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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조회수 | 2,195
작성일 | 10.02.20
기도

오소서, 성령님. 언제나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선택하도록 저희 마음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독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이 유혹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 이라는 악마의 말에 나타납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여러 차례 강조됩니다. 루카 1, 35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 이라고 일러줍니다. 주님의 세례 때 (3, 22)와 거룩한 변모 때 (9, 35)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선택한 아들” 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지금 악마의 유혹은, 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충실하신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은 장소는 광야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광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으로는 넘어지기 쉬운 장소,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시험한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장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위한 조건이 보장되지 않기에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광야가 이러한 구약성경적 의미를 그대로 지닌다는 점은,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응답하면서 세 번 모두 신명기를 인용하신다는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과의 관계, 곧 아들이라는 그 관계에 충실히 응답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첫 번째 유혹은 빵의 유혹입니다. 빵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기본 욕구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3절)이라는 말은 도전적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어떻게 해주셔야 한다는 것을 인간 편에서 (또는 악마 편에서 !)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명 8, 3을 인용하여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신명기에서는 여기에 이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먹을 것을 달라고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은 기적으로 빵을 만들어 배고픔을 채움으로써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데 달려 있음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빵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세와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6절). 여기에서도 악마의 말에는 걸림돌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악을 섬기는 사람들은, 세상의 통치권이 진정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신명 6, 13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본문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문맥 안에 들어 있습니다. 7절에 사용된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이라는 표현도 분명하게 종교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누가 이 세상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권력을 갖기 위해 그 다른 누구를 경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예수님은 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을 섬기심으로써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신명 6, 16을 인용해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마싸에서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한 것처럼,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마싸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마실 물을 달라고 하며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라고 할 때도 (루카 23, 3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써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성찰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면 우리한테도 유혹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나날이 우리에게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혹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우리의 삶을 내맡기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그분을 사랑하기를 선택한 일이 있는가 ?’ 라는 K. 라너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가장 먼저 선택하게 됩니다.

기도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편 16, 1 – 2)

안소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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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눈을 밝혀주시어 주님께 합당한 것을 알아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세례 사건 이후에 그분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셔서 40일간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루카는 예수님 족보에서 아담을 하느님의 아들(루카 3,38)로 지칭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는 광야라는 단어를 통해 광야에서 시험받은 하느님의 자녀 이스라엘을 연상시키는 점에서, 예수님의 유혹 사건은 단지 그분 개인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으며 인류 전체 특히 지상에서 순례 중인 하느님 자녀들을 대표한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성령에 이끌려 이뤄진 것이란 점은 하느님 자녀들이 받는 유혹과 시련이 하느님 계획 안에 들어 있다는 그분의 오묘한 신비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9,23)입니다.

예수님은 40일에 걸친 악마와의 싸움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첫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시장하신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요구하는데 그분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허기를 심하게 느끼셨을 테지만 그 옛날 반항하던 이스라엘처럼 육체적 필요를 존재 중심에 놓지 않고 섭리로 돌보시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찾는 것을 우선하시며 그분 섭리에 그 필요를 내맡기는 모범을 보이십니다.(12,31)

그리고 이 첫 번째 유혹에서 악마가 내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전제 조건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전제는 그분이 하느님 아들임을 거부하는 불신을 은근히 보여주는 말로서 그의 요구와 더불어 마치 능력을 보여주어야 믿겠다는 태도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신의 태도, 징표를 보아야 믿겠다는 자세를 복음서 내내 볼 수 있고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 때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마르 15,32; 루카 23,35.37.39)

그러나 예수님은 이 불신의 자세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더군다나 이 거부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신의 정체성이 당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요 또 그 능력의 드러남으로 확인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신 존재에 달린 것이요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에 실패한 악마는 이제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을 경배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그는 슬쩍 첫 번째 유혹의 그 전제를 생략하여 마치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 하느님 아들에게 어울릴 권세와 영광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대답하시며 당신 정체성의 본질을 흐리지 않으십니다. 아들 신분의 핵심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이 경배 προσκυνέω와 섬김 λατρεύω이란 단어를 거의 배타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대상으로 쓰고 있는데 그중 베드로를 모시면서 하느님께 경배하듯 예의를 갖춘 코르넬리우스의 태도(사도 10,25)에 대해 베드로가 한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참된 하느님 자녀들은 자신을 찾거나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만을 찾으며 예수님은 그 첫 번째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영광을 하느님께만 돌리십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하느님의 보호와 연결시켜 유혹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면 그분께서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시고 구해주실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성경으로 악마에게 논박하셨기에 그도 성경을 근거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음의 표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악마의 요구를 그분의 생애 특히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3) 그리고 그분 스스로도 고통 중에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셨는데(마태 27,46; 마르 15,34) 아마 가장 처절하고 힘든 유혹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분은 징표를 요구함이 없이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느님 자녀들은 죽음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보장받기 때문에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거부하는 현세적 생명 보호의 사고방식을 사탄의 것이라고 하시며 과감히 물리치십니다.(마르 8,33 참조)

이렇게 악마는 모든 종류의 유혹에서 실패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나가지만 다음 기회를 노립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시련과 유혹으로 점철되어 있고(루카 22,28) 특히 수난의 때에 그러하지만(루카 22,3.31.53) 그분은 하느님께 충실한 아들로 남으셨습니다.

