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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
조회수 | 3,470
작성일 | 07.11.23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인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으로 온 세상이 세롭게 되도록 기도하는 대축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의 왕직(봉사직)에 충실하여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동참하고 협조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네가 정녕 나와 함께 오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죄수에게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임금이시며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으로 체험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체험하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이바지하는 길이 무엇인가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엄청난 계절입니다. 온통 물들어버린 대자연 앞에 “와!”하고 입을 벌리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을 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그 너무나 아름다운 장관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조용히, 고요하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창조된 자연은 계시 종교인 천주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는 장소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연은 그 분의 섭리와 사랑이신 분의 특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온 산이 그렇게 물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갑니다. 이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특성이기에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움직이고 커가는 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이바지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고요하게 아주 천천히 세상에 퍼져가고 자라납니다. 동요하거나 덤벙대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먼저 혹은 니가 먼저 할 것도 없이 새하얀 솜털처럼 부드럽게 그러나 지체함이나 거침없이 세상을 끌어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사람의 변화도 이런 모습을 닮을 때 사랑의 힘, 하느님의 원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특성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퍼져가는 사랑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움직이려 노력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합시다.  

박호준 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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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놓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조롱한 사실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를 살려 보라지!” 이것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버린 자들이 그들의 승리감과 안도감을 담아서 내어뱉는 조롱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보라”고 조롱합니다. 로마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식민지에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꼴을 당하는지 알라는 조롱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처형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기대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분을 메시아로 상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당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15)고 기록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군중은 그분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여 없애버리기로 작정하고 사형 집행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에게 그분을 고발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하는 인물입니다. 그 메시아는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강대국을 만들어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하는 왕이었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모든 고통과 위험에서 해방시켜 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에 부화뇌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초능력으로 대신 해주는 메시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그런 호칭이 당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그분을 메시아라 불렀습니다. 메시아는 그 시대에 왕이라는 단어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를 때, 그 뜻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용서하시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고 소외시키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사람 잘 살고, 잘 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 당신도 불쌍히 여김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 곧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생존을 최대 과제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음으로 사라지는 우리의 세상에,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새로운 지평을 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지평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서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이 살아 움직이는 지평이고 질서입니다.

이 지평에는 지켜야 하는 계명과 바쳐야 하는 제사가 절대적이 아닙니다. 이 지평에는 하느님이 아버지로 보입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인간 생명의 기원, 곧 아버지로 살아 계십니다. 이 질서에는 은혜로움이 살아 움직이고 은혜로움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평의 나라를 새롭게 창시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는 은혜로운 실천을 하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거나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 우리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라고 호소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 지평의 나라를 열고 창시하신 분으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한 몸을 잘 살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죽어가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고 죽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과 피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이 육과 피의 한계를 넘어서 그분을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신앙인,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열어 주신 그 하느님 나라의 지평에서 예수님 안에 읽을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도 그분이 열어 놓은 지평에서 그분이 창시한 나라의 실천을 하면서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의 이야기도 전해 줍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낙원은 유대인들에게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지평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의인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들으면서 초기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라고 묻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내 하인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18,36). 예수님으로 열리는 나라는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이 소중해서 남과 싸우고 빼앗아서 세우는 질서의 나라가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은혜로운 하느님 질서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지평에 서 하느님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서 공석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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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임금이 즉위하는 예식의 핵심은 ‘기름 부음’이었습니다. 기름 붓는 행위를 히브리 말로 ‘마샤흐’라 하고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마쉬아흐’라 합니다. ‘마쉬아흐’를 그리스 말로 음역하면 ‘메시아스’(메시아)이며 순수한 그리스 말은 ‘크리스토스’(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국의 모든 임금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스라엘의 임금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기원 전 587-538) 이후, 임금이 없는 상황에서는 대사제에게서 메시아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이들 역시 그 바람을 충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메시아, 곧 참된 임금은 미래에 나타날 인물로 인식됩니다.

