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7 45.6%
[전주/제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조회수 | 2,156
작성일 | 10.02.2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입니다.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폭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기도하고 싶은 성서 대목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 말씀은 세 가지 구약성서 대목을 혼합하여 세 가지 각도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힌 것입니다. 먼저 ‘선택받은’ 이 말은 이사야 42장 1절의 인용으로써 예수님은 야훼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통 당하는 종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발견했고, 하느님은 종의 헌신과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치유를 가능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들은’ 시편 2장 7절의 인용으로써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사랑하는 아들이란 뜻입니다. 세 번째 “그의 말을 들어라”는 신명기 16장 15절의 인용으로써 예수님은 마지막 참 예언자이니 그에게 순종 하라는 뜻입니다. 이렇듯이 “듣는다”는 말은 단지 주의깊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자기의 마음을 열고 말씀을 실행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하는 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사람들이 말하고, 듣고, 읽고, 쓰기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심리학자 말에 의하면 사람이 하루 중에 말하기가 30%라면 듣기는 45%이고, 읽기는 20%, 쓰기는 5% 정도라는 것입니다. 듣는 부분이 많은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할 때 전에는 말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말 잘하는 것보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잘 들어줄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한 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아버지 말씀에 귀 기울이시고,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시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만민의 빛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말씀을 우리 생활 한 가운데 모신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하는 일, 만나는 사람들 안에 더 큰 기쁨과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엄기봉 베드로 신부
447 45.6%
[제주] 따뜻한 사랑의 힘

제가 신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가 서품을 앞둔 한 부제님을 위해 영적선물로 산기도 40일을 봉헌하셔서 제가 함께 다닌 적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 한라산에 기도하러 가서 성령송가도 바치고 영가도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다닌 40일간의 산기도가 참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새 사제의 탄생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사제로서 걸어야 할 험난한 길에 필요한 은총을 청하기 위해 신자로서 희생과 기도를 봉헌할 때 사제를 위해 기도하는 이라면 모두 저희 어머니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기도하는 새 사제의 모습 속에는 저의 미래상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아끼는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수난 후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이시며 구약의 대 예언자들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초막 셋을 지어 영원히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가 주님과 머물 때 누구나 갈망하는 하늘 나라를 가르쳐줍니다. 새 사제를 위해 산기도를 바치며 성령송가를 부르던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의 힘이 문득 문득 떠오릅니다. 그때 당시의 새 신부님도 지금은 연수가 많이 차셨고 아들인 저도 어느새 10년차 사제로 들어섰습니다. 이것도 거룩한 변모가 아닐까요?

제주교구 허찬란 신부
  | 02.22
447 45.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루카 9,28ㄴ-36)

-----------------------------------------------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서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여기서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된다.”라는 말은
우리 교회의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는 용어와 뜻이 같은 말입니다. ‘지복직관’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지극한 행복’이라는 뜻인데, 이 행복은 신앙인이 누리게 될 행복 가운데 최고의 행복이고, 신앙인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브 6,17-19).”

여기서 말하는 이 ‘두 가지’는 하느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신앙인의 희망은 하느님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루어질 확실한 희망이고, 믿음이 있는 한, 이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2코린 4,17-18).”

여기서“희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을,
“희망은 구원의 시작이다.”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는 그 날은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또 여기서 ‘보이는 것’이라는 말은
현세의(지상의) 일을 가리키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일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희망하는 사람이고, 이 희망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지상에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될 제자들에게, 또 당신의 승천 후에 종교박해 등의 시련을 겪게 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더욱 확실하게 심어주기 위해서이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루카 9,28ㄴ-32).”

--------------------------------------------------

여기서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들의 증언 형식으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었다.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는데, 그 두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 머리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5-6).” 사도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하고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과 희망을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이고, 사도들 자신들의 믿음과 희망을 증언하고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재림 때의 모습을(루카 21,27-28) 미리 보여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떨치며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심판관으로 맞아들일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즉 황홀경에 사로잡혀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루카 9,33),

이 말은, “지금의 행복이 영원히 지속 되면 좋겠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로 직행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말을 끊으시고,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루카 9,35). 중간 경유지를 생략하고 종착점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믿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면, 지상에서의 인생을 신앙인으로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음을 증언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2019년 3월 17일
  | 03.1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19   [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3] 2362
718   [군종] 고통과 역경을 통한 진정한 부활 신앙  [2] 1969
717   [수원] 진실과 증거  [5] 2212
716   [안동]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27
715   [부산]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5] 2263
714   [마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4] 2340
713   [대구] 우리도 함께 가겠소  [4] 2235
712   [인천] 부활은 새로운 시작  [3] 2236
711   [서울]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4] 2684
710   [대전] 우리 곁에 살아계신 주님  [1] 1975
709   [청주] 주님과 함께라면  [1] 143
708   [춘천] 말씀에 귀 기울여라  [2] 2273
707   [원주] 일상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103
706   [광주] 증거하는 삶  2180
705   [전주] 일어나시오.  [2] 110
704   (백) 부활 제3주일 독서와 복음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2] 1913
703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1] 2159
702   [수원] 이성(理性)을 초월한 신앙  [3] 2212
701   [춘천] 백견(百見)이 불여일신(不如一信)!  [3] 2300
700   [의정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 2126
699   [인천] 사람을 믿어도 행복한데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더 행복할까?  [2] 2182
698   [대전]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477
697   [서울]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4] 2117
696   [안동] 문제가 없으면 그게 문제  [2] 1980
695   [부산]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3] 2186
694   [대구] 공동체를 지켜라  487
693   [마산] 교회, 부활신앙을 사는 공동체  [4] 2165
692   [전주]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달려갑시다.  [1] 2092
691   [광주] 평화가 너희와 함께!  102
690   [군종] 우리의 의심과 불신앙 속에서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  2025
689   [청주] 자상한, 친절한, 자비의 예수님  [1] 97
688   (백)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독서와 복음  [2] 1628
687   [수도회] '착해빠져' 탈인 사람  [2] 1972
686   [인천] 무언의 가르침  [2] 1997
685   [서울] 나의 분신 나의 십자가  [6] 1972
684   [안동]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2] 2044
683   [부산] 십자가를 질 각오  [5] 2116
682   [대구] 믿음·희망·사랑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3] 1641
681   [군종] 이 세상에 섬기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2] 1904
680   [마산]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도 공범자이다.  [3] 2170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