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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나의 신원을 찾아서...
조회수 | 1,616
작성일 | 10.01.23
베들레헴에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나셔서 나자렛에서 자라난 예수는 나름대로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는 자신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근 30이 다 되어서 그는 이 답을 찾아 유대광야에서 40일간 단식피정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 그 리고 자신있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제자단을 형성하면서 기존의 랍비들처럼 스승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여전히 불분명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명쾌한 확신이 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던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 처럼 늘 하던대로 나자렛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서 랍비의 한 사람으로 말씀을 낭독하고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이 자리에서 명오가 열리게 되었다.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나를 불러주셨고 또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이제는 확실해졌다. 확실히 자신의 신원을 안 이상이제는 무슨 고난이 닥친다 하더라도 마치 운명인양 그 신원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

우리 각자도 나름대로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해 왔다. 그 결과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고 크리스챤이 되었고 혹자는 수도자가 되고 성직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름대로 하느님께서 이렇게 살아라라고 하는가 부다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면서도 때론 심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신앙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믿었던 신자들이나 수도자 성직자에게서 실망하면서 교회자체에 대한 불신감이나 나의 사도직이나 영적생활 전반에 대해 자신감이 없게 되기도 한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수도생활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미사드리는 기계가 되어버리는 사제생활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하기도 한다. 또 그러면서도 다시 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한다.

자, 우리에게도 확실한 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나는 도데체 누구이며 어떻게 살도록 불림을 받았단 말인가?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아야 한다. 그 래야만 나도 예수처럼 회의나 의구심 없이 나의 길을 굳세게 굳세게 걸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만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답은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늘 하시던 대로>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말씀을 읽고 선포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우리에게도 다른 묘수가 없다. 우리가 하고 있는 대로 <일상에 충실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 일상 가운데서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의 신원을 명확하게 알려주실 날이 있을 것이라 희망하면서 하루하루 충실히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

바로 일상이 <득도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왕도는 없다. 원래부터 없었다. 오늘 하루의 삶에 충실하고 만족하자. 행복해 하자. 그분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길을 가르쳐주시길 기도하자. 아멘. 알렐루야!

▥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201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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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답을 얻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살아온 우리 시간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것은 분명 하느님 말씀입니다. 겉모습에만 치중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은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맞아들일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면을 만나야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성숙하는 은혜로운 한 해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흘려보내야 할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아멘!"으로 응답하는 주님의 날 되십시오. "아멘!"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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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광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

-공동체, 말씀, 오늘 -

5년만의 한파라 무척 춥습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감하는 겨울 추위입니다. 살아간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주 떠오르는 물음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이젠 오래 사는 장수가 축복의 선물이 아니라 부담의 짐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고단한 삶, 희망 없는 삶에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곤 합니다.

정말 살아가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기적같이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보면 저절로 고맙고 장하다는 생각에 덥석 안아 드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아마 하느님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며칠 전 외출 후 귀원 중 택시 기사의 평범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요즘 택시 타는 분들 열이면 열 다 불안 해 합니다. 여유 있고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인이든 장년이든 청년이든 다 똑 같이 불안 해 합니다.”

어제 오랜 만에 수도원 피정 중인 한 형제가 집무실을 찾았습니다. 이 형제 역시 20년 이상,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과 인연을 맺고 외로운 처지에서 기적같이 살아 온 믿음의 형제입니다.

“말씀의 처방전을 써 주십시오. 이것은 전번 써주신 처방전입니다. 오늘 낮기도 때 914쪽 말씀이 좋았습니다. 그 말씀을 써 주십시오.”

하며 지갑 속에 고히 보관된 예전의 ‘말씀의 처방전(1테살5,16-18)’을 꺼내 보이며, 정확히 페이지를 기억하여 부탁하기에 성무 일도서를 찾아 형제가 청한 말씀을 처방전으로 써줬습니다.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 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 되라고 고생시킨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주님을 경외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보여 주신 길만을 따라 가도록 하여라.”(신명8,5ㄴ-6).

수도’공동체’에서 피정 중 ‘말씀’을 통해 바로 ‘오늘’인 어제 하느님을 만난 형제입니다. 참으로 어렵고 희망없는 처지에서도 씩씩하고 기쁘게 사는 형제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인생 광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이며, 저는 '공동체, 말씀, 오늘'이란 세 측면에 걸쳐 집중적으로 묵상했습니다.