묵상 (Meditatio)

내 육신의 욕구와 필요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는 각각 내게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능력지상주의인 세상의 가치 속에서 나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내 정체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 가치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지요?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예나 직위, 이익보다 우선시하고 있고 이것들을 하느님 사랑이라는 목적에 방향 짓고 있는지요? 나는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하느님 사랑을 굳게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지요?

기도 (Oratio)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아, 악을 미워하여라. 그분께서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목숨을 지키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출해 주신다.(시편 97,10)

김태훈 수사(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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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유혹의 내재성.

주님이 광야에서 당하신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 현존하는 것이며 악마는 현실적 필요성을 이용하며 유혹합니다. 아담을 유혹한 악마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망을 이용하면서 “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줄 하느님께서 아시고.”

첫째 사람은 살기위하여 유혹을 받아들입니다. 재물욕, 권력욕, 명예욕, 그러나 유혹은 사람을 죽이는 독입니다.

둘째 사람은 호기심 때문에 저 문을 열면 무엇이 있을까? 선과 악이 현실속에 혼합되어 현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 양심이 사람 마음속에 움직이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권력, 재력, 명예<매력>, 살아가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내 안에서 교만과 자만심과 이기심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채워지면 사람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빵의 유혹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라고 유혹을 물리치신 주님은 돌이 빵이 되는 불법적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땀을 흘려 합당한 방법으로 빵을 얻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권력을 얻기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사용하어 얻는 권력은 참 권력이 아닙니다. 참권력은 억압이나 독재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권력은 하느님께서만 나오는 것이지 악마적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명예는 자기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준비된 것이어야 합니다.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면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고 더 받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싹부터 잘라 버려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기록 되여 있습니다.

인격을 갖춘 사람은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고 이런 사람은 살아서도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의식주를 갖추지 않아도, 권세나 영광이 없이 외롭게 계서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무시를 당해도 고난을 극복하신 것 같이 우리도 광야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 가난과 무능과 경멸을 참아 받아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믿는 모든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 필요를 부정과 불의와 부당하게 얻으려 하지 않고 정의와 사랑과 희망으로 얻어 누리며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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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인생 광야 순례 여정

▪ 성령 안에서 승리와 기쁨의 여정

사순절이 되면 분도규칙 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라는 장이 생각납니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대개 사순절이 되면 먼저 49장을 살펴 보는데 저희도 지난 금요일 사순시기 초에 49장을 공부했습니다. 이 장에서 제일 좋아하는 다음 두 구절입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잠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을 기다릴 것이다.”(RB49,6-7)

놀라운 것은 ‘기쁨(gaudium)’이란 단어가 전 73장으로 이뤄진 긴 장들의 규칙에서 여기서만 단 2회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순절은 우울하고 어둡고 무겁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영적 갈망의 기쁨을 지니고 거룩한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미 부활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흡사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지내는 대림절을 닮았습니다. 문제는 ‘기쁨’입니다. 수차례 인용했던 한 수도형제가 전한 잊지 못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사람도, 돈도, 건물도 다 갖췄는데 하나만 빠졌습니다.” 호기심에 궁금하여 곧장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다 갖췄는데 기쁨이 빠진 삶이라면 참 힘들 것입니다.

우리 삶을 흔히 광야 순례 여정으로 일컫곤 합니다. 사순절의 40일은 우리의 전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순절을 잘 지내야 일년 영적농사도 잘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앞선 40일 광야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우리의 인생광야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배웁니다.

아침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이 생각납니다. “우리를 위하여 유혹과 수난을 당하신 주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우리를 위하여 유혹과 수난을 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쁘게 광야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배웁니다. 우선 전제로 할 것은 우리 인생은 광야라는 것은 것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광야입니다. 함께 해도 결국은 혼자입니다. 예수님이 악마의 유혹을 겪은 것도 광야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무수한 유혹을 겪었고 앞으로도 많은 유혹을 겪을 것입니다.

첫째, 성령의 도움 있어 광야의 삶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서두가 입증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고 합니다.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에 겪는 악마의 유혹입니다. 성령은 하느님 사랑의 현존과 능력입니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없이 겪는 광야가, 희망과 기쁨 없이 살아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춰도 희망과 기쁨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 인생 살아가겠는지요. 성령은 희망과 기쁨의 샘입니다. 성령충만할 때 희망과 기쁨 가득한 광야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여 교회나 수도원에서는 무슨 중대한 일을 앞두고는 성령송가를 부르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악마도 하느님의 수중안에 있고 성령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동안은 전혀 악마를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

둘째, 인생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승리할 때 점증하는 기쁨입니다.

