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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
조회수 | 1,652
작성일 | 10.01.28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을 들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게 말하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합니다.‘보잘 것 없는 우리 마을에서 이런 사람이 나오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인가! 이제 우리도 다른 고장 사람들 남부럽지 않게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어! ’

처음에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자신들을 위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며, 자신들의 아픔을 치유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고향 사람들의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소유이며,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기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소유물이 될수 없습니다. 다른 고장에서 행하신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질투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할 것이다.”그리고“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며 더 이상 나자렛 사람으로 머무시기를 거부하십니다.

이제 나자렛 사람들의 예수님을 향한 애정 가득한 환호는 절제할 수 없는 분노로 바뀝니다.‘우리만의 구세주가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나아!’ 라는 마음으로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상대방을 소유하고픈 욕망으로 가득한 그릇된 사랑이 빚어낸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하는 나자렛 사람들의 왜곡된 사랑과 모든 이와 함께 하시기 위해 나자렛 사람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는 예수님의 참 사랑 사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예수님을 향한 참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아예수님을 향한 참사랑은 예수님을 나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으며, 나를예수님의 소유물로 봉헌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은 나의 뜻을 예수님께 강요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뜻을 나의 것으로 받아 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은 예수님께서 나와 머무시기보다, 나보다 힘든 벗들에게 먼저 다가가시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은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총보다, 삶에 지친 벗들에게 베푸신 은총에 더욱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은‘나만의 예수님’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의 예수님’이기를 바랍니다.

상지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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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굿바이 아집

루카 복음 4장을 처음부터 보면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계셨고 여러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시어 언제나처럼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서로 상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대해 진정 하느님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구나 하는 경탄의 놀라움을 보인 이들과 그렇지 않고 시기심과 적개심에서 나오는 불편한 놀라움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나자렛에 오시기 전에, 갈릴래아의 많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말씀들은 소문을 통하여 나자렛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지도급 인사들 즉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고개를 돌려 믿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신 성분을 들추어내며 불신의 구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왜 참된 진리를 말하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반대를 했었나를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려 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은 일부러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와 진리를 듣게 되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것을 충분히 이해를 했다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자신이 처신하는데 곤란한 상황이 생기게 되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으며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실은 사라지고 자기가 펼쳤던 억지가 마치 참된 진리로 둔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 세상에서 흔히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떤 것이 참된 정의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참된 진리로 여기면서 정작 올바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아집에 사로잡혀 타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개인적인 시각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참된 진리와 정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통하여 참 진리와 정의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정현준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 2016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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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주님께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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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테니스를 좋아합니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건강을 위해서 신부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테니스를 시작했고 좋은 기회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테니스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그 이전에 교리 반에 골프 프로가 있어서 2주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가르치던 프로는 “신부님들은 왜 그렇게 힘이 셉니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보고 힘이 세다고 한 사람은 그 코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드럽지 못하다, 힘이 들어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테니스를 배우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formㆍ生ㆍformㆍ死’로서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생각으로 멋있게 공을 치려고 합니다. 폼에 모든 원리들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치는 코치는 제가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오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사실 배우다보면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저도 답답해집니다. 그러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하면서 제가 가르친 대로 공을 치면 이제 알았냐고 웃고 있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배우면서 하느님과 나,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삽니다. 어떤 때는 하느님 말씀대로 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아!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었구나!’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은 내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테니스를 배우면서 코치처럼 공을 칠 수는 없다는 것에 나는 하느님과 똑같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무능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깨달으면서,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조심스럽고 겸손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던 지난 시간은 부끄럽기만 합니다. 앞으로도 내 마음대로 살 것 같은 삶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나온 시간에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잘 할 것 같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합니다. 저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살리시는 분, 자비로우신 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요즘에는 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는 고기를 잡아먹으려고 잡지만 주님의 제자는 영원한 삶으로 초대하기 위해 사람을 낚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버는 방법도 건강하게 사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으셨지만 영원히 사는 방법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엎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자주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 엎드려 봉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목자인 저에게 직분이 되었습니다.

