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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병원에서 생긴 일
조회수 | 1,835
작성일 | 10.01.22
1.간호사 들이 울고 있다!

병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 병동에서 있어야 할 간호사들이 보이지를 않았다. ‘어디를 갔나?’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눈 주위는 빨갛게 돼서 나타난다.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묻자, ‘정들었던 분인데, 임종을 하셔서 마지막 처치를 하고 있다.’며 단체로 눈물을 떨군다. 더 이상 말시켰다간 마지막 처치도 못할 것 같아 ‘힘들 냅시다’ 하고는 도망치듯 돌아 나왔다.    

2. 도중하차 한 거네!

점심시간을 놓쳐 느지막하게 짬뽕 한 그릇 시켜 먹고 있는데,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신부님 한분이 응급실로 오셨단다. 늘 있는 일이려니 하고, 일단 먹고 가자 했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예사롭지 않은, 교구청 전화번호인 듯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아차’ 싶어 뛰어 내려갔더니, 의식이 혼미하고 인공호흡 중이셨다. 확인해 보니 폐부종이라고 한다. ‘확률은요?’‘열두시간이 고비인데, 아마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이틀 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신부님이 웃으면서 말씀을 하신다. ‘그럼, 내가 도중하차 한 거네.’      

3. 안녕하십니까!

봉사자 한 분이 밝고 건강하게 인사를 하신다. 같은 자리에서 자주 뵙는 분이다. 아마도 레지오 단원인 듯싶다. 응급실이라 험한 일이 많은데, 늘 밝은 모습으로 불편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신다. ‘무슨 일 하는 형제님입니까?’하고 같이 있던 직원에게 물으니 ‘개인사업 하시는 분이신데, 전에 한번 환자로 응급실에 왔던 분’이라고 귀뜸 해 준다.  

병원에서는 많은 삶과 죽음의 교차를 보게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우리가 결국 돌아갈 곳은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결국 ‘하느님 한 분’이시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느 철학자의 표현처럼 ‘인생이란 야간열차에서 내 차례가 되어 하차하게 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가장 친한 친구도 우리 손을 잡고 같이 가 주지는 못할 것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창조질서’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신 예수님”(루카 4,14)께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선포하고 계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고집부리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창조질서에 순응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고 잘 사는 신앙인의 전형이다. 우리자신의 의견과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 성령으로 채울 때, 비로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나눔과 봉사의 원천이 되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 박문서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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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사랑에 새로운 영적 눈 떠야"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의 서문과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공생활 시작의 첫 연설을 듣습니다.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 이름입니다. 테오필로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는 일정한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도들의 복음 선포, 그리고 구두전승에서 기록단계라는 3가지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이 기록된 사이에는 30~60년이라는 긴 시차가 존재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직접 남기신 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체험한 일들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기록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할 만한 객관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놀라운 일들을 단순히 역사적 검증으로만 찾으려 애쓴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안에서 검증되고 비춰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역사 자체를 창조하고 창조된 역사 안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데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찾으려 한다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믿음의 영적인 성장을 통해 새로운 눈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일어난 일이 이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바로 이사야 예언자 말씀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용된 이사야서 61장 1-2절과는 다른 내용이 더 첨가돼 있습니다. 그것은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눈먼 이들이 다시 본다는 의미는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하느님과 인간과 관계를 고립시키는 눈먼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은 아닌지 묵상해야 합니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거기에 눈먼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입맛과 감성에 따라 설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다양성을 인정 못하고, 오히려 생각이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창조하시는 바로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로 되어 있듯이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한 성령으로 태어나 그리스도의 같은 몸을 이루는 지체들인 것입니다(1코린 12,12-14). 우리는 다양한 지체를 구성하지만 주님 안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 생각, 습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각 지체들이 서로 분열되지 않고 동등하게 돌보게 하십니다.
 
그 방법은 단순합니다. 주님은 가장 모자란 지체를 더 돌보시고 더 큰 영예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게 하신 것입니다(1코린 12,24-25).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에 영적인 새로운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현저히 달라진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랑과 믿음을 갖고 옳은 방향을 바라보면, 의외로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낮도 필요하지만 밤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밤은 일하지 않기에 비생산적인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낮에 일할 수 있는 동력을 저축하는 때라는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눈먼 여정을 걸어왔다고 느낀다면, 이제 눈멀었던 인생의 밤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던 때라고 생각하고, 모자란 지체를 더 크게 돌보시고 새롭게 눈을 뜨도록 이끄시는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홍승모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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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죽을 파는 집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맛도 가격도 비슷했지만, 이상한 것은 두 가게의 매출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는 것이었지요. 매출이 적은 가게의 사장님께서는 종업원이 고객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화를 나누는지 양 집을 몰래 들려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죽을 내오며 손님에게 묻는 말뿐이었습니다. 즉, 자기네 집 가게의 종업원은 “계란을 넣을까요? 말까요?”라고 말하는 반면, 잘 되는 집 가게의 종업원은 “신선한 계란을 하나 넣을까요? 두 개 넣을까요?”라고 말하는 차이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이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더라는 것이지요. 이 말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떠한 말을 그리고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긍정적인 말,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부메랑처럼 다시 나에게 되돌아와서 내게 큰 힘을 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렸을 때의 이런 체험이 기억납니다.