혹자는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왜 악마의 유혹을 겪게 하셨나, 아예 악마가 없었으면 좋지 않겠나’하는 짧은 생각입니다. 사실 유혹이 없으면 사는 재미도, 삶의 깊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유혹을 바래서가 아니라 겪게되는 유혹을 슬기롭게 통과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혹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이 없는 삶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악마의 유혹을 통과해 가면서 영적 성장과 성숙의 겸손과 기쁨의 삶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압니다. 시간낭비하며 아무나 유혹하지 않습니다. 열정없이 무기력하게, 태만하게 사는 이는 유혹하지 않습니다. 그냥 놔둬도 저절로 망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참으로 열심히, 충실히 사는 매력적인 이들을 유혹합니다. 잘살려는 이들에게 유혹이 많은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셋째, 말씀과 기도가 악마의 공격에 최고의 무기입니다.

광야는 영적전쟁터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할 때 광야의 영적전쟁도 기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역시 말씀과 기도도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영적전쟁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입니다. 우리 역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영적전쟁이요, 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하느님의 전사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를 보셔요.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고 합니다. 그 후 베드로를 통해서,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까지 악마의 유혹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악마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 승리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런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우리 또한 영적전쟁에 승리합니다.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악마의 공격이요 유혹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러니 늘 깨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오늘 악마의 공격은 전형적입니다. 우리 인간의 치명적 약점인 본능적 욕망을 공격합니다. 앞으로도 악마의 공격은 이런 양상일 것입니다.

우선 식욕을 통한 공격입니다. 빵과 밥은 우리 인간이 살기위한 기본적 현실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십일 동안 단식 피정하셨으니 예수님은 많이도 시장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식욕보다 억제하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성욕과 물욕에 앞선 근본적 욕망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빵에 대한 욕구와 함께 말씀에 대한 욕구가 건강한 영혼에는 필수입니다. 빵에 대한 욕구에 이은 부와 권력과 지위에 대한 욕구가 절대적입니다. 금력, 권력욕, 명예욕의 유혹에 빠져 영혼을 파는 이들은, 영혼을 잃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소.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요.”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영혼을 잃습니다. 세상 권세와 영광에 영혼을 파는 것이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삶입니다. 예수님의 답 또한 명쾌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아, 우리는 악마의 유혹에 승리하는 법을 예수님께 친히 배웁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악마를 퇴치하십니다. 말씀사랑은 바로 하느님 사랑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 경배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 삶은 말씀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고 악마와의 영적전쟁에도 백전백승입니다.

말씀의 무기와 함께 고백의 기도가 또 절대적입니다. 오늘 1독서와 2독서가 입증합니다. 1독서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요, 2독서는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 또한 평상시 말씀공부와 더불어 이런 신앙고백을 바치며 하느님 사랑과 믿음의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는 데는 제일입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느님 은혜의 역사를 되돌아 보며 하느님께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고백의 공동성무일도 기도를 바칩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이들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충만함 중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고백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성령의 도움으로 악마는 저절로 달아나고 광야는 낙원으로 바뀌며 기쁨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참 분별하기 힘든 것이 악마도 성경말씀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에 악마의 말에는 전혀 힘이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이 참 집요합니다. 계속 장소를 바꾸면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는 마지막으로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우고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이어 그럴듯한 성경말씀의 근거를 댑니다. 마지막 악마의 유혹은 허영과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허영이나 교만에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반대로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체없이 반격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모두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에 승리하십니다. 3전3승의 통쾌한 승리입니다.

계속되는 우리의 광야인생순례여정입니다. 악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는 순간 또 남을 유혹할 때 우리는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순절 동안 악마의 유혹에 승리함으로 기쁨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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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복음 4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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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시들해 버린 곳에서 생명의 새순이 시작됩니다.

사순과 새순 사이에 길을 찾는 생명이 있습니다. 삶이라는 시간 안에는 고통스러운 광야도 있습니다. 힘겨운 광야에서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재물, 명예, 폭력성의 욕망을 다시 보게 됩니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먹음직스럽고 그럴싸합니다. 악마의 유혹을 통해 우리의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아프게 깨닫습니다

우리를 되살리시기 위해 당신 먼저 광야의 여정을 걸어가셨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는 절실함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소중한 것이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소중한 인격체들입니다. 하느님을 회복하는 길만이 잃어버린 인간의 품위를 되찾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어떠 어떠한 일을 하여야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사랑으로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이 사순 시기가 우리 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은총의 시간, 겸손 된 생명의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이 생명의 사순 시기가 빵도 말씀도 낮은 곳도 높은 곳도 바닥도 꼭대기도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닫는 감사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봄의 새순처럼 생명은 가장 빛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순과 새순 사이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뜨거운 회개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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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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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 복음 4장 1절-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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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사순시기로 접어든 오늘,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유다 광야! 한번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을도 인가도, 강도 샘도, 나무도 풀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거친 황야와 하늘만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예수님께서는 동행자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생필품도 없이,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 한 가운데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대피정을 시작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사순절을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절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절이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백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 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 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 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끼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 번 벗어 나보려고 그토록 발 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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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9년 3월 10일
  |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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