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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4주일 독서와 복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조회수 | 1,506
작성일 | 10.01.28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서 1,4-5.17-19

요시야 시대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12,31ㅡ13,13<또는 13,4-13>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루카 4,21-30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묵상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출신을 떠올리고는 능력을 의심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 목수 일 하던 그 사람의 아들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본모습에 다가가는 데에 실패합니다.

그들은 기적의 주님을 만나고 접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수의 아들이란 생각 때문에 ‘기적의 힘’을 깨닫지 못합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한쪽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에만 매달리다가 그분의 영적 모습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벌주거나 징계를 가하기 위한 기적은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편견을 뚫지 못하는 믿음을 애석하게 여기셨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기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숨 쉬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그렇건만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주셨기에 있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편견’을 깰 수 있습니다.

▶ 매일미사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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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하느님, 오늘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계획을 우리 삶 안에서, 이웃의 삶 안에서 식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열린 마음의 침묵을 주십시오.

▪ 독서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나자렛 사람들과 심각하게 갈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사명과 활동 계획을 소개하기 위해 이사 61, 1‐2을 읽은 후, 바로 짧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에 놀랍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예수님이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아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대해 온 메시아가 요셉의 아들일 수 없고, 절대로 요셉의 아들이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의 닫힌 마음과 편견 앞에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당신 사명이 소외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잘 알려진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사용하십니다(루카 4, 25‐27).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엘리야는 이방인인 사렙타 과부에게 보내졌고(1열왕 17, 8‐16), 엘리사는 많은 이스라엘의 나병 환자에게 가는 대신 시리아의 한 이방인을 치유하도록 파견 되었습니다(2열왕 5, 14).

이 이야기는 앞서 예수님이 봉독한 이사야서 말씀(루카 4, 18‐19)을 해석하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신 예수님의 선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여기서 루카가 말하려는 것은 동족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한 하느님의 약속에 이방인도 유다인도 마찬가지로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루카 4, 25‐27에 소개된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 자신한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루카가 나자렛 회당의 설교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점입니다. 루카복음서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한 계약의 약속을 성취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시작하여(1, 17; 1, 54‐55, 72‐75) 모든 민족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선포하라는 초대로 끝나는데(24, 47),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제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혈연이나 율법 준수가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루카 8, 15).

복음의 수취자가 자신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는 격분한 나자렛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4, 30). '떠나가셨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위급한 순간을 피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거나 유다인들에게 거부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적대감에도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계속 가신다는 것,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파견된 분으로서 그 목적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의미입니다(4, 43). '떠나가셨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그리스어 동사는 실제로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 번의 과거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반복되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루카복음서 전체 안에서도 '떠나가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길, 결국은 그분을 운명의 도시 예루살렘에 이르게 하여 죽음에 넘겨지고, 승천하여 아버지에게 올라가 영광에 이르는 그 길, 그분을 위해 마련된 하느님의 계획과 연결되는 말입니다(4, 42;7, 6.11;9, 51.52.53.56.57;13, 33;17, 11;22, 22.39;사도 1, 10‐11).

루카 안에서 이 동사는 자주 나오는데(51번) 루카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소개하는 중요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루카에게 예수님은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진 분입니다(루카 9, 51).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 33)

루카 4, 25‐30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복음 거부와 이방인들의 받아들임이라는 주제는 루카와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를 예고합니다.

▪ 성찰

오늘 본문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계획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폐쇄된 사고방식을 상징합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성경 첫머리부터 설정된 하느님의 관점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 12, 1‐3)에 충실한 분이며,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스라엘도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로마 9‐11장).

▪ 기도

"주님, 당신은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영광,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이십니다."(시편 3,4)

▥ 임숙희 님
  |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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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 뜻하지 않은 좋은 말이나 선행을 보일 때 당연히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고 보이지 않는 손익 계산이 분명해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혹시라도 마음을 고쳐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변덕스러운 사람이기에, 얼마 안 가서 본심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과 판단이 이렇게 눈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에 오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으로 그분께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들은 이 놀라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못합니다. 한낱 목수의 아들인 그분에게서 그런 말씀들이 나오는 것이 뜻밖이며 의아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어떤 기적을 행하신다면 믿어 보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태도로는 기적을 베풀어 주어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뵙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8 참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놀라운 일은 놀라운 일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고 깨닫게 되어 신앙에 도달하여 우리도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매일미사 2016년 1월 30일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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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결정적인 구원의 시기에 이르렀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이 선언을 듣는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그들은 은총의 메시지는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예언자도 제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사례는, 하느님께서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모두 제쳐 놓으시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을 들은 나자렛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당신의 갈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께서 배척받고 돌아가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쁜 소식이 이스라엘을 넘어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이라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신비를 미리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 내용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신자라는 사실에 머무르다 보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행하는 데 오히려 무뎌질 수도 있음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순간순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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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
매일미사 2019년 2월 3일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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