교회는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 34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기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삶으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차지해야 할 하느님 나라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주시며, 당신을 통하여 그 나라가 실현됨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아픈 이들을 낫게 하시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주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어 당신의 사명, 곧 메시아 임금의 임무를 완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원동력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순종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자신들의 뜻과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고 권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자세가 바로 참된 임금, 곧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왕’이시라는 교회의 고백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음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신앙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오늘 복음에서 한 죄수가 보여주는 “회개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 왕께서는 회개하며 당신의 나라에 받아들여 주시라고 간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정영한 루도비코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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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와 섬김

지난 달 20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 시사주간지가 30여개 분야 전문가 1500명을 대상으로 ‘우리 시대 영웅’이라는 주제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11.1%(167명)로 1위에 선정되었고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9.5%), 박정희 전 대통령(9.2%), 김구 상해임시정부 주석(6.4%), 김수환 추기경(6.1%)이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임기 내내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다가 뚜렷한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패한 대통령이 어떻게 1위를 했을까요? 설문조사에서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관행상 대통령으로서 얼마든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하지 않고 제자리에 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얻기를 원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6.2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만물이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창조’(2독서)되었건만 뭇사람의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이 당신의 이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복음). 그리고 당신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심으로써(2독서) 당신의 말씀이 옳으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일평생 구원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죄수 한사람이 이렇게 섬기러 오신 왕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바로 오늘 낙원에 들어가는 행운을 누립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하여 이 왕직을 신자의 직무로 받았고, 이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직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얼마나 실천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 살면서 남을 섬기기는커녕 짓밟고 올라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예 유치원부터 시험과 기능연마를 통해 몸으로 체득합니다. 부부 사이에 서로가 이 직분을 제대로 실천했다면 낙태나 이혼, 재혼율이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감사송)입니다.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특권이나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남을 지배하는데 이용하지 말고 섬기는데 사용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낙원에 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아멘.

유영일 신부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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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랑하는 아버지의 선물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지상 삶을 마무리하신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해의 마무리를 뜻합니다. 열심히 지낸 한 해를 돌아보고 구세주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복음 속 예수님은 분명 왕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화려한 관도, 멋진 어좌도 없습니다. 주님은 땅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시고,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걸린 십자가 아래, 매달린 채로 죽음을 앞두고 계십니다.

세상 마지막 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막 태어날 아이를 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끝까지 주님이 설 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우리 왕에게 쏟아지는 백성의 소리는 저주와 비웃음이고, 주님께 바쳐진 것이라고는 가시로 엮은 관과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에 그분 곁을 지킨 사람이라고는 양편으로 달려 있는 죄수들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왕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의 본보기처럼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고백의 주인공은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했던 죄수였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뉘우친 이 죄인은 주님께 구원을 약속받습니다.

이 일로 인해 어둡기만 했던 복음의 현장은 순식간에 절망에서 구원의 자리로 변화됩니다. 모두가 죽기를 바랐던 주님과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던 죄수의 만남과 구원 사건, 이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세상을 구하려 하신 주님의 뜻이 어떤 힘에도 꺾이거나 변하지 않고 계속됨을 보여주는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중단시키려던 사람들의 결정은 어긋나고 주님은 이 강한 사랑을 부활 사건을 통해 완성하십니다.

마구간에서 빈 손으로 세상을 시작하셨던 주님, 마지막에 주님의 그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죄인의 구원은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하신 아버지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한 주간, 우리는 이 한 해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한 해의 반성보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날들로 지난 한 해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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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의 주님, 나의 왕

교회는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그 실행을 구체화시키면서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케 하고, 그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특히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하고 내 안에서 고백함으로써 전례적 의미를 더욱 깊게 합니다.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왕국은 어떤 왕국이며 예수님은 또 어떤 왕인가? 또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 36)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분의 왕국은 세속적인 왕국과는 다를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왕국, 그러면서도 별개의 것이 아닌 왕국, 그 왕국은 하느님 나라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의 고백은 그분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극적인 표현입니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그리스도의 왕국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하느님의 힘으로 이해합니다.(1코린 1, 18 참조)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나의 주님”이라고 수없이 고백하면서 한 번이라도 내 영혼의 주인으로서 나의 왕으로서 고백한 적 있는가?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하여 나의 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 있어 예수님의 왕국은 어떤 왕국인가? 그것은 신자들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 복음적 삶을 살며 그분이 내 신앙의 주인이 될 때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내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신앙공동체를 이룰 때 그것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왕국일 것입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 시작되는 한 해를 준비하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자세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내 신앙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면서 그분과의 관계를 재정립해 봅니다. 그리고 그분께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십니다.”

