소에 사랑하던 사람들, 죄인들과 세리들, 창녀들과 가난한 사람들, 내쫓긴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로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쌍한 왕은 그 누구도 변호해 주는 이 없는 가운데 심하게 매질과 고문을 당하고 끝내는 죽음의 산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왕은 머리에 왕관 대신에 가시관을 쓰고, 환호와 박수 갈채 대신에 온갖 욕설과 침 뱉음과 모욕을 받으면서, 깃발 대신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으로 끌려갔습니다.

왕은 평소에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한다. 사실은 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5-28).

왕은 평소에 백성들을 가르쳤던 대로 백성들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왕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힘없이 무력하게 죽어 간 그를 아무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왕과 더불어서 두 폭도도 십자가형을 받고 같이 처형되었는데, 그 폭도 중의 한 사람이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죽어 가는 왕을 왕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폭도는 피 홀리며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 왕의 머리 위에는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이런 죄목을 걸어 두었습니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 그 왕이 죽자 온 땅이 세 시간 동안 캄캄한 어둠에 잠기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짝 갈라져서 두 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 왕이 죽은 지 3일 후에 일어났습니다. 죽었다던 왕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왕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골로사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왕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버지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도들이 광명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에 참여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왕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백성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백성인 우리 죄인들을 섬기시기 때문에 왕입니다. 그분은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심으로 왕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에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왕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가장 높으신 분임에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심으로써 왕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화려한 왕궁에서 천군만마를 호령하심으로 왕권을 행사하신 분이 아니라 버림받은 죄인들과 동고 동락하심으로 왕권을 행사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총과 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함으로써 왕이 되신 분이 아니라, 죄인인 당신 백성들 위해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백성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 내심으로써 왕위에 오르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위한 종이 되심으로 왕 자리에 앉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왕좌에서 대관식을 하고 왕이 되신 분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왕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십자가로 하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어 죄인인 인간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심으로 왕이 되신 분이고,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셔서 서로 형재 자매라 부를 수 있게 하심으로 왕이 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고 또 통치자들이 있습니다. 그 통치자들은 모두 국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국민들 위에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재미와 통치하는 재미 때문에 권력자들은 온갖 추잡한 권모술수(權謀術數)로, 때로는 총과 칼로 권좌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 권력에 맛을 들이면 끝까지 그 권좌를 누리려고 온갖 더러운 작태를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온갖 죄악들이 생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세도 없다.”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왕들과 통치자들은 떨어지는 별이 되어서 허무하게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한번도 금으로 만든 왕관을 써 보신 작도 없고, 총칼로 무장한 군대를 호령해 보신 적도 없고, 화려한 왕궁에서 살아보신 적도 없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시관 쓰시고, 무참히 죽으셨던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2천 년이 지난 긴 세월 동안 왕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왕으로 살아 계실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시고, 백성들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참 왕이시고 영원한 왕이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2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을 때, 이미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이 왕이신 것처럼 우리도 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직장에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본당에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도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해서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왕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우리의 가족을 위해서, 직장의 동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과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함으로써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사회,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와 편의주의로 깊이 병들어 있는지는 새삼스럽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자기의 편함을 위한 것이 아니면 꼼짝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 받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참 평화와 기쁨이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깊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래서 더불어 기쁨과 평화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왕이 될 때, 우리 가정에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직장이 평화로울 것이며, 이 사회 이 나라가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여기 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은총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서 서로 섬김을 받기 위해서 왕이 되려 할 때, 우리의 가정에는 불화와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 위에서, 아내가 남편 위에서 그리고 부모가 자식 위에서, 자식이 부모 위에서 서로 섬김받겠다고 한다면, 그 가정에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자기만의 안락과 편함만을 찾는 이기적인 가족들, 잘나고 똑똑한 가족들만이 모인 이런 가정에 불화와 불목, 싸움이 끝날 날이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강영구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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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우리는 오늘, 한 해 동안 예수님 안에서 살아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온 우주의 ‘왕’이신 분이라고 고백한다. 특별히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었던 ‘신앙의 해’를 마무리하면서‘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이라고 고백한다.

신앙의 해 동안 우리는 “신앙의 해는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해 돌아서라는 부름”이라는 신앙의 해 기도를 바치며 주님 안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때로는 ‘나’라는 길을 걸으며 방황하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주님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깨우치게 되었다. 신앙의 정체성을 찾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하고 말씀하시며, 몸소 십자가 위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목숨을 잃으셨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신 분께서 당신을 한없이 비우고 낮춤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진 십자가를 부정하면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던 죄수처럼 행동하기보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했던 죄수처럼 행동했으면 한다. 우리가 비록 현실의 무수한 유혹에 너무도 쉽게 타협해 버리는 무디고 나약한 마음을 지녔다 할지라도,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구세주이신 주님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날 것이다.

물론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우리가 걸어왔고,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십자가를 지는 삶은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해 줄 가장 확실하고 가까운 길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한다. 그러니 언제나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갔으면 한다.

<마산교구 이철민 안토니오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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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세상의 왕은 ‘박탈’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드러냅니다. 특별히 사형제도(공개처형)는 한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박탈합니다. 그리고 사형제도는 그것을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들도 왕권을 거부하면 똑같은 운명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왕권은 사형제도로 인해 사람들에게 강요되며, 그 강요된 권한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박탈’은 세상의 왕권을 드러내는 효율적인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한은 박탈하는데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권한은 ‘선사’함으로써 주어집니다. 박탈하는 것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라면, 선사하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사할 때, 선사하는 그 선물에는 필연적으로 자기증여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쪼개지고, 찢어져야만 무엇인가가 선사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선사와 박탈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죽음에서 박탈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 박탈에서 빠져나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한 죄수만은 예수님의 죽음이 더 깊은 차원에서 선사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그 죄수는 자신의 죽음을 단순한 박탈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박탈감에 함몰되지 않고 더 큰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 죄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주님의 명패가 붙은 박탈의 자리가,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왕좌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박탈로 보이는 십자가가 사실은 자기증여의 정점이며, 그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선사된다는 사실을 알아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옆에 매달린 두 죄수와 같습니다. 세상이 외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이 박탈에서 나를 구해보라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예수님을 세상의 왕과 똑같은 왕으로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선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분의 왕좌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을 알아볼 때, 우리의 박탈은 신비롭게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으로 옮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 ‘낙원’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합니다.

▮ 마산교구 김태환 요한 에우데스 신부 :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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