첫째, 공동체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의 배경도 공동체입니다. 1독서는 공동체 전례로 우리가 거행하는 공동미사전례와 흡사하며 2독서는 공동체의 원리에 대한 소상한 설명이며 복음은 회당의 공동전례에서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당신의 말씀으로 삼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존재는 관계입니다. 끊어지면 죽고 이어지면 삽니다. 공동체의 관계를 떠나선 살 수도 없고 자신의 정체성도 실종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가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살아갈수록 공동체의 진가를 실감합니다. 나이 들어 무능력해질 때, 병환으로 심신을 가눌 수 없을 때, 급기야 세상을 떠났을 때, 공동체의 도움없이 대안이나 대책이 없음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가 이렇게 따뜻한 집무실에서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공동체의 은혜입니다.

하여 사람은 어떤 형태든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좋든 싫든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고 끊임없이 돌보고 가꿔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가정공동체의 복원입니다. 결손가정의 아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가출하는 결손가정의 어른들도 많습니다.

공동체의 붕괴가 혼란의 주범입니다. 마을공동체, 학교공동체, 가정공동체든 공동체 붕괴의 시대입니다. 치열한 경쟁 풍토의 자본주의 사회가 빈부의 양극화를 깊게 하고 각자도생의 이기적 인간으로 만듭니다. 참으로 있는 이든 없는 이든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막연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가 진짜 우리가 살아야 할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으로 주님의 반석위에 확고히 자리잡을 때 어떤 세상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여 공동전례를 통한 공동체의 일치가 그리도 중요합니다.

둘째,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방금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오이다.’ 화답송 후렴을 힘차게 노래했습니다. 공동체와 말씀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혼자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 공동전례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과 강론을 듣고 깨닫는 것과 조화되어야 합니다. 공동전례가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납니다. 일치의 중심, 다양성의 중심, 연대성의 중심은 바로 주님이자 주님의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보십시오. 1독서의 공동전례 풍경이 얼마나 장엄하고 감동적인지요. 그대로 우리의 미사공동전례를 닮았습니다. 에즈라 사제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섭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 온몸과 온맘으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면서 함께 예배합니다.

도대체 이런 공동전례 없이 공동체의 일치를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지요. 더불어 민주당, 더불어 숲, 더불어 잘 살자는 경제민주화 등, 요즘 더불어 라는 말이 널리 회자됩니다. 더불어 전례보다 공동체의 일치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더불어 미사와 시편기도 공동전례를 통한 주님 말씀의 은총이 우리의 내외적 일치를 이루어 주고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희망과 사랑, 기쁨과 평화를 선사합니다.

사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트라우마(상처)를 치유하는 데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것도 없습니다. 어제 읽으며 메모해둔 내용입니다.

“기억의 담지자인 신체 회로의 회복이, 혹은 재구축이 필요하다. 뇌회로의 재 연결, 타인과의 관계 재연결이다. 이를테면 합창과 체육, 운동, 요가, 마시지, 연극까지 함께 몸을 움직이며 즐겁게 참여하는 활동이 트라우마 치유에 필수적이다.”

그러니 함께 기쁘게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영육의 치유에 좋은지 깨닫습니다. 하여 시편저자는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이라 하며 전례축제에 참여한 이들을 격려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바오로는 교회공동체의 직무에 말씀이 우선임을 천명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고,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 우선순위임을 알려줍니다. 말씀을 통한 각성이요 깨달음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소유의 기쁨도, 소비의 기쁨도 아닌 말씀을 통한 깨달음의 기쁨입니다. 깨달음을 통한 위로와 치유, 기쁨과 자유입니다. 제가 요즘 며칠동안 얼마전 타계한 시대의 지성이자 스승이라 일컫는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저서 ‘담론’을 완독했습니다. 감동적인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 바닥에서 최대한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 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갑니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 였습니다. 신문지만 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은 살아있음의 어떤 절정이었습니다.”

그대로 햇볕 은총이요, 하느님 방문의 상징이요, 일종의 하느님 만남의 체험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고백입니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에 말씀 공부와 말씀을 통한 깨달음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이요 오늘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말마디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마디이고, 하나는 카르페 디엠, ‘오늘을 살아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말마디가 ‘오늘’입니다.

주님은 오늘 회당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신’ 당신 사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십니다. 이어 다음 주님 말씀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대로 오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미사은총으로 온갖 질곡에서 해방되어 내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워졌음을 선포하십니다. 1독서에서 온 백성을 위로하는 레위인들의 말씀은 그대로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들 하지 마십시오.”

하루하루의 '오늘'이 하느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절망하지도, 울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주시는 기쁨이야 말로 진정 우리의 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희망과 기쁨을 가득 선사하시어, 광야인생 더불어 힘차게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시고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도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 2016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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