이제 교우들을 살리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라는 다짐을 해봅니다. 사제인 나의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상처가 되지 않을까? 나의 똑 부러진 똑똑한 말 한마디가 위선자가 되진 않을까? 나의 근엄한 모습이 교우들에게는 벽이 되지는 않을까? 차라리 조금 속이 상하더라도 대접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더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이런 복잡한 생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는 주님께 청합니다.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생각까지도 가져가 주시고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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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규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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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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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절망적인 때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때입니다.‘나는 왜 사는가?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순간순간 많은 물음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어부 베드로는 절망 가운데에 있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고기잡이뿐인데, 밤새 힘겨운 노동의 결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신의 피곤함보다 마음속으로 저며 오는 상실감이 베드로를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탁하십니다. “배를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줄 수 있겠느냐?”‘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아직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구나!’ 베드로는 탄식 섞인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베드로는 생각합니다.‘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무능력한 어부에게 그물을 던지라니, 내가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데, 과연 저 분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아직은 옅은 믿음과 뿌연 희망으로 대답합니다.“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기쁨과 흥분, 그리고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도 잠시, 베드로는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저는 제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기며, 무능력한 제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저는 삶의 의미를 잃었고 희망을 접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죄인입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예수님의 결정적인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절망 속에 헤매던 한 사람이 희망으로 일어납니다.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작디작은 한 사람이 모든 이를 품에 안는 넉넉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귀한 우리의 존재 의미를 잊고 절망 속에 허우적거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사랑 가득 담긴 믿음의 부르심을 들으며, 절망에 주저앉은 우리를 일으켜주는 벗들의 따뜻한 손을 잡으며 다시 일어섭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소중한 의미를 잃고 헤매는 벗들을 만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과 벗들의 도움으로 새로 태어나듯이, 우리가 어둠 속에 주저앉은 벗들에게 희망의 빛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벗들을,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벗들을, 끝없는 절망의 골짜기로 자신을 내던지는 벗들을, 믿음 가득한 목소리로 부르고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안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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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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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순례하는 성당으로 만들어 주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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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교구장 주교님께서 성탄 카드에 따로 적어 보내 주신 말씀입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 제가 주임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이곳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 터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남과 북의 비인도적인 살상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미움과 증오의 고리를 끊고, 서로에 대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밖에서 건물의 외형을 바라보면 한국 전쟁으로 사라진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이 보이고, 실내를 보면 함경남도 덕원에 있었던 성 베네딕토 대수도원 성당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성당 제단 위 천장화는 남한의 작가들이 도안하고 북한의 평양 만수대 창작사의 벽화창작단 공훈 작가들이 중국 단동에서 작업한 것을 다시 받아 부착한 모자이크화입니다.

정전 60주년인 2013년 6월 25일에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봉헌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지난해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부터 시작된 자비의 특별 희년에 의정부 교구 순례지 성당으로 선포되어 자비의 특별 희년 기간 동안 전대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지난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자비의 문 선포식을 통해서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충만히 받도록 은총을 받은 곳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자신에게서 떠나 주십사 청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고 참회하고 속죄하면서 하느님만을 경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하느님 자비의 은총 안에 함께 할 이들을 초대하십니다.

다가오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들은 회개와 보속의 시기인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곳,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는 곳, 또 개인의 성화와 우리 민족의 성화를 위해서 참회하고 속죄하는 이곳에 많은 분들이 찾아오도록 신자들을 초대하며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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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교구 안성남 안드레아 신부 : 2016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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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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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고매한 선생님 정도로 알았던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베드로는 엎드려 자기의 처지를 고백해버립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은 이렇게 나 자신이 하느님 앞에 머리털 하나까지 남김없이 드러나 버립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끌어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제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께 이끌리다가 자기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깨닫고 벌벌 떨면서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든 이사야 예언자든, 모두 각자의 삶에서 크고 작은 한계에 허덕이던 상황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다가 한 마리도 못 잡았고,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불투명한 삶 앞에서 적어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은 도망가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일하다가 피곤에 절은 몸으로 저 낯선 선생님에게 무관심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우찌야 임금이 죽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붕 뜬 마음으로 세월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기들이 사는 삶의 방향을 잘 다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저 낯선 선생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어려운 삶 안에서 마음속 깊이하느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사람들이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니, 누구나 하느님을 만나지만, 그런 사람들이 합당하게 하느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자 하나같이 자기의 처지를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하느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그리고 각자 하느님에게서 자신의 부르심을 받게 되고,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겪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부르심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부르심을 알아듣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하느님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을 잘 돌아보느냐에 따라, 이 부르심은 또 더 깊은 부르심으로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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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백병훈 요셉 신부 : 2019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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