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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
조회수 | 3,476
작성일 | 07.11.23
언젠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 미사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한 분이신가’ 하는 강론을 듣고 있는데, 신부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한 어린이가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 아닌 것 같다”라며 불쑥 끼어들어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겸손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조차도 ‘왕’이라고 하면 힘 있는 사람, 겸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도무지 ‘왕’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번쩍이는 왕관 대신 고통의 가시관을 쓰신 분,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왕의 지팡이 대신 초라한 나무 십자가를 지신 분, 화려한 용포 대신 알몸으로 수치와 모욕을 참아 받으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당신을 조롱하여 써 붙인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을 뿐입니다.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인 오늘, 그리스도교 신자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하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하느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왕국임을 선포합니다. 가난한 이의 이웃이 되어 병고를 덜어 주시고 용서와 자비로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하느님의 자녀인가를 일깨워 주신 분,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도 부족하여 자신을 향한 시기와 질투의 음모까지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끌어안으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야훼 하느님만이 우주와 역사의 의로운 왕으로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파라다이스, 낙원처럼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理想鄕)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왕으로서의 품위와 권능을 갖추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통치, 왕정을 가리키는 동적인 개념입니다.

신약성서는 나자렛 예수를 ‘다윗의 후예’로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면서 하느님의 왕정(마르 1,14-15)이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펼쳐졌다고 증언합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 편에서 당신의 지고한 사랑으로 처음부터 마련하여 베푸시는 것이니, 인간 가까이 와 있으며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42) 하고 간청할 수 있었던 죄수처럼, 회개와 신앙으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고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씨튼 까리따스 최혜영 엘리사벳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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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왕, 순명의 왕

「사해 부근에서」(엔도 슈사크 저, 성바오로 출판사)란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성서공부를 하고 있는 옛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예수님 주요 활동반경이었던 갈릴래아와 사해 부근 지방을 여행하면서 예수님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삶을 깊이있게 재조명합니다.

저자는 기적과 치유로 환영받는 초능력의 예수님보다는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충실한 봉사를 실천하시는 사랑과 연민, 희생과 자비의 예수님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합니다. '마구간 탄생'의 그 겸손과 소박함이 예수님 일생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해결사의 면모를 지닌 메시아보다는 겸손하게 봉사하고 순명하는 메시아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고열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 앉아서 물수건을 올려주던 사랑의 예수님,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와 함께 울어주던 연민의 예수님을 부각시킵니다.

초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갖춘 현실적 메시아를 고대하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실망과 조롱의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예수님은 단지 고통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합니다.

저 역시 너무나 이기적이며 편협된 메시아관을 지니고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메시아를 제 현실적 기대나 사리사욕만을 채워주시는 작은 메시아로 축소시켜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만의 현실적 성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메시아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자녀만을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시켜 주고, 내 고질병만을 치유시켜 주고, 내 사업만을 번창시켜 주는 작은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셔야 하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책 말미에 이런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쫓겨다니던 예수님께서 한없이 지치고 슬픈 얼굴로 몇명 남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해 울어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 나 자신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들이 다윗 성전보다 과월절 제사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정치가가 아님을 명백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앉히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한가락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귓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선생님,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선생님께서 나서실 때입니다. 제가 힘이 돼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이 왕이 되시는 날 저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예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축소시키고 격하시켰습니다.

오늘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사람들에게 조롱 받으시는 예수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축복과 안녕이 보장된 세속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어디가나 백성들에게서 갈채받는 왕이 아니셨습니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최고 인물이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쓰디쓴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야 했던 인내의 왕이셨습니다. 냄새나는 죄인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 처참했던 형극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으셨던 고통의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해 묵묵히 죽어 가신 순명의 왕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소원성취입니까? 건강입니까? 혹 끝없는 부귀영화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 십자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신앙, 그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는 역설의 신비를 사는 신앙,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입니다.

"가장 훌륭한 묵상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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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35ㄴ-4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나무들이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나무에게 말하였으나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하며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임금이 되어줄 것을 청하자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판관 9,8-­15 참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또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판관기의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후보자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들겠습니다.’ 하며 여러 가지 공약을 앞세우고, 자신이 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국민을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지도자들은 ‘빈정’거리고, 군인들은 ‘조롱’하고, 죄수는 ‘모독’하는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침묵만 하십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는―구약에서 예언자·사제·왕의 즉위식 때 기름을 부어 성별하였다―다윗 왕과 같이 정치·경제·군사·종교적으로 영향력 있는 왕이여야 했습니다.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시는’(이사 9,3) 사람을 기대했는데,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분명 거짓 메시아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남은 구했으면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메시아일 수 없다면 ‘남을 구하면서 자신도 구하는 사람’이 메시아란 논리도 이상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구할 필요가 없는 생명 그 자체여야 메시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기에 애써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고 ‘남은 구하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않는’ 살신성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조롱의 표시로 ‘이자는 유다인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이 되셨습니다.

