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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그들의 선택
조회수 | 1,364
작성일 | 10.02.06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파악을 위하여 어느 잡지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과 아들의 친구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려 둘 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의 손에는 오직 한 사람을 건질 수 있는 구명조끼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누구에게 그 구명조끼를 던질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 마음에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고 아들의 친구를 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들의 친구를 죽게 놔둘 수도 없고, 그때 아버지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자신의 아들은 착실하게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만일에 죽더라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반면 성당에 가 본 적 없는 아들의 친구는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아들아 너를 사랑한다.’ 라고 외치고 구명조끼를 아들의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아들 대신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어떻게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들(제자들)의 입장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자신들에게 밥줄인 고기잡이를 그만 두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주문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알아듣기가 너무 어렵고 난해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라는 구절과 ‘확신’이란 말의 연관성을 생각해 봅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들(제자들)을 움직이게 했던 근본적인 동기는 그 어떤 ‘확신’입니다. 그런 확신이 아니고서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생계수단인 고기잡이 일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그 어떤 일, 가치 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확신감이 그들(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개편된 본당기구 이해를 위하여」란 책자에 보면, 여러 단체, 위원회 회칙(규약)이 나오는 데 그 부칙 1항의 내용입니다. “본 정관에 명시되지 않은 것은 교회법 규정과 일반 통례에 준한다.” ‘교회법 규정과 일반 통례’란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바로 ‘교회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 정신은 예수님 체험을 통한 어떤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체험이 없는 생활로 무기력하고 형식적인 우울한 신앙생활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체험이 없으니 소신도 확신도 생길 리 없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희생‧봉사만이 아니라 더 큰 사랑‧가치인, 예수님 체험을 통한 확신에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ㄴ)

▶ 김윤호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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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1997년 9월 5일 하느님 품 안으로 가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아실 겁니다. 수녀님의 말씀 중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지 않고서는사랑을 지닐 수가 없으며,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정도 또한 극히 적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베푸는 것 같은 사랑도, 기도로써 주님께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루카 5,10)

저의 오래 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것은 그물에 가득 들어 있는 물고기를 잡아 끌어 당기는 어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입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사진이었습니다. 한동안 그 사진이 잊혀지지 않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11)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로부터 선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셨기에 베드로는 바뀌었고 그 분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신뢰하였기에 스승님의 말씀에 자신의 뜻을 꺾고 당신의 말씀에 따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을 계속 내세웠더라면 할 수 없었을 행동이었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아니 변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고 성숙하고 성장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선택하셨기에 그리고 그 분의 선택에 순종하였기에 변화되고 성장합니다.그래서 주님의 으뜸 제자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기에 변화되고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처럼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고난과 저항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삶을 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수녀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께 청하는 기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바로 주님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응답과 감사의 기도라고 감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매일 부르시는주님께 늘 응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항상, 즉시, 기쁘게…

▥ 대구대교구 김정렬 베드로 신부 : 2016년 2월 7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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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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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을 통해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더 큰 고독감을 느낍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시대가 너무 가벼운 것만을 추구해서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도 가볍게 만나고, 사랑도 가볍게 하고, 쉽게 만나고 헤어집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마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얻었기 때문에 쉽게, 빨리 잃어버리고 싫증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볍고 빠르고 쉬운 것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행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더 쉽고 빠르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이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좀 더 노력하고 인내하고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거기에다 내 방식대로, 내 편한 대로 하느님을 찾고 체험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하느님은 안 계시는 모양이다.’, ‘이 신앙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포기해버립니다. 쉽고 가벼운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는 과거보다 하느님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지 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겐네사렛 호숫가에 있는 마을 카파르나움 출신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베드로는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며 자기가 알고 있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곳은 더 빨리, 더 쉬운 방법이 아니라 천천히 인내하며 자신의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하느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묵상과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한순간에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가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을 비우게 되고 하느님을 찾고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은 땀을 흘리지 않고서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기다리고 인내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만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어떤 보물보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한지, 쉽고 편하게 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진정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깊은 곳으로 가서 주님께 나를 내맡기면서 기다리고 인내하는지 되돌아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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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정희 바오로 신부 : 2019년 2월 10일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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