▮ 부산교구 심순보 스테파노 신부 :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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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된 왕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선포하는 이유는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을 창조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가 세상 만물의 임금이시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이야말로 아버지의 뜻 자체이심을, 아버지의 나라가 바로 예수님의 나라임을 고백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말과 행적으로 온전히 드러내시기에 세상 만물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창조 때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만물의 임금이신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조롱당하는 모습을 전해 줍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당신 백성에게 기꺼이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아주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수님의 왕권, 예수님의 통치는 무엇인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만물의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만물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단절된 세상이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께서 직접 십자가상 죽음을 통해 그들의 죄를 대신 기워 갚으심으로써 온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고, 세상 창조 때부터 진행되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임금이신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는 장소, 달리 이야기하면 하느님의 나라이며, 거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자 만군의 임금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왕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 모두를 위해 철저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우리는 십자가에 기꺼이 매달리신 예수님이야말로 만군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토록 높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나도 그분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과 임금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는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하느님, 재림 예수, 보혜사, 곧 성령이라고 자칭하며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임금처럼 살아가기까지 합니다. 자기 목숨마저 내어놓으며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자 하신 예수님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가르친다면 조금은 받아들여 볼 만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 임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임금이심을 고백합시다. 그분 덕택에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보게 되었고, 세상이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우리가 기억하고 다짐해야 할 내용입니다.

▮ 부산교구 염청호 신부 : 2016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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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   [수도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8] 3486
782   [서울] 진정한 왕직은 봉사직  [5] 2974
781   [인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입니다.  [3] 3400
780   [수원] "천국 왕의 고난과 죽음"  [6] 2980
779   [춘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3] 3054
778   [대구] 왕이신 예수님과 부활  [2] 2890
777   [마산] 왕이신 그리스도  [4] 3073
776   [안동] 봉사의 삶  [4] 2865
  [부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의 의미  [6] 3470
774   [광주] 예수, 왕중의 왕  3123
773   [전주] 예수님은 왕이신가?  126
772   [대전] 우리의 왕은 이렇다.  [3] 3112
771   [청주] 감사의 생활  [1] 127
770   [원주]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3] 2899
769   [의정부] 감동을 주시는 왕  [1] 118
768   [군종] 왕 - 섬기는 사람  [1] 104
767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4] 2682
766   [수원] 정해진 시간과 일들 안에서  [4] 2544
765   [대구] “희망의 징조"  [3] 2062
764   [의정부] “예수님 한 분만 이상하다”  [3] 709
763   [인천]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5] 2578
762   [수도회] 보라, 내가 곧 간다. ...(묵시 22,12)  [10] 2954
761   [부산]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의 현재를 삽니다  [4] 2803
760   [마산] 교회의 생명력은 평신도에게 있다.  [3] 2535
759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  [3] 2362
758   [안동]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  [1] 1222
757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188
756   [춘천] 신념  [3] 2370
755   [원주] 재난의 시작  95
754   [대전] 착한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1] 2684
753   [전주] 종말 전의 재난  [2] 104
752   [청주]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1] 115
751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2154
750   [수도회]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5] 1547
749   [수원]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삶  [2] 2397
748   [서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 2342
747   [마산] 영세한 미신자(未信者)가 많다.  [1] 2316
746   [대구] 부활의 삶, 지금 여기서 시작되고 있다.  554
745   [인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4] 2874
744   [부산] 알 수 없는, 그래도 좋은 하느님 나라  [2] 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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