체육시간에 ‘제자리 멀리 뛰기’ 시험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반에서 제일 멀리 뛴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칭찬을 해주셨고, 저는 무척 기분이 좋았지요. 하지만 며칠 뒤였습니다.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어떤 물웅덩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그 물웅덩이를 폴짝 뛰어 넘어갔지요. 저 역시 폴짝 뛰어 넘으려는데,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며 온 힘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결국 친구들이 쉽게 뛰어 넘은 그 물웅덩이를 건너지 못하고 그만 퐁당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반에서 제자리 멀리 뛰기를 제일 잘한다고 칭찬받은 제가 말입니다.

부정적인 말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말과 생각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전혀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고통과 시련으로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면서 긍정적인 희망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을 맞이해서 희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이티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인해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고, 지금도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생존자들은 신이 없다고, 신이 우리를 버렸다면서 절망에 빠져있답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눈앞의 상황만 보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바로 코 앞 그것도 흐릿한 창문으로만 겨우 볼 때가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전체 구도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즉, 그분은 어느 길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지, 어떤 장애물이 나타날지 훤히 꿰뚫어 보십니다. 실제로 지금 당장은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얼마 뒤에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렇게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장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을 내 마음 안에 간직하며,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긍정적이고 힘이 되어주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완성되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조명연 신부
  |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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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져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늘 이기는 삶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늘 이겨야 하고 1등을 해야 하며, 다른 누군가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기고 1등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해야 하니까’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다른 이유를 붙이자면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니까’가 전부입니다.

복음은 항상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라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꼭 1등을 하고 이기며, 누군가를 앞서가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복하게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포동 성당에서 참으로 재미있는 척사대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척사대회의 꽃은 바로 ‘윷놀이’겠지요. 포동에서는 이번 대회의 게임 규칙을 조금 바꿨습니다. 게임 내의 규칙은 변함이 없으되 일등을 정하는 방법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즉 지는 윷놀이를 하는 것이지요. 반별 대항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윷놀이였습니다. 다들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늘 이기기 위한 윷놀이만 했었는데 1등을 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이겨서는 안 되고 무조건 져야만 하니까요. 결국,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반이 우승하고 단 한 번 이긴 반은 2등을, 두 번 이긴 반이 3등을 하게 되었고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반은 꼴등이 되었습니다.

져야 이기는 게임인데 게임을 하다 보면 서로 이기려고 말판을 쓰게 됩니다. 이기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이기기 위해 경기를 하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면서 ‘아차’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치며 한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게임이 끝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긴 반은 이겨서 떨어졌다고 한탄하고, 진 반은 져서 이겼다고 환호하는 조금은 낯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게임이 또 있을까요? 이겼다고 슬퍼하고 졌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어디에 가서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모두 즐거웠다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진 반은 져서 즐거웠고 이긴 반은 이겨서 기뻤습니다. 모두가 즐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한 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즐겁게 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지고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십시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귓가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문용길 아론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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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식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식사 때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볍게 한 끼 먹을 생각으로 들어간 것이기에 손님이 없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지요. 그런데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젊은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손님인 제가 들어온 것을 몰랐는지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서 “주문 좀 받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를 잠시 쳐다본 뒤에 “잠깐만요.”라고 말하고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주문서를 들고서 왔습니다.

“식사 때인데도 손님이 없네요.”라고 제가 말하자, “글쎄 말입니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스마트폰으로 오락이나 하고 있다니까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게임 하느라 손님이 들어온 것도 몰랐고, 손님이 불러도 잠깐 기다리라면서 게임에 집중했던 것이지요. 이 사장님의 말처럼 과연 손님이 없어서 스마트폰으로 오락을 하는 것일까요? 거꾸로 스마트폰으로 오락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어렸을 때 잠시 야구를 배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코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에 집중해라. 공에서 눈을 떼지 마라.”

그래야 수비할 때 공을 잘 잡을 수 있으며, 공격할 때에는 공을 잘 칠 수가 있습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삶 안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목표를 보지 않고서도 도달하겠다는 것은 욕심이며 착각인 것입니다. 공이 오는 것을 전혀 보지 않고서 나중에 보겠다고 말한다면 웃을 수밖에 없지요.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손님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 역시 맞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이 목표를 늘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은 단순히 먼 훗날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선포하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읽으십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전에 들었을 때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삶이 아니라, 나중에 죽어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는 것으로, 그 희년은 지금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것들 역시 주님의 뜻에 맞춰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 은퇴하고 또 힘이 없을 때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목표에 눈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고 생각할 때,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사랑의 행위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1월 24일
  |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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