본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은 ‘하느님’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시고 먹여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어떤 아쉬움도 없게 해주시는 피난처요 산성이요 구원자요 방패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무엘에게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1사무 8,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언짢아진 사무엘에게 주님은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통치받기를 선택하면서 임금을 세울 때 감수해야 하는 온갖 것에 대해서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1사무 8,19)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첫 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왕정제도를 허락하셨지만 왕과 백성은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왕의 임무는 하느님께서 하셨듯이 자기 백성을 물질적·영적으로 잘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고 세 번이나 당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이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참된 임금, 메시아는 겸손하여 평화를 이루시고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고 예언자들이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가?”(이사 53,6ㄴ-8ㄱ)

예수님은 당신 백성들을 먹여주고 치유해 주고 발을 씻어주면서까지 그들을 섬겼으나 배반당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바보같이 착한 왕, 그의 왕관은 가시관이요, 반지는 못이요, 옷은 벌거벗김이고, 침상은 십자가였습니다. 그야말로 ‘다른 이들은 구하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않는 왕’,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말씀을 끝까지 실천하며 두 죄인 사이에서 죽어간 왕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들은 죄수는 꼴찌였는데 첫째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얻었습니다. 이 왕은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생명의 왕이면서도 우리의 음식이 된 사랑의 왕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지상 목표였습니다.

경제성장이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고, 개발과 편리한 삶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며, 무한경쟁이 아니라 각자 받은 선물을 꽃피우게 함으로써 서로를 즐기고, 생명을 조작하는 행위를 절대 묵인하지 않으며, 평화를 위한 구실로 전쟁을 하는 일이 없으며, 특별히 작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소리에 민감하고, 힘의 논리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으며, 언행이 일치하는 정의롭고 당당한 왕. 이런 왕을 섬기는 이는 진정 복된 사람입니다. 시편은 이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듣거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이라. 네 겨레와 아비 집을 잊어버리라. 이에 임금이 네 미모에 사로잡히시리라.”(44,11-­12ㄱ: 최민순 역) 세상의 온갖 것을 뒤로하고 주님께 몰두하는 그것이 미모요, 임금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미모에 사로잡히십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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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23장 35ㄴ-43절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가시관의 왕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두 죄수 중의 한 사람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의 입을 통해 구원의 소식을 듣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참회하는 죄수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조건없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우리는 놀랍고 신기한 기적사화 때문에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빵과 물고기를 생산해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풍랑을 잠재우는 신통력을 가졌다고 해서 예수를 왕으로 또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이고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주기 위한 삶을 사셨고 몸소 그 가치와 하나가 되었던 참된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의 구원자이자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덧없는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는 예수님 옆 두 죄수의 삶 사이를 방황하지 않나 싶습니다.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생활과 참회를 반복하는 우리의 십자가는 아마도 두 죄수 사이의 한 지점에 있을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의 죄짓는 생활 한가운데에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진리와 정의의 왕, 사랑과 평화의 왕, 봉사와 희생의 왕, 섬김과 겸손의 왕, 봉사와 희생의 왕으로 화려한 금관 대신 가시관을 쓰신 그분을 우리 삶의 참된 왕으로 고백합시다.

예수 고난회 서 현승 신부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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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칭찬이 주는 치유

나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다. 하느님께 감사, 아버지께 감사, 어머니에게 감사,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하며 산다. 그 감사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죄인이었기에 그렇게 감사를 해야 한다. 용서를 해줄 사람보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많기에 감사해야한다. 사실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를 해주는 것 보다 쉬운지 모른다. 물론 용서해 줄 사람이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참 어렵겠지만 말이다. 죄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더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칭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인인 시절엔 내 자신이 어둠 속에 있었기에 뭘 어떻게 할 줄 몰랐다. 내가 어둡고 두려운데 어떻게 칭찬을 할 수 있나?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장가를 안 간 것은 참 다행이었다. 아니 하느님의 안배였으리라. 만에 하나 칭찬할 줄 모르는 내가 가장이었다면, 말 그대로 오 마이 갓이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화하니까. 아니 그분께서 변화시키시니까.

감사와 칭찬은 목이 다 달토록 해도 좋은 것이다. 일주일 한 달 아니 일 년 백년을 해도 좋은 것이 감사와 칭찬이다. 칭찬을 못 먹고 산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어둡다. 그리고 왜 내가 어두운가를 느낄 땐 이미 가슴 속이 까맣게 그을려 있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받으면, 그 검은 잿더미 속에서 싹이 나온다. 재는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래 그 싹이란 연약하다. 그래도 순수하기에 강하다. 훅 불면 날아가고, 톡 치면 죽어 없어질 것 같지만 사랑을 먹고 칭찬을 듣는 연초록의 싹은 결코 어리지 않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걸 알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남자만 보면 경끼를 하는 여자들을 만난다. 폭행을 당했거나, 아빠나 오빠 아니면 가까운 남자들로부터 사랑과 칭찬 대신 학대나 외면에 상처를 받아서일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엔 쉽게 상처를 입는다. 물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남성들의 무식, 무지에서 오는 것들이다. ‘돈 벌어다 줬으면 됐지, 뭔 잔소리가 그리 많아........ 난 뭐 어디서 그냥 이 돈을 가져오는지 알아?’ 물론 서로가 화가 나서 하는 대화이다. 서로 따뜻하게 대해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 같은 이불 속에 한 솥에 밥을 지어먹어도 그걸 모른다. 그런데 아픔이 찾아오고, ‘아! 저 사람이, 아! 우리 아빠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건장한 그 체구에 뿜어 나오는 그 호랑이 울음보다 더 크던 호탕은 어디를 갔는가 하는 순간, 하느님 아버지 한다.’

그러나 이때는 많이 늦었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부터라도 사랑한다 하고 칭찬을 많이 하면 되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꼭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 싸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 싶어 준 것이 아니기에 괜찮다. 무뚝뚝하고 표현 못한 남성의 둔함 땜일 것이다. 그냥 한 마디 하라. ‘고생했습니다. 아니오. 미안했소. 속으론 늘 사랑했는데, 그걸 표현 못하고, 그냥 투정을 먼저 했구료.’

그래 그런지는 몰라도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 불러 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떼를 불러 모은다.” 한 방울의 꿀이 벌을 불러 모으는 것은 그 안에 향기가 있기 때문이고, 그 향기는 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을 기쁘고 생기 차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그 꿀의 향기와 달콤함은 사람에 있어 사랑이고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교회에 왜 사람들이 모이는가? 거기엔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빵으로의 양식이 있는가 하면 영적양식이 동시에 있기에 꿀에 벌과 나비가 모이듯 하느님의 교회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 속에 사랑과 생명이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은 칭찬으로 우릴 위로하고 계시기에 사람들은 교회와 성서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위로와 사랑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다 치유 받기에 이렇게 이렇게 모여드는 것이다.

그럼으로 꿀이 벌 나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듯이, 우리에겐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과 칭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상처받은 영혼이라도 그분의 위로와 사랑 앞에 오면 다 녹는다. 상처 받은 영혼들이여 주저하지 말고 그냥 그분께로 오라. 그럼 그 안에 따스함이 스며들 것이고 그로 인해 다 얻어진다. 그리고 치유 받은 사람들이여, 이젠 더 이상 인색하지 마라. 그냥 끌어 앉아주라. 그리고 칭찬하라.

예수회 이인주 신부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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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낙원에 들어가리라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왕이시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왕으로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그것을 미리 경축하는 날입니다.

또한 우리도 세례성사로 그분의 왕직에 참여한다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권력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섬긴다는 의미, 바로 봉사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듣는 복음 말씀은 그리스도가 어떤 왕이신 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한마디 변명도 없이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찬연히 빛나는 모습으로 오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 달려 있던 다른 죄수 하나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청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때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정녕 낙원이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때만 왕이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왕으로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는 왕으로서 죽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제게 성서의 전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매년 피정 중에 이 대목을 묵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오늘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씀은 진정 제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이 대목이 그처럼 마음에 와 닿는 까닭은 저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 죄수처럼 죄 많은 사람인데 위로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죄수가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단 한마디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들어가게 된다.’고 대답하시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그분은 온전히 용서해 주십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에 [성서 묵상을 통한 십자가의 길] 이라는 책을 쓰면서 두 개의 다른 묵상을 실었는데 이 성서 대목에 해당하는 제 11처의 묵상을 첫 번째 묵상에서는 예수님의 오른 쪽에 있던 이 죄수에 초점을 맞추었고 두 번째 묵상에서는 예수님의 왼쪽에 달려있던 불쌍한 죄수에 초점을 맞추어서 썼습니다.

우선 첫 번째 묵상입니다.

“우리가 아는 가장 먼저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산적인 디스마스이다. 그는 바로 그날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것을 약속 받은 사람이었으니까.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다. 문제는 언제가 마지막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오늘도 절실하다.

전설에 의하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해가시는 도중 산적을 만난다. 그들은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한국판 홍길동들이었다. 산적 두목의 아들 디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내 주며 말한다. ‘축복 받은 아기야, 언젠가 나에게 자비가 필요할 때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어라.

예수를 구해 주었던 산적 디스마스는 골고타 언덕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 비록 산적이라 하더라도 디스마스는 늘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온다. 그러나 일상을 뛰어넘는 마지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늘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묵상입니다.

“예수님의 왼쪽에 매달려 있던 죄수를 생각해보자. 그는 같은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남을 저주하고 모욕하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의 소유자인 그. 그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단 한번도 따뜻한 사랑과 신뢰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타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보다는 증오심과 악으로 가득한 불행한 사람이었다. (중략)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십자가에 달린 당신을 보고 함께 달린 죄수조차도 조롱을 보내고 있습니다. 불행한 영혼을 지닌 그 죄수를 당신은 하실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어깨를 감싸 안아 주셨을 것입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과 마음을 크신 사랑으로 감싸주셨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누군가에게 조롱 받을 때 분노하지 않고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의 돌같이 굳어버린 마음속에 소외로부터 오는 고독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진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를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지음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정말 사랑의 장이 되고 있습니까? 참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삽니까?
늘 그렇지만은 못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좌도처럼 정말 돌처럼 마음이 굳어져 있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조금씩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있었다면, 참으로 지금이 때입니다. 회심의 때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선다면 지금이 바로 은총의 때입니다.

예수회 류해욱 신부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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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의 모상이며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 로 태어나게 하소서.

독서

십자가 아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자유의지로 두 가지 길,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태도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루카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옆에 나란히 못 박혀 있던 두 죄수의 인생의 마지막 선택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죄수’ 가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들입니다. 먼저 예수님 옆에 매달린 죄수 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23, 39) 라고 조롱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 (2절) “유다인들의 임금” (3절, 38절) 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는 것을 바라보고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군인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라.” (35절, 37절) 고 조롱 합니다. 그러나 이 죄수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라고 모독합니다. (39절)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죄수는 ‘사람의 아들’ 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지금이라도 구름을 타고 기적처럼 등장하여 자신을 ‘고통’ 에서 구해 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21, 27 – 28 참조)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시며 오직 하느님에게서 구원이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은 자기 묵숨을 잃음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하느님의 논리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9, 24) 예수님은 힘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로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다른 범죄자는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기억해 달라.’ 고 요청합니다. 왜 이 사람은 다른 죄수처럼 행동하지 않을까요 ? 핵심은 그가 다른 죄수처럼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본 것’ 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기’ 를 선택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태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예수님이 칭찬한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와 같습니다. (루카 10, 38 – 42 참조)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영혼을 방해하는 온갖 외적인 소란을 차단해 버립니다. 그 철저한 집중 때문에 그는 자신의 손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절대적인 고통의 순간에도 바로 옆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23, 33 – 34) 라는 기도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듣는 순간, 갑작스럽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존재 전체를 흔들어 놓아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 라고 다른 죄수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40절) 십자가 옆에 있는 순간은 그에게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순간입니다. 성경과 유다이즘에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야훼 앞에서 인간이 갖는 진정한 종교적인 자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진정한 지식의 뿌리이자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갈라놓는 기준선이기도 합니다. (잠언 1, 7) 이 죄수는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찬란한 사랑의 계시를 보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이 지상의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제1독서)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의로움과 사랑의 왕국임을 알아봅니다. (미사감사송)

예수님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요청에 낙원에 ‘나와 함께 갈 것이다.’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를 약속하십니다. 낙원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기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누리는 친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필리 1, 23) 을 의미합니다. ‘낙원’ 이라는 말은 또한 창세기에서 첫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누리던 복된 장소입니다. 이제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당신에 대한 믿음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 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부활한 그리스도와 누리는 친교 안에서, 아담으로 인해 상실된 그 하느님 체험을 다시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성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유일한 말씀 (43절)은 본문의 주인공이 두 명의 죄수가 아니라 ‘오늘’, 십자가 앞에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 을 갖는 사람들을 낙원으로 데려가시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합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신” (콜로 1, 20) 하느님의 아들, 만물의 왕이십니다.

기도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 42)

임숙희 수녀(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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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35ㄴ-43)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행운아, 우도>

우리의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은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좀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200주년 기념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정녕, 진실로, 이런 표현은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99.9% 확실시 될 때, 거의 확정적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도에게 확실한 천국행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의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마땅하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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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한 해를 떠나보내며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다시 묻고 배우려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쁘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사셨던 사랑의 길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가장 소중한 삶의 여정입니다.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진실한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십자가를 탓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내로써 성숙해지는 생명임을 예수님의 삶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삶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미움과 절망까지 사랑으로 씻어 주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고통과 절망이 깊을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매순간 삶의 절실한 희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한 해를 주님께 봉헌하며‘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의 왕이신 그리스도’라 불러 봅니다.

희망은 언제나 새로운 오늘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마지막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여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성화되고 정화되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을 생명에 담고 살아가는 은총의